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새롭지 않은 것에 대한 목표

청산하지 못한 과거와의 조우
글 입력 2024.01.21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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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때 작은 노트를 한 권 사서 첫 장에 '하고 싶은 일, 사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이라고 적었다. 그 뒷장부터 생각나는 대로 해보고 싶고, 갖고 싶고, 가고 싶은 곳을 적어 내려갔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있고 사소하지만 용기가 필요한 일도 있고 장기 프로젝트도 있다. 그렇다고 목표나 버킷리스트는 아니다. 그때의 기분과 취향만 적는다. 아주 가끔 한 번씩 꺼내서 달성한 건 지우고 흥미가 식은 건 무시하고 새로 생각나는 걸 적는다. 1년 만에 꺼내서 확인하니 생각보다 지울 게 많았다.


정확히 언제 시작했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대략 7-8년간 120개가량을 적었고 40개쯤 달성했다. 바티칸에서 천지창조 보는 건 63번째로 적혀있었는데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바티칸을 품고 있어서 가고 싶었던 걸까? 약간 놀라운 기분을 가지고 기억나지 않는 기억을 달성했다.


꺼낸 김에 열 개 정도 더 적었다. 이 중 몇 개나 이룰 수 있으려나.


올해의 목표는 작년에 이어 비워내기로 가닥을 잡았다. 새로이 무얼 하겠다는 목표는 매해 멀어지기만 해서 미련을 버리고 이제는 그만 관두기로 했다. 그동안 저질러둔 목표를 하나씩 수습하기로 했다. 지겹도록 반복하고도 개선하지 못한, 이루어내지 못한 목표를 다시 쓰는 것도 한두 번이지 그걸 몇 번이나 되풀이하는 건 바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나서서 천치가 될 순 없으니 이제부터라도 양심을 조금 챙기기로 했다.


우선은 사놓은 책을 한 권 더 읽기 전까지 새로운 책을 사지 않는다든가, OTT에서 찜해놓은 목록의 1/3은 보기 등 의지는 있었으나 미뤄놓은 일을 해치우기로 했다. 과거의 내가 미래에 나에게 떠넘긴 취향의 흔적을 다시 마주할 시간. 어떤 취향은 아직 유효하고, 어떤 건 의아할 정도로 달라졌는데 그 간극을 느끼는 데서 재미를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새해가 되었지만, 새로운 것은 한동안 미뤄놓을 예정이다.


누가 나에게 목표를 들이민 적도 없고 새로운 걸 달성하라는 미션을 내린 적도 없다. 누구도 눈치를 주지 않았고, 은근한 압박이나 분위기도 전혀 없었다. 내가 하고 싶어서 매번 목표를 세웠다. 이 정도는 해야 할 것 같다는 강박을 닮은 의무감이 내내 나를 맴돌았다. 어디서 나온 감정인지도 모르고 흘러나왔으니 그 방향 따라 흐르기로 했다. 어디로 흘러갈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지금의 비워놓기도 맥락이 있는 일은 아니다. 왜 여전히 새해 목표를 세우는지 이유도 모르고 시작도 모르면서 수습되지 않으니까 그저 애쓰는 중이다. 한 번 시간을 두고 차분하게 왜 목표를 세우는지, 왜 새로운 일을 하려고 했는지 생각해 보면 좋겠지만 이미 흐름을 탔기 때문에 거스르는 건 쉽지 않고 그런다 한들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아서 일단은 방향 전환을 하며 마저 흘러가기로 했다.


예전엔 과거와 달라진 현재가 변화일까 진화일까 고민했었다. 달라지기만 한 거면 소용이 없으니 한 걸음 나아가서 구분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제자리걸음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란 걸 안다. 문제는 변화냐 진화냐가 아니라 역행하면서도 알아채지 못하는 거니까. 다행스럽게도 나의 방향은 아직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니 마저 가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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