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떠나기 위해서 머물러있는 것 [사람]

필름 카메라가 나에게 알려준 안녕
글 입력 2024.06.13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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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는다, 어쩌면 너무 많이.


예쁜 음식이 나오거나 분위기 좋은 가게를 가거나 내 모습을 남기고 싶을 때, “지금 좀 괜찮다” 싶으면 바로 휴대폰의 카메라를 켠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각도와 색감이 나올 때까지 찍는다. 미묘하게 다른 각도의 수많은 사진 중에 극소수가 남는다. 그것도 아니면 지우기 귀찮아서 그냥 남는다. 스토리지를 그득히 차지한 상태로.


00월 00일 어디에 가서 뭘 했는지가 jpg 파일의 형태로 확실하게 기록된다. 사진을 어떤 마음으로 찍었었는지, 이 기록이 내 기억에 남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래도 일단 기록은 한다.


무의식적인 기록이 많아질수록 의식적 기억들은 줄었다. 그럴수록 많은 것들이 덤덤하게 느껴졌다.


갑작스럽게 결정된 여름 이사에 대한 소식도 그저 그렇게, 덤덤하게 느껴졌다. 15년을 넘게 살았던 동네를 가족 사정으로 떠나게 되었다. 대학 진학 이후 본가와 멀어졌고 무의식적인 시간들 속에서 소식을 들으니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감흥 없을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딱히 뭔가 느껴지지도 않았다. 


소식을 듣고 난 뒤 시간이 흘러 우연한 기회로 필름 카메라 동아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주어진 미션은 3개월 안에 필름 한 롤을 다 찍는 것. 몇 번 찍다 보면 금방 채워질 줄 알았는데, 찍은 사진이 어떻게 나오는지 알 수도 없고 얼마나 남았는지 카운트를 놓치다 보니 조금 막막하게 느껴졌다. 막상 동아리원들과 함께 출사를 나갔을 때는 은근히 소심해져 남은 필름을 한 번에 다 써버릴까 봐 깨작깨작 찍었더니 오히려 숙제마냥 많은 롤이 남아버렸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최대한 필름 카메라를 들고 다니려고 했다.


그러다가 본가 주변에 볼 일이 생겨 내려가게 되었다. 서울로 돌아가려던 참에 뒤의 일정이 취소되어 시간이 붕 뜨게 되었고 내 손에는 필름 카메라가 들려있었다. 조금 흐린 날씨였지만 딱 걷기 좋은 공기였다. 탄천을 따라 오랜만에 걸었다.


산책을 하던 중 이런 일상적 여유가 앞으로는 따로 시간을 내서 오지 않는 이상 가지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니 문득, 너무 아쉬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평소 같으면 찍지 않았을 길거리의 모습을 찍게 되었다. 매일 건너던 다리의 공사 현장, 우거진 나뭇잎들에 더운 적이 없었던 버스 정류장, 산책하는 아기들의 작은 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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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사라질 모습들을 남기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니 사진을 찍는 순간이 느리고 확실하게 기억에 남게 되었다. 시선이 자주 머무르던 곳에 오래 멈춰 섰다. 자주 머물렀던 시선만큼 장소들에 많은 추억이 묻어 나를 매어두었다. 어느새 필름 와인더가 더는 움직이지 않았고 평소보다 두 배 정도 시간이 걸렸던 산책을 마쳤다.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고 머릿속에서는 산책했던 길의 모습이 일상과 섞여 뭉그러져 갔다. 어느새 숙제로 받은 3개월 만의 인증일이 다가왔고 필름을 현상소에 후다닥 넘겼다. 잊어갈 즘에 현상된 사진들을 찾게 되었다. 필름을 처음 써봐 제대로 찍히고 있는지도 감이 안 왔었는데 장난감같이 생긴 카메라로 이런 이미지를 찍을 수 있다니… 하며 새삼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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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 입자가 자글자글한 사진은 뿌연 기억에서 산책길을 다시 끄집어내 주었다 - 난 그날 탄천을 이런 시선으로 바라봤구나. 기억의 한가운데인 당시에는 몰랐으나 머릿속에서 한 번 더 잊히고, 다른 기억들로 덮이고, 사진이 현상될 때까지 지나고 나니 알게 된 시선이었다.


사진을 보고 있으니 오히려 곧 이사를 간다는 것이 피부로 다가왔다. 또 그런 생각 뒤에는 “이제는 이사를 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익숙지 않은 곳에서 나와 가족들은 분갈이 된 공간에 우리를 채워넣을 것이다. 그러면 다시 탄천의 기억은 뭉그러질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들이 무사히 지나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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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기 위해 난 충분히 머물렀던 것 같다. 탄천의 기억을 뾰족이 느낄 수 있는 사진이 남을 정도로 충분히 기록했다. 사라질 것들을 느리게 기억을 하는 것은 새로운 감상을 주었다. 결국 언젠가 모든 것은 사라지게 된다. 이를 알고 있기 때문에 현실에 잠시 멈춰 기억할 시간을 남겨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기록은 원래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고, 필름은 나에게 어떤 안녕에는 느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김수진 에디터 태그.jpg

 

 

[김수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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