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존재를 마주하는 감각의 욕조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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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관성적으로 연극을 보던 사람이었다. 막연한 재미와 흥미로 시작하게 된 관극이라는 취미는 어느덧 습관이 되어버려, 내가 왜 연극을 보는 지도 모르는 채로 연극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보게 된 한 작품을 통해 내가 무엇을 위해 연극을 보는지 깨달았던 적이 있다.
이 연극은 ‘존재’에 관한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감정’에 관한 것이고, ‘기억’에 관한 것이며, 한 인간이 스스로의 존재를 온전히 찾아가는 일련의 과정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우리의 ‘감각’에서 시작됨을 말하고 있다.
오랜만에 점심시간에 시간을 내서 커피숍에 갔어요.
2층 테라스에 앉아 은행나무를 바라보다가,
담배를 피우다가,
그러곤 커피잔을 만졌는데, 뜨거웠어요.
그때 문득,
“나, 지금 여기,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가지고 있는 감각들이 모두 생생하게 살아 있는 순간은 얼마나 되는가. 우리의 어떤 감각이 예민하게 살아 있을 때 다른 어떤 감각은 죽어 있다. 그렇게 우린 감각으로부터 느낄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외면하고, 회피하며, 그냥 지나친다. 그렇게 간헐적인 죽음을 맞이하며 둔해져 간 감각들이 어느 한 순간 자극에 의해 깨어날 때, 점차 선명해지는 감각이 잠재되어 있던 기억과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감각을 통해 새어나온 기억과 감정은 ‘나’라는 존재를 확인시킨다.
이 연극은 사랑과 이별, 고통과 극복, 희망과 절망 사이 어딘가에서 각자의 기억과 감정을 마주하는 다섯 남녀와, 그들의 관찰자이자 분신 역할을 하는 여자 한 명이 각각 자신의 존재를 확인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들은 혼자서 혹은 둘씩 짝을 지어 무대에 등장하고, 주로 독백이나 대화를 통해 관객에게 상황을 전달한다. 이들이 활보하는 무대 한 가운데에는 물이 가득 담긴 투명한 ‘욕조’가 놓여 있다. 인물들은 이 욕조 위에 걸터앉거나 주위를 배회하고, 그들 각자가 가진 조각난 기억과 감정을 비로소 마주하는 순간에 그 욕조 속에 잠긴다.
극 중 ‘남자3’은 꿈을 위해 홀로서기를 했지만 여전히 방황하고 있다. 그는 무대의 가장자리를 계속해서 돌고, 몸부림치고, 소리없는 아우성을 내지른다. 주변인에게 응원과 지지를 받았던 기억들은 오히려 그를 무력하게 만들며, 그의 감정이 절정에 다다른 순간 그는 욕조 속에 천천히 얼굴을 들이민다. 그리고 숨이 끝까지 차오를 때쯤 고개를 치켜든다. 그런가하면 연인 사이인 ‘남자1’과 ‘여자1’은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대화를 계속해서 나누지만, 서로 겉돌기만 한다. 그들 사이에는 자꾸만 균열이 일어나지만, 서로를 지독히도 사랑하고 있음을 관객이 모를 순 없다.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화해에 이르게 되는지 자세히 묘사되지는 않지만, 결국 그들은 손을 맞잡고 욕조에 들어가서 서로에게 안긴 채로 욕조에 잠겨 하나가 된다.
한편 악에 받친 듯한 표정으로 등장하자마자 긴 독백을 내뱉고는 이내 욕조 속에 잠수해버리는 ‘여자2’와, 우울증을 앓던 어머니를 최근에 잃은 행복전도사 ‘남자2’가 있다. 눈물을 흘리며 거리를 배회하던 ‘여자2’는 가방을 떨어뜨리고, 그것을 주운 ‘남자2’는 그녀에게 가방을 돌려주려 그녀를 쫓아간다. 그때 ‘여자2’는 갑자기 ‘남자2’의 품에 안겨 엉엉 울어버리고, ‘남자2’는 당황하며 그녀를 안아주었지만, 그 역시 울었다. 결핍의 기억을 안고 있는 두 사람은 서로를 위로하는 친구가 되고, ‘남자2’는 ‘여자2’의 또 한 번의 잠수에 기꺼이 동반한다. 공연의 말미에는 모든 등장인물들이 무대에 나와, 서로의 뒤통수를 때리며 하나의 독백을 나누어 말한다. 그리고 ‘사랑해’라는 말을 주고 받는다.
인물들이 욕조 속에 빠지는 행위는 다름 아닌 관객의 감각을 깨우는 장치다. ‘뜨거운 커피잔을 만지곤 갑작스레 자신이 지금 이곳에 존재함을 깨달았다’는 ‘남자1’의 대사를 제외하고는, 감각이 기억과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대사나 행위는 생략되어 있다. 인물들은 이미 각자의 기억과 감정에 빠져 있을 뿐, 그것을 찾기 위한 감각의 작동 과정은 드러나지 않는다. 권태로운 일상 속에 차오르는 공허감에, 사랑했던 이로부터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한 모멸감에, 정신질환을 앓는 가족들 사이에서 행복의 정의를 고민하던 유년 시절의 기억 속에, 그들은 이미 놓여있다. 그 감정과 기억을 연결하는 감각을 대신 느끼는 것이 바로 관객의 몫이다. 이미 극 중 인물들은 빠져버린 기억과 감정의 출발점을 대신해서 느껴야 한다. 따라서 무대 위의 배우가 수행하는 말과 몸짓은 계속해서 관객의 감각을 일깨운다. 다시 말해 배우와 관객 간에 감각의 전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욕조 속 물의 차가움이, 서로의 뒤통수를 내리치는 손바닥의 아찔함이, 고통스러운 독백을 쏟아내며 몸부림치는 남녀의 육체성이 관객에게는 고스란히 전해진다. 계단 한 칸의 높이도 되지 않을 낮은 무대와 객석 사이에서. 배우들의 발걸음 소리가 바닥을 타고 관객의 다리에 그대로 닿을 만큼 작고 협소한 공간에서 말이다.
이 연극은 내내 관객에게 감각을 깨워내라고 말한다. 가진 모든 감각을 가장 예민하게 세우고 극중 인물의 기억과 감정을 함께 느끼도록 유도한다. 그렇게 감각적으로 연극을 볼 때, 우리가 갖게 되는 태도는 ‘사유’보다는 ‘관조’에 가깝다. 텍스트의 의미 하나 하나를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있을법한 세계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 그때 관객은 연극에 오히려 더 깊이 몰입할 수 있고, 무대 위의 존재는 관객에게 온전히 인식된다. 그러나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배우의 입가에 경련이 이는 것을, 그의 손이 떨리는 것을 나의 감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다. 하지만 감각적 관조가 아닌 사유만으로는, 연극이 보여주는 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순 없다. 연극 무대 위에 파편화된 언어로 이루어지는 세상은 곧 우리의 현실 세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현실은 결코 완벽한 대사와 몸짓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둔한 감각을 깨우고 선명한 감각으로 기억과 감정을 직면하는 것이 결국 우리 스스로의 존재를 가장 똑바로 마주할 수 있는 방법임을, 나는 그 욕조 앞에서 깨달았다. 흩어져 있는 기억과 여물지 못한 감정이 섣불리 우리를 어지럽힐 때, 가장 솔직한 감각에 집중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견뎌낼 수 있다.
[장연우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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