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람이 어떻게 변하니 [사람]

글 입력 2024.04.18 08:34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다시는 안 그럴게"

 

이 말은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달은 잘 지키겠지만 결국 언젠가는 또 그럴 것이란 미래를 자신도 모르게 담고 있는 말임에 분명하다.


약속 시간에 자주 늦는 사람에게 화가 난 다른 사람들이, 지각생으로부터 다신 늦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았지만 그는 또다시 지각을 했다. 한 번 바람피운 것이 들켜 다시는 바람을 피우지 않겠다던 사람은 나중에 가서 또 바람을 피웠다. 자신의 이런이런 말투는 상대방의 기분을 나쁘게 만드니 쓰지 않겠다던 사람은 흥분만 하면 그 말투를 가장 먼저 내뱉곤 한다. 연예인들도 한 번 문제 되었다가 대중들의 기억에 잊혀질 때쯤 동일한 일로 다시 한번 떠오를 때도 많지 않은가. (대부분 음주, 도박, 마약과 같이 '중독'에 의한 경우가 많긴 하지만 말이다.) 하물며 내 근육들도 더 늘어날 생각이 없고, 체지방도 내 몸에서 나갈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이건 좀 많이 화나는데


이렇듯 사람은 생각보다 잘 바뀌지 않는 생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의 진화에는 오랜 세월이 걸치지 않았던가. 인간이 지금의 형태인 것은, 분명히 삶에 있어 가장 효과적이고 필요한 모습으로 진화된 것이다. 그러니 변하겠다던 사람이 변하지 않는 건 진화를 해야 할 정도의 오랜 시간이 필요해서일까 아니면 그들에게 있어 말만 그럴 뿐 사실은 바뀔 필요가 없다 생각해서일까. 차라리 전자라면 이해라도 될 텐데 대부분은 후자라서 참 골치가 아프다.

 

*

 

그런데 간혹 사람이 바뀔 때도 있긴 했다. 나의 경우에는 생명의 위협을 받고 구사일생했을 때다.


어렸을 때 한 깐족거림 하던 나는 구름사다리를 아래가 아닌 위로 올라가 장난치고 놀고, 철봉에서 거꾸로 매달리는 등 꽤나 부모님의 심장을 안 좋게 만들던 아이였다. 그때 한창 나루토, 이누야샤 같은 소년 만화를 보고 자라는 시기였던지라 담장을 한 손으로 짚고 훌쩍 뛰어넘는 모습이 그렇게 멋져 보였던 것이다. (전문 용어로는 파쿠르라고 하더라) 그래서 아파트 현관 앞에, 계단 옆 노약자·장애인용 언덕길의 난간을 그 자세로 뛰어넘다 얼굴부터 고꾸라져 안경이 부서져 얼굴이 피범벅이 되었다. 눈썹 끝을 3~4 바늘 꿰맨 인생 최초의 수술 이후 그 짓을 다신 안 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 이마저도 내가 트라우마가 생겨서 그런 거지, 어떤 인생의 진리나 인간관계에 있어 큰 깨달음을 얻어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변화된 것이라고 보기는 좀 어렵지 않나 싶다. 그래도 부모님이 보시기에는 애가 얌전해져서 더 나은 녀석이 되었다고 생각하시긴 했을 듯.

 

*


또 하나 사람이 변하는 원인에는, 연애를 시작하게 되면서라고도 한다. 자신을 더 좋은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 흔히 매체나 다양한 글감에서 연애의 장점으로 꼽는 바이다. 하지만 염세주의적이던 난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고 여겼기에 연애를 하는 사람은 그저 끼리끼리 사귀는 것이라고 단정 지었다. 그래서였을까, 나중에 가서 쓰레기 같은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이 들면 나 역시 똑같은 쓰레기였던 것인가 하고 혼자서 새삼스럽게 충격받곤 했다.


그런데 좋은 사람을 만나 연애를 하고 있으니, 희한하게도 정말 조금씩 변했다.


돈까스가 먹고 싶었는데 상대방이 마라탕을 너무 먹고 싶어 하면 오늘은 마라탕을 먹는다든지, 이번 달 둘째 주 금요일에 쉬고 싶었지만 상대방 휴일에 맞춰 수요일에 같이 쉰다든지 등. 연애를 하게 되면 내 것을 조금 포기해야 될 때도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상대방에게 맞춰주는 것은 대인 관계와 사회생활에 필요한 배려의 영역이지, 내가 변화하는 것이라곤 잘 생각되지 않았다. '배려심'이라는 스킬을 장착한 또 다른 나, 페르소나 개념으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 배려를 한다는 것 자체가 변하는 과정의 하나였다.

 

*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다소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기왕이면 내가 하고 싶은 걸 해줬으면 싶었다. 앞서 설명한 마라탕 먹자는 사람이 나다. 그런데 이제는 상대방과 맞춰가는 것이 오히려 즐겁다. 내가 이런 걸 양보해 주면, 상대방도 양보해서 나의 편의를 봐준다. 사람 만나고 사귀는 건 그렇게 하는 것이더라.


자존감은 없는 주제 자존심만 쌔서 사과 한 번 제대로 못 하던 사람이, 이제는 뭔가 잘못한 게 있으면 여전히 쫀심은 상하지만 먼저 미안하다고 말을 하게 되었다. 모든 상황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던 사람이, 상대방의 아낌없는 칭찬에 자기 자신을 조금은 자랑스럽게 바라보게 되었다.


연애를 시작했다고 해서 바로 180도로 바뀌는 건 아니고, 상대방의 언행과 지속적인 감정 교류 속에서 내가 처한 상황이 상호보완이나 극대화되어 변화가 조금씩 나타났다.


*


"지금 연애 안 하는 사람 무죄! 당장 나가서 연애해!" 라는 의미로 쓰는 글이 아니다. 내가 뭐라고 이런 말을 할까. 너.. 뭐 돼?


연인이 아니더라도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난다면 충분히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연애로 설정한 것은 아무래도 친구나 지인보다 오래 함께하는 시간이 많고, 나누는 이야기와 감정들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부족한 나란 사람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나 같은 사람도 변할 수 있다는 걸 쓰고 싶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일부는 바뀔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 일부가 점차 많아져 그 사람 자체가 바뀌게 되는 게 아닐까. 내가 지금 그러하고 있으니 말이다.

 

 

[배지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30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