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영화가 불가해한 악에 대한 공포를 다루는 방식 [영화]

<파묘> (장재현, 2024)
글 입력 2024.03.06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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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묘>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대에 못 미치는 관람객 회복세에 한국 영화 산업의 장기 침체에 대한 우려가 계속되고 있는 지금, 희망의 마중물로 보이는 한국 영화가 또 나왔다. 작년, 프랜차이즈물인 <범죄도시3>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팬데믹 이후 첫 천만 관객을 기록한 한국 영화 <서울의 봄>보다도 빠른 관객 수 누적 속도를 보여주고 있는, <파묘> 이야기다.

 

이미 관람평이 쏟아지고 있었던 개봉 7일 차에 미리 반응을 좀 살펴본 뒤 영화를 보러 다녀왔다. (호러물을 잘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눈 뜨고 볼 수 있는 수준이 맞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두 가지 다른 방향의 관람평이 대세를 두고 팽팽하게 경쟁하는 중이라는 게 흥미로웠다.

 

1. 극의 흐름이 전환되는 중반부 이후부터 오컬트 영화로서의 매력을 유지하는 데 실패했다.

2. 매력적인 인물들이 가장 한국적인 오컬트를 잘 풀어나가는 영화다.

 

보고 난 개인적인 감상은, 머리는 전자에 끄덕이는데, 가슴은 후자에 두근거린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파묘>는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로서 쾌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치밀하게 연출된 영화는 아니다. 장재현 감독의 인터뷰를 읽어보면, 이는 연출의 실패가 아니라 필모그래피에 새로움을 더하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미스터리 그 자체가 중심에 있는 것이라 아니라,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인물들, 특히 그들의 무속인으로서의 소명 의식과 땅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으로서의 마음이 교차하는 지점을 드러내는 캐릭터 무비로 봤을 때 <파묘>는 훨씬 매력적이고, 또한 충분히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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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털어놓는다. 이 글은 <파묘>의 매력적인 캐릭터에 대해 디깅하거나, 오컬트로서 의미화하거나, 무속신앙 요소에 대한 그럴듯한 해석을 제공하기 위한 글은 아니다. 그럴 능력도 없거니와, 이미 그런 내용을 담은 훌륭한 다른 글이 많다. <파묘>에서 내 이목을 끌었던 것은, ‘그냥 다 죽여버리는’ 일본 귀신의 의미화이다.

 

일본 귀신은 한국 귀신과 달리 원한 관계와 무관하게 인지한 모든 사람을 살해하며, 그림자 있는 실체를 가진 정령이기에, 한국적인 영을 다루는 일에 익숙한 무속 전문가 주인공들에게도 해결책을 알 수 없는 미지의 악(惡)으로 제시된다. 일본 귀신, 즉 오니의 이러한 특징은 관객이 공유하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환기하는 이미지 쇼트들과 겹치며 ‘험한 것’의 불가해한 악함에 대해 인물들이 느끼는 공포를 효과적으로 설명한다.

 

이를 애국·항일 코드로 받아들여 캐릭터를 열사와도 같은 존재로 더 매력적으로 바라보는 반응과, 성긴 플롯을 간편하게 땜질하는 불성실함으로 비난하는 반응이 갈리지만, 그에 앞서 분명한 점은 일본과의 과거는 이 이야기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 안에서도 일제의 잔혹함은 이미지의 수준에 머물 뿐 서사의 전면으로 떠오르지 않으며, 인터뷰에서도 애국과 항일은 도착하려는 목표지가 아니라고 감독은 분명하게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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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나는 그 지점으로 계속 돌아가게 된다. 한국인이 아닌 관객은 ‘험한 것’을 어떻게 인식할까? 역사적 공동체로서 공유하는 집단적 감정이 부재한 관객에게는 그 속에서 보는 악의 심연의 깊이가 전혀 다르게 감각되지 않을까? 그들의 의문을 상상해 보자.

 

 

약점을 알아내 존재의 진실을 정복하여 결국엔 물리칠 수 있는 여타의 크리쳐와 무엇이 그렇게 다른가? 저 동양 고블린의 어떤 지점이 저렇게 무력하게 공포에 떨 정도로 불가해하며 미지란 말인가?

 

 

부재를 상상했을 때 공유된 역사적 트라우마가 더욱 선명히 보인다.

 

전쟁을 비롯한 극단적인 적대 상황에서 인간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외집단을 비인간화하여 증오와 살육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 역사적으로 목도해왔고 지금도 눈을 들면 복수의 사례가 현재진행형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끝난 후 불가해한 악에 대한 사유와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인간에게 그러한 일면이 있다는 것은 이제 잘 알려진 사실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는 비인간 이전에는 영원히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친일 장교의 영 아래에 묻힌 투구를 쓴 다이묘 오니의 형상을 더듬을 때, 어떤 덧붙임 없이도 바로 그 불가해한 악의 일례를 연상한다. 학살자의 잔혹함을 드러내고 피해자가 흘린 피와 눈물에 이입하게끔 하는 장치 없이도, 우리는 지난날들에 중첩돼 온 서사의 결을 스쳐 갈 뿐인 이미지 위에서도 읽어낸다. 그것이 ‘험한 것’에 대한 공포를 완성한다. 오컬트에 항일 코드를 영리하게 활용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고, 항일 코드의 변용을 오컬트라는 장르를 통해 성공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활용과 변용은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에 직면하고, 이후를 계속해서 살아가는 인물을 그리는 서사를 통해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귀 기울일 만한 이야기로 가 닿는다. 이야기가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거기에서 새로운 사유를 발견하든 그렇지 않든, 이렇게 많은 청자를 끌어낸 영리한 시도임은 확실하다.


개인적으로 개봉 전부터 기대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더니 와이드 릴리즈와 동시에 엄청난 버즈량과 함께 빠르게 관객을 모으고 있는 <파묘>의 행로가 반갑다.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으로서,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꼭 봐야만 하는’ 한국 영화가 계속 나와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가 평년 수준으로 어서 다시 회복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작품성이 훌륭하든 훌륭하지 않든, 재미가 있든 없든 간에 일단 극장을 찾는 사람이 많아야 더 많은 영화가 세상에 나오고, 그만큼 각자만의 좋은 작품을 만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그래서 호러물을 보러 가면 잔뜩 겁을 먹어서 반은 눈을 가리고 보게 되면서도, 기꺼운 마음으로 영화관에 달려갔고,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가누어야 했다. 그렇게 내게는 불가해한 악을 정령으로 형상화한 흥미로운 이야기로 기억될 영화를 만나고, 영화에 대한 저마다의 온갖 이야기를 재미나게 듣고 있다. 이 마중물로 또 어떤 영화가 길어 나올지 기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명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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