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신시대의 피그말리온 [도서/문학]

글 입력 2024.02.16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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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만들어 낸 조각상과 사랑에 빠진 피그말리온. 그리스 로마 신화로부터 시작된 이 이야기는 다양한 스토리로 변주되며 유명 플롯으로 자리 잡았다. 예술가라면 자신의 창작물에 정성을 다하지 않을 리 없고, 심혈을 기울인 작품에는 마음이 가기 마련이다. 나의 취향과 감성이 가득 담긴 결과물은 나의 일부이기도, 나의 분신이기도 하다. 내가 사랑하는 모습이 담긴 나의 조각상, 나의 염원.

 

살아 움직이는 창작물에 ‘나’, 즉 창작자의 지분은 어느 정도일까. 여기서 살아 움직이는 창작물이란 최근 급속도로 성장 중인 ‘버츄얼 스트리머’를 뜻한다. 특수 장비를 착용한 연기자는 2D/3D 캐릭터 모델의 목소리와 움직임을 연기하며 주로 생방송을 통해 콘텐츠를 제공한다. 연기자의 신상 정보가 보호되고 취득한 기술과 장비를 활용해 다양한 방송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점에서 각광받고 있다.

 

소속사를 거치지 않은 개인 버츄얼 스트리밍 사업에는 크게 두 가지 인력이 요구된다. 캐릭터를 연기하는 연기자와 콘텐츠를 기획하고 방송 진행을 도우며 SNS와 댓글을 관리하는 관리자다. 관리자가 준비한 최적의 환경 속에서 연기자가 껍데기에 숨을 불어 넣으면 그제야 비로소 버츄얼 캐릭터는 시청자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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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개인 버튜버(버츄얼 유튜버)를 다룬 이희주의 소설 『마유미』에서 ‘현주’는 미소녀 캐릭터 ‘마유미’를 연기한다. 산책과 독서를 즐기는 마유미, 새처럼 우아하게 먹는 마유미,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마유미는 현주의 일부지만 동시에 현주가 아니다. 그 캐릭터성은 분명 연기자인 현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나 짜인 각본대로 웃고 말하고 움직이는 마유미는 현주라는 한 인간의 모습이라 볼 수 없다.

 

그 각본을 짜는 사람은 ‘나’다. 현주의 친구인 ‘나’는 마유미의 대본을 쓰고 방송을 관리하며 현주와 협업해 마유미를 만들어 낸다. 사실상 마유미의 생각과 행동, 성격과 흥미를 정교하게 설계한 장본인이다.

 

 
눈을 감고 공기를 들이마셨다. 이곳 어딘가에 녹아 있던 그 애의 세포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나를 숨 쉬게 하는 마유미. 내가 기른 마유미. 나의 마유미.

 

- pp. 52-53.

 

 

‘나’는 마유미와 사랑에 빠졌다. 이 사랑은 불가항력이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모습으로 만들어진 생명체는 그 자신보다 더 취향에 부합할 수밖에 없다. ‘나’는 ‘나’의 마유미를 현주와 분리해 여겼다.

 

그러나 현주는 마유미와 스스로를 동일시하기에 이른다. 한차례 논란을 겪고 구독자를 잃은 채널의 재기를 위해 현주는 진짜 마유미를 보여 주고자 했다. 캐릭터 뒤에 있는 선명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자는 뜻이었다.

 

한 버츄얼 캐릭터를 둘러싼 두 사람의 얽힘을 소유권 논쟁이라는 말로 납작하게 누르고 싶지는 않다. 그보다는 더 크고 진득한 사랑이 묻어 있는 글이다. 가짜는 언제든 진짜가 될 수 있지만 그 안에 진실의 함유량은 몇 %나 될까. 마유미의 본질을 이루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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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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