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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대학로와 페스티벌에서 첫 선을 보였던 미스터리 추리 연극 <실종법칙>이 새로운 출연진과 함께 이번에는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으로 돌아왔다. 미스터리와 추리, 구미가 당기는 키워드가 두개나 들어간 연극이라니, 이번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이유가 내게는 꽤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에게 공연계로의 첫 입문의 길을 열어준 작품도 대학로에서 오픈런으로 오래 자리를 지켜온 관객 참여형 추리 연극 ‘쉬어매드니스’였다.


꽤 오랜 학창 시절부터 나는 세계 100대 미스터리에 관한 영상과 자료를 찾아보길 즐겼고 히가시노게이고와 같은 추리 소설 대가들의 작품을 탐독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새삼 이번 관극 기회를 통해 왜 그토록 추리가 나에게 신선한 재미를 가져다주는 것인지에 관해 생각해 보았는데, 아마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얽히고 설킨 인물들 내면의 깊은 심연이 나에게 끊어낼 수 없는 어떠한 자극을 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실종법칙>은 우리가 매우 친숙하여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관계들 사이의 미세한 균열에 주목한다. 아주 가까운 사이지만 정작 상대방의 진심과 고민의 맨 얼굴을 외면한 채 못 본 척 덮어두고 살아가던 이들이 ‘한 사람의 행방불명’이라는 긴박한 상황에서 자신의 밑바닥까지 내보이는 설전을 지켜보는 것은 꺼림칙하면서도 어쩐지 몰래 귀 기울이고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실종된 유진과 가장 가까운 사이임을 자처하는 그녀의 언니 유영, 그리고 그녀보다 오랜 관계는 아니지만 어쩌면 일상의 대부분을 함께 했을 남자친구 민우의 아슬아슬한 말다툼이 70분가량 이어진다. 시종일관 공격적인 말투와 사건의 이모저모를 따지는 유영의 모습, 그런 유영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바빠 보이는 민우의 모습에서 언뜻 이 설전의 우위가 유영에게 있고, 두 사람은 대척점에 서있는 것만 같아 보인다.


그러던 유영이 조금씩 자신의 내면을 보이기 시작하는 지점으로부터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고, 민우와 유영간의 다툼에 ‘유진’이라는 인물의 존재감이 침투하며 관계의 실타래는 3갈래로 이어진다.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았던 민우가 유진으로부터 알아낸 그녀의 비밀을 은근슬쩍 무기로 삼기 시작하면서부터 유영은 ‘실종된 동생의 안위를 알기 위해 무엇이든 할’언니의 모습을 벗고 숨겨둔 깊은 내면의 맨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고속 승진을 앞둔 유능한 대기업 인재, 남부러울 것 없는 유진의 사소한 언행이 가시가 되어 쌓아온 자신의 상처, 그로부터 파생된 유진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이 불러온 아니꼬운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유영 안에서 불어났고, 사실 꽤 자주 유진과 유영의 대화는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어쩌면 반지하에 궁상 맞게 살며 소설가라는 원대한 꿈을 향해 나아가고자 애쓰는 민우의 모습에서 유영은 자신 안에 숨겨둔 외면하고 싶던 불쾌한 골짜기를 마주했을 것이고, 자신과 민우의 비슷한 그 지점을 도리어 민우의 ‘문제점’으로 치부하며 민우를 공격했지만, 자신에게만 있는, 유진이 동경하는 예술적 감각과 유진의 대인관계 문제를 거론할 때 도리어 유영은 민우에게 공감을 바라며 때로는 친근한 모습까지 보인다.


자신의 몫을 다 취하고 나서도 욕망을 억누르는 법을 몰라 결국 스스로 최후를 향해 내달렸다는, 치킨 뼈를 먹고 죽은 반려견 ‘초롱이’의 낑낑 거리는 괴로운 신음이 이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진실을 마주하게 된 유영의 모습 위로 겹친다. 억지로 눌러 두었던 고통과 갈등의 씨앗, 어둡고 불쾌한 감정은 결국 그 실체를 드러내었고, 가장 가까웠던 사이에서 파국으로 치닫게 된 이 관계에서 누군가는 최후를 맞음으로써 희생을 치뤄야 했을 것이다.


가장 가까웠고 서로 닮았기에 알 수 있었던 서로를 해하기에 최적화된 약점은 결국 가장 날카로운 무기가 되어 유영에게 돌아왔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인물들 간 엉켜버린 관계의 실타래 위로 온 몸을 뒤튼 채 최후를 맞이한 유영과, 그런 그녀의 옆에서 보란듯이 끊어지지 못한 채 다시금 얽히며 이어질 뒤틀린 관계를 암시하는 민우와 유진의 통화를 끝으로 공연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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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인물과 소품, 배경으로 70분 간의 몰입을 이끌어 냈다는 점이 이번 공연에서 주목할 만한 점이 아닐까 싶다. 5-6평 남짓 되는 민우의 자취방을 유일한 배경으로 두 인물의 대사가 맞물리는 것이 공연 구성의 전부이지만, 직관적인 자극과 도파민을 유발하는 그 어떤 콘텐츠를 볼 때 보다 어쩐지 눈을 떼기 힘들었다.


가깝고 닮았지만 그만큼 서로를 가장 아프게 공격할 수 있는 세 인물의 관계가 숨긴 거짓과 진실이 드러날 때 나 또한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일종의 공포감이 되어 섬찟한 감정으로 내 안에 자리 잡아 막이 내린 이후에도 홀가분하게 극장을 떠나기 어려웠다. 그리고 한편으론 이 감정이 어쩌면 나에게 내면을 돌아보고 가깝고 위태로운 관계의 실타래를 푸는 첫 술을 끼우는 계기가 되어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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