[마스터피스] 개념 속 '틈'을 들여다보는 작가, 에포케() 서재영의 세계
-
혼자서는 볼 수 없었던 세상을,
그들의 시선과 역사를 빌려 완성합니다.
그렇게 그들의 마스터피스를 이해합니다.
스튜디오 에포케와 작가 서재영을 소개합니다!
'에포케'는 후설이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으로써 사용했던 용어입니다.
우리는 어떤 대상이나 객체를 볼 때, 그것이 놓여있는 세상이라는 맥락 안에서 습관적으로 그 대상은 '이러이러하다'라고 판단하게 됩니다. 에포케는 그 대상을 마치 () 괄호 안에 넣는 것처럼, 우리가 습관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맥락 속에 가두지 않고 판단을 (보류) 함으로써 그 대상의 본질, 존재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입니다.
(...)
작품을 마주하며 생겨나는 '미적 경험'은 우리가 평면적인 책 속으로 옮기게 될 때 아쉽게도 사라지게 되는 경우가 많죠. 아티스트북 에포케()는 어떻게 작품의 감각과 책의 구조, 혹은 책을 구성하는 물질이 함께 갈 수 있는지를 고민합니다. 마치 '괄호 안에 넣음과 같이 오히려 책이라는 형태 안에 담음으로써 작품이 새로운 존재로서의 가능성을 가질 수 있도록, 새로운 감각으로 확장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에포케()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에포케()는 회화 작업뿐만 아니라, 개념적 작업, 사진, 설치, 기록물 등 여러 장르의 매체들이 다양한 실험적 방식으로 책이라는 오브제로 표현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 에포케()의 설명글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시각 예술을 통해 작품을 전개해 나가고 있는 작가 서재영입니다. 출판을 주로 하여 사진, 3D, 회화 등 다방면으로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저를 타인에게 소개할 때 ‘찾는 자’ 혹은 ‘발견하는 자’라고 말씀드리고는 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 말씀해주신 대로 정말 다방면으로 활동하고 계시죠. 시각예술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요?
원래 어릴적부터 미술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고, 미술 심리 치료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심리학을 전공하고 부전공하게 되었죠. 사실 전문적으로 배우는 것과 별개로 제 성장과정에서 항상 미술을 해왔다고 생각해요. 늘 무엇을 만들고, 그리고, 기록했었죠. 그러다 졸업 무렵에 학사를 한번 더 하더라도 미술을 제대로 해야겠다고 결정하게 되어 미술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 두 번 학사 과정을 밟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은데. 작가님께서 심리학이 아닌 미술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심리학은 ‘공부’의 느낌이 강했어요. 아무리 즐겁고 재미있어도 자리에 앉아 마음먹고 그 분야를 파고들어야 했죠. 그런데 저에게 미술은 그 경계가 뚜렷하지 않았어요. 휴식을 취하는 시간에도 자연스럽게 미술이나 예술적인 것들을 궁금해하고, 찾아보았죠. 억지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무의식적으로 예술을 찾았던 거죠. 그래서 제가 즐겁고 재미있게 앞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미술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또, 사실 저는 그전까지는 저 이외의 관심사가 별로 없었거든요. 정확히는 세상사에 크게 관심을 두며 살지 않았죠. 그런데 프랑스에서 공부하다가 한국에 돌아오며 계원예술대학 융합예술과로 진학하게 되었어요. 그곳에서 예술과 사회적, 혹은 철학적인 면에서 연결을 짓고 접점을 찾는 방법을 많이 배우게 되었죠. 그 과정을 겪으며 저에게 미술은 단순히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서 세상을 확장해 주는 하나의 매개체가 되었어요.
시각예술가는, 이름은 ‘시각예술가’이지만 사실 시각적으로 보는 것을 담아내기보다는 내가 주체자로서 경험했던 것, 감각했던 것을 ‘시각예술’이라는 도구로 풀어내는 거잖아요. 다만 그 시각예술이라는 것의 범위가 너무나도 방대하므로 미술도, 사진도, 글도 될 수 있는 거죠. 결국 개념적인 이야기를 어떠한 도구를 통해 풀어내야 하므로 자연스럽게 ‘시각예술가’가 되는 것이에요. 저는 제가 남기고 싶은 저의 경험을 기록하고 풀어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미술을 통해 세계가 확장된다고 느끼게 되었다고 말씀해주셨어요. 특별한 경험이 있으신 걸까요?
하나의 계기를 콕 집어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뉴스를 통해서 그 사실을 많이 체감할 수 있었어요. 이전까지 저는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뉴스를 그저 타인의 이야기처럼 관심 없어 했거든요. 프랑스 학교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순수하게 나의 내면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내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론적인 부분을 탐구하는 과정이 많았어요.
하지만 저는 모든 사람이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는 단지 자기 내면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과정에 대한 탐구에서 한 발짝은 빠져나와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특히나 저는 예술이라는 것이 삶이라는 영역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것을 대한민국으로 돌아와서 공부를 이어 나가며 깨닫게 되었어요.
동시대 전반의 이야기, 그리고 그 안에서 존재하는 나의 위치, 내가 내고자 하는 목소리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나니 뉴스 등을 더욱 관심 있게 보게 되었습니다.
- '내가 내고자 하는 목소리'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작가님꼐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스튜디오 에포케( )’도 그렇고, 저의 개인적인 작업에서도 그렇고 궁극적으로 제가 현재 작업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존재에 대한 물음’인 것 같아요. 스튜디오 에포케( )는 존재하는 것들을 고정된 관념에서 벗어나 바라보는 시도를 하기 위해 만들어졌거든요. 자연스럽게 지금까지 규정해 왔던 것들을, 다시 감각적인 방법으로 살펴보는 거죠.
저는 그것을 일종의 '틈'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 틈은 곧 개인의 상상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어떤 것을 상상했다고 해서 그것이 정답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러한 하나의 가능성은 생기는 거잖아요.
저는 이와 같이 의미를 걷어내고 이미 익숙한 것들과 다시 관계하는 시도를 통해 대상의 실재에 대한 물음과 동시에 '나' 혹은 '인간'을 비추고자 해요. 우리가 경험하는 많은 것들은 이미 규정이 된 채로 저희에게 경험이 되잖아요. 익숙한 방향으로 경험하고, 익숙한 방향으로 해석해서 살게 되죠. 저는 저조차도 저를 규정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제 존재에 대한 가능성도 열린다고 생각해요. 저에게는 그 규정을 한 번이라도 다르게 생각해 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 바로 작품이었어요. 흥미를 느끼는 다른 작가님들의 작품도, 제가 익숙해져 있었던 어떤 것의 개념적인 것에서 벗어나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하고 다시금 생각해 줄 수 있는 작품들이었죠.
그래서 저는 예술이라는 것은 ‘틈’을 만들어주는 것이구나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 생각을 이어 나가다 찾게 된 것이 현상학적인 접점이었어요.
내가 개념을 짓고 규정하는 것들을, 만약 제가 전부 벗겨내고 오직 감각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규정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저에게 남잖아요. 시간이라는 것도 사실은 우리가 선형적이라고 인식하고 있지만 우리는 영원히 ‘현재’를 살고 있죠. 아무리 내 안에서 떨쳐낼 수 없는 과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에 떠올리는 과거는 어떤 식으로든 저의 내면 안에서 변화가 생긴 과거이지 이미 지나간 현재였던 과거와 일치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즉, 제가 지금 떠올리는 것들은 결국 어떤 것을 변형시켜서 불러일으키는 것임에도 우리는 ‘시간은 선형적이다’라는 배움 하에서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자유롭지 않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작업을 할 때도 일상에서 틈이 느껴질 때 저는 그 순간들을 수집하고, 계속해서 틈의 재료가 될 수 있는 것들을 찾고, 다른 가능성을 제시할 방안에 대해서 많이 고민하고 작업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이야기하고자, 목소리 내고자 하는 것이에요.
단 하나의 아티스트를 위한 작업노트를 만듭니다, 스튜디오 에포케( )
- 작가님의 작품관이 너무나도 흥미로워요. 그런데 앞서 이야기를 듣다보니 처음부터 책을 제작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셨던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작가님께서 스튜디오 에포케( )라는 출판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 듣고싶습니다.
작업을 풀어낼 때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작업 노트예요. 그 안에는 글, 드로잉 등등 다양한 단서들이 모여있고 그것이 디벨롭 되어서 작업이 완성되는 거니까요.
제가 학교에 다닐 당시 그것을 친구들과 함께 공유하고 확인할 기회들이 있었는데 저는 그때마다 완성된 작업물보다는 그 작업 노트에 더욱 흥미가 가는 거예요. 작가가 했던 생각의 과정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 참 매력적이었죠.
그런데 그때 저는 하나 깨달은 것이 있어요. 모든 친구가 기성품을 활용해서 작업 노트를 만든다는 것이었어요.
저는 그것을 보며 항상 그 작품에 맞게, 그리고 그 작가에게 맞게 개개인의 개성을 살려서 만들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작업 노트의 형식도 내가 원하는 모양대로 만들어서 정말 ‘이 작가의 이 작품만을 위한 작업 노트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거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북 바인딩을 배웠어요. 처음에는 ‘내 작업 노트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쓰고 싶다’는 생각에 배우기 시작한 것이었는데, 막상 시작하고 보니 정말 재미있는 거예요.
게다가 저는 학사 과정을 두 번이나 밟았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에 비해 진로에 대해 방황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어요. 즉, 한정된 시간 안에 만든 작업물로 전시 지원 등 무언가를 시도해 보기가 어려운 상태였죠.
그렇다면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다가 책을 접목시키게 된 거에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개념 예술에 대한 관심이 커지게 되었고, 개념 예술의 매체로 책이 많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 순간 제 안에서 책에 대한 정의에 '틈'이 생기게 되었죠. 제가 집중했던 책의 측면은 물성을 가진 물질이었는데, 그저 물성을 가진 물질로만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책이라는 것은 오히려 개념의 집약체였던 거예요.
제가 책을 좋아하는 요소에는 공간적인 것, 물성적인 것이 많았는데 그 안에 내용적인 것까지 포함하여 개념예술과 책의 연결고리를 찾게 되니 저의 작품관과도 연결이 되었고, 제가 직접 작업을 해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작가'가 된다는 것에 대해서 고민을 잠깐 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찾아보니 독립출판 등 책을 낼 수 있는 방법이 참 다양하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사실 책을 쓰는 작가라는 존재는 딱히 정해진 존재가 아니구나, 모든 사람이 미술을 할 수 있듯 모든 사람이 책을 쓸 수 있구나’를 생각하게 되며 책을 자유로운 매체라고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어요.
그렇다면, 그만큼 자유롭기 때문에 다른 예술 매체와도 여러 방면에서 접점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고, 또 그때 당시의 제가 리소그래피에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손쉽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묶어 출판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작업을 할 때 무언가에 관해서 부담을 많이 느끼는 타입이었거든요. 하지만 제가 직접 책을 만든다면 무언가에 대한 부담감 없이 편하게 제가 원하는 대로 작업을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자연스럽게 디자인 툴을 배우고, 리소를 배우며 자연스럽게 출판사를 열게 되었습니다.
또, 제가 책을 선호했던 다른 이유는 ‘내 개인 작업과 함께 이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예술 매체로서 보았을 때 책이 설 수 있는 자리가 마땅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북페어에도 대중적인 독립 출판을 하는 분들이 주를 이루고 있고, 특별한 기획전이 열리지 않는 이상 우리가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형태의 책 외에는 볼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으니까요.
그럼에도 저는 책이 단순히 뭔가 정보를 담는 게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도 뭔가 하나의 예술이 될 수 있고 또 그 안에서 전시 외에 전시처럼 부담되지 않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작품을 충분히 전개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 스튜디오 에포케( )의 소개 글 중 마지막 문장은 ‘책이라는 형식 최대한의 가능성을 실험한다’였어요. 그 최대한의 가능성이란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출판이라는 것을 하려면 다양한 사람들의 협업이 필요해요. 편집자, 디자이너, 작가, 제작자가 나뉘어 있죠. 그래서 아무리 나의 작업을 책에 담아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온전히 ‘나의 작품’이라고 칭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판형이라는, 최대의 효율을 낼 수 있는 방법을 주로 택하여 대략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옵션들이 정리되어 있잖아요. 특히 공장에서 만든다면 제작할 수 있는 형태에 더욱더 제약이 걸리게 되죠.
하지만 수작업을 택한다면 그 형식의 제한이 없어져요. 오히려 최대한의 가능성을 살피면서 책을 제작할 수 있게 되죠. 예를 들어 바인딩 제본만 본다고 하더라도 풀을 안 쓰는 방법, 책 등을 2개 이상으로 만드는 방법, 아코디언 형식으로 만드는 방법 등 다양하게 시도할 수가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모든 면이 ‘내 작업’이 되는 거니까, 저는 최대한 형식적인 것에서 벗어나 아티스트가 담고자 하는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는 실험적인 책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 앞서 말씀해주신 '틈'에 대한 이야기와 '책'에 대한 맥락이 어느정도 같은 결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맞아요. 저는 제가 말했던 틈이 책이라는 매개체와 굉장히 밀접하다고 생각해요. 책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굉장히 익숙한 물체잖아요. 서점에만 가도 쉽게 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추구하는 바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판형의 책을 읽어서 무언가를 얻어간다’는 개념과는 멀어져서 오히려 감각적인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제가 추구하는 방향성과 책이라는 것 자체가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스튜디오 에포케의 도서를 소개합니다!
- 작가님께서 처음 제작하신 책에 대해 먼저 여쭤보고 싶어요. < SKIN-SHIP >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제작하게 되셨나요?
< SKIN-SHIP >은 조형적인 것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작업이었어요. 하지만 저는 조형적인 것을 제작하는 방법에 대해 알지 못하니, 그렇다면 드로잉으로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그려보자고 생각했죠. 그런데 그것을 보시고 교수님께서 ‘정말 재미있는 작업이다’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마침, 그 교수님의 강의 중 아티스트 북을 만들어보는 강의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 아티스트 북을 만들어보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 만들었던 책이에요. 다만 그 당시에는 재단기도 구비가 안 되어져 있어서 하나하나 전부 손으로 재단해서 제작했거든요. 그런데 그 과정이 정말 재미있었고 ‘이렇게도 책을 만들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해서 독립 출판의 매력을 알 수 있었던 계기였기도 해요.
- '더덕 어몽어스 프로젝트'에 대해서 먼저 여쭤볼게요. 2022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한국관에 위탁전시 도서로 선정된 책인 만큼 책을 만들게 된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듣고 싶은데.
여러 번의 수작업을 진행한 후, 독립 서점에 입고하고, 아트 페어에도 참가하니 어느 날 국립현대미술관의 해시태그 프로젝트팀에서 연락이 왔어요.
해시태그 프로젝트는 ‘서로 전혀 다른 글과 포스팅에서 공통 주제를 엮어낼 수 있는 혁신적인 방식으로써 서로 관계없는 무작위의 글들 속에서 무한대수의 맥락을 만들어 낼 수 있다’라는 문장을 바탕으로 회화, 조각, 뉴미디어, 영화, 디자인 건축 등의 전통적 시각예술 분야뿐 아니라 음악, 요리, 현대무용, 언어학, 생물학, 물리학, 시, 소설, 하이퍼텍스트 등 다양한 분야들의 아티스트님들께서 하나의 주제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프로젝트예요.
그 프로젝트에 선정된 더덕어몽어스 팀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책을 계획했어요. 출판과 관련된 지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 프로젝트가 의미하는 바와 방향성이 같은 도서 작업자를 찾다가 저를 찾으셨던 것이죠. 그래서 제가 리소그래피와 실크스크린, 그리고 저의 수작업만으로 200권을 전부 손으로 제작하게 되었어요.
디자인, 인쇄, 편집, 제책(바인딩)을 모두 혼자 수작업으로 했고, 사용된 실도 전시 주제와 맞도록 대마실로 만든 책이에요. 이 책은 2022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한국관에 위탁전시 도서로 선정되어 전시 되기도 했죠.
전시의 취지에 맞게 발터 벤야민의 < Constellation > 개념을 적용하여 책의 구조 안에서 섹션이 서로 교차하여 만나도록 디자인했어요. 필연적으로 두 개의 책등을 가진 아트북은 각자 다른 이야기가 구조 안에서 확장하도록 하고, 서로 교차하며 모여지게 도울 수 있도록 했죠. 친환경적 출판 방식을 고민하고 실험 하였으며 전체 리소그라프 인쇄하고 천연 염색된 대마실로 엮어 공장식 생산 방식과는 다른 수작업이 주는 엉성함, 오류와 오차의 미학에 주목하고자 했습니다.
- 가장 최근 출판되었던 < DAY & NIGHT >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싶어요. 판형의 도서라는 점에서 작가님께서 기존에 추구했던 방향과는 어떤 동일한 결을 갖고 있는지 궁금한데.
말씀해주신 것처럼 < DAY & NIGHT >는 사실 공장에서 나온 책이에요. 제가 앞서 더덕 어몽어스 프로젝트를 했을 때, 물론 정말 많은 것들을 배우고 성장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괴리를 함께 느끼게 된 것 같아요.
해외의 경우에는 아티스트님들의 책을 소량으로 제작해서 정말 고가의 예술 작품으로 취급이 되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하나의 책 그 자체만을 희소성을 가진 예술 작품으로 생각하는 인식이 없으니까요. 또한 제가 제작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제가 원하는, 작가와 진심으로 교류하며 책을 하나의 그 작품으로 제작할 방법에 대해서 다시금 고민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들었던 생각이 ‘내 작업을 많이 해보자’는 것이었어요. 책을 매개로 내가 시도해 볼 수 있는 것을 많이 시도해 보았고, 이제 내가 무언가를 만들고자 한다면 그에 대해서 무리 없이 만들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이번에는 툴에 대한 기술을 향상하는 데에서 조금 멀어져, 책을 매개체로 해서 어떤 작업을 하고, 그로 인해 제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어떤 방향으로 담아낼 수 있을지 생각을 해보자는 것이었죠.
그렇게 < DAY & NIGHT >을 구상하게 되었어요. 비록 공장에서 만드는 형태로 제작하기는 했지만, 책의 구조를 최대한 활용하여 제가 이야기하는 바를 기존의 형태에서 벗어나도록 제작한 거죠. 이 경험을 바탕으로 또 다른 작가님들과 작업을 할 수 있기는 바람이 담겨 제작된 책입니다. - 그렇다면 < DAY & NIGHT >
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는 책인가요? 앞서 제가 말씀드렸던, ‘개념과 나의 경험에서의 괴리’에 집중하며 제작한 책이에요. 그리고 이것을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떠오른 것이 바로 낮과 밤이었어요.
일반적으로 우리가 낮과 밤이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그 낮과 밤의 기준이 모호하다고 생각해요. 만질 수도, 수치화하여 볼 수도 없는 것임에도 우리는 어떠한 시간을 낮이라고 정하고, 어떠한 시간을 밤이라고 정한 거잖아요. 그 경계를 파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일몰’을 찾게 되었어요.
그런데 여기에서도 저는 재미있는 점이 있었어요. 대한민국에서 기준으로 하는 일몰 시각과 타국에서 정해 놓은 일몰 시각의 기준이 다른 거예요. 전 세계인들이 같은 것을 경험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다르게 규정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낮과 밤을 나누었던 것이죠. 그 경계 없고 모호한, 손에 잡히지 않는 개념에 대해 담아내고 싶다는 생각에 현상학적으로 이 개념을 파고들게 되었어요.
그래서 저는 대한민국의 일몰 시각을 기점으로 1분 전, 그리고 그로부터 1분이 지난 후를 찍어서 기록했어요. 그런데 그 1분의 시간에 담긴 저의 심상적인 이야기, 그리고 제가 그 장소에서 갖고 있었던 추억, 그런 것들이 사진에 포착된 거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낮과 밤의 경계를 찍었음에도 그 사진은 낮, 밤이라는 카테고리에서 벗어나 오히려 저의 개별성이 가장 많이 도드라지는 거예요. 사진은 오로지 관념적 경계인 일몰시각을 기준으로 수집되었는데, 오히려 경험하는 '주체'의 일상적 흔적, 계절, 날씨 변화의 포착 등으로 인해 다양한 심상과 감정을 일으켰던 거죠.
그래서 그 1분 전과 1분 후를 책의 책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1분 전과 1분 후를 대칭이 되게 배치했어요. 거의 차이가 없는 낮과 밤의 모습은 경계를 부각하기보다 오히려 그 무엇으로 규정하기 전의 오롯한 순간의 나열되도록 했습니다. 현상적으로 보여지는 낮과 밤의 미미한 차이에서, 또 그보다 두드러지는 제 개별성이 오히려 이분법적 개념과 낮과 밤의 경계선을 흐리게 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었어요.
비록 이 1분의 간격은 ‘낮과 밤의 경계’의 차이도 있고, 책에서도 다른 페이지에 있어서 구분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저라는 사람을 나타내고 제 안에 있는 것들의 경계를 흐릴 수 있는 작업이 되도록 했습니다. 낮과 밤을 둘러싼 믿음을 돌아보며 우리가 실제로 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관념에 따라 상상한 것을 믿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던지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의 주 목적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책 사이사이, 우리가 일반적이고 개념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실들을 조사해서 그 조사 내용을 적어놓고 그것의 일부를 계속 흐려서 ‘그것은 언제든 지워질 수 있다’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 지금까지 다양한 책을 만드시면서 작가님께서 느끼신 점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그전까지 제가 책을 만들며 재미를 느꼈던 느낀 것은 사적인 공간으로서의 책이었어요. 그런데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제가 아닌 타인과 협업하여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사적인 것이 공적인 것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느끼게 되었어요. 저는 이 부분에서 현실의 벽을 함께 느끼게 된 것 같아요. 제가 지향하고자 하는 바와 일치하는 작가님들과 함께 연락이 닿아 책 작업을 많이 할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은데, 아직은 그에 대해서 조금 한계점을 느끼고 있거든요. 특히 독립 출판의 경우, 자율성이 주어지는 만큼 그 자율성에는 현실적인 부분에도 포함이 되거든요. 그 부분에 대한 돌파구를 찾아서 흥미롭고 재미있는 작업을 계속 이어 나가고 싶다는 생각과 열망이 더욱 강해지기도 했습니다.
서재영 아티스트의 또다른 목소리, 회화와 3D
- 최근 회화 작업도 시작하셨어요. 리소, 출판, 사진까지 넘어서서 더욱 작가님의 활동 범위가 광범위해졌는데, 회화와 3D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다면.
제가 경험을 위주로 이야기하고 싶다 보니 자연스럽게 풍경에도 관심을 두게 되었어요. 우리가 영화, 사진 등에서 풍경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개념적인 형상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 풍경에 저는 개별 주체의 이야기가 빠져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엇보다도 풍경 사진에는 풍경을 찍은 ‘나’의 모습이 빠져있기 마련이잖아요. 진짜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담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풍경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내가 경험하며 알 수 있는 것들은 세상 안에 담겨있는데, 풍경은 그곳으로부터 한 발짝 나와서 하나의 고정적인 틀에 맞춰 사진을 찍는 것이잖아요.
그런 풍경이 특정한 방식으로 '맥락화'되어 있다고 느꼈고, 어떻게 그 맥락을 흐트려볼지, 새롭게 구성할지에 고민해보기로 했어요. 그래서 3D를 홀로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다른 체계의 세상 안에 있는 것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정의를 내릴 수 있을지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말이에요.
그런데 그때 굉장히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바로 3D로 새롭게 구성되는 세상은 모두 이미 현실 세계에서 있는 것들의 안에서 선택이 된다는 것이에요. 어떤 모양을 만든 뒤 텍스처를 입힌다고 해도 이미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돌, 나무 등의 텍스처를 입히는 것이었죠.
저에게는 이 사실이 굉장히 아이러니하게 느껴졌어요. 3D 공간은 마음껏 무언가를 구현할 수 있는 무한의 공간인데, 또다시 카메라 앵글을 기준으로 장면을 만들어 내는 '맥락화'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잖아요. 그리고 '장면’(풍경) 그 자체에 주목하기보다 ‘장면화’가 이룬 공간에 주목하게 되는거죠.
‘그렇다면 카메라 앵글을 신경 쓰지 않고, 전혀 다른 각도에서 우리가 평소 볼 수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장면화', 그러니까 '맥락화'하는 과정을 차용하여 3D공간을 만들었어요. 그 공간이 바로 가상공간 < A Landscape Space >입니다.
< A Landscape Space >는 이미 존재하는 공간의 재현이 아닌, 풍경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에요. 이곳을 다시 장면으로 포착해 그림으로 치환하는 작업을 통해 그것을 감각 또는 경험하는 실제 물질로 제시해요. 실제와 가상 사이의 상호적인 작업을 통해 실재를 경험하는 것과 기억하는 것에 대해 질문하고 장면으로 밖에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가상공간 안의 주체에 대해 물음하고자 했습니다.
이와 같이 만들어진 한 앵글의 '장면'보다도 그렇게 필연적으로 구성된 어떤 풍경에 집중하여 그 안에서 벌어지는 풍경적 오류를 발견해 나갔고, 개념이라는 것, 감각이라는 것을 떨어트려 놓고 오류를 포착해 내는 것을 위한 작업을 진행하며 회화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 작가님의 회화 작품에서도 저는 아래의 작품 < scene no.5 > 이 굉장히 인상깊었어요. 정말 의문이 많이 드는 작품이었거든요. '이것은 도대체 우리가 어디서 보는 것인가', '도대체 무엇을 그린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작가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작품과 조금 가까워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요.
하하, 이것도 사실 제가 만든 3D 세상의 한 장면이에요. 3D 세상을 볼 때 두 개의 카메라를 설치했기 때문에 그 안에 두 개의 태양을 만들었거든요. 사실 실제 세상에는 태양이 두 개가 있을 수 없잖아요. 그런데 3D 세상을 구현하다 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실제 세상에서 보는 맥락화된 풍경 문법에서 벗어난 장면들을 많이 보게 되어요. 어떨 때는 태양이 땅에 박혀있기도 하죠. 그래서 저는 그렇게 일상에서는 포착할 수 없는, 오류의 장면들을 포착하여 그 장면을 회화 작업을 통해 감각, 또는 경험하는 실제 물질로 제시하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이 작품도 그중 하나입니다. 익숙한 풍경인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다 일그러뜨려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그리는 이 행위 자체가 일종의 탈맥락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 그렇다면 아래의 작품도 3D로부터 영감을 얻으신 것일까요? 아래의 작품은 풍경과는 조금 거리가 멀지 않나 싶디고 한데.
맞아요. 제가 3D로 영상을 만들면서 그 영상을 빠르게, 그리고 느리게 다양한 속도로 재생을 하니까 포착되는 장면들이 정말 재미있는 거예요. 느리게 재생을 했을 때는 슬로우모션처럼 되어서 환영같은 것이 찍히기도 했죠.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 저는 어떠한 것을 '공간'이라고 인식하기 위해서는 시간적인 요소가 굉장히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저는 이 작품 안에서 '시간을 갖고 놀며 무언가를 포착하는 과정을 담아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작품은 왁스로 제작한 것인데, 왁스를 바른 뒤 그것을 녹이면 형태가 다 뭉개지면서 투명해지거든요. 그런데 그 위에 제가 다시 이미지를 붙잡으려고 하며 그림을 그리고, 또다시 일부러 뭉개뜨리고를 반복하며 붙잡으려는 노력과 함께 어떤 환영적인 이미지가 생성되죠. 앞서 말씀드렸던 환영적인 이미지가 점점 생겨요. 회화의 대상은 다른 차원에서의 시간에 의해 생성된 환영물 이지만, 회화의 과정에는 그 이미지를 붙잡으려는 제 현실의 시간이 담겨 있게 되었어요.
마무리 지으며
- 작가님의 작품관을 들을 수 있어 진심으로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 작가님의 목표가 있으시다면.
제 목표는 거창한 것보다는, 작업을 지속하는 것이에요. 창작이라는 것이 ‘일’이라고 인식되면 재미없어지는 것 같기도 해서요. 그래서 저는 내가 이 창작 작업으로 삶을 살려고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삶이 작업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하죠. 그래서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계속해서 창작활동을 지속하는 것이 지금의 저의 목표입니다. 또, 이 에포케( )를 통해 다양한 작가님들도 만나 더욱 더 좋은 책도 많이 만들고 싶습니다.
-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를 봐주시는 분들께서, 그저 예술이라는 매체가 그냥 여러 가지 시도이구나, 자유로운 시도를 할 수 있구나 생각하고 자유롭게 저의 작품을 느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푸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