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루프리텔캄 - 민지에게 [사람]

민지에게
글 입력 2023.12.26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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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지야. 네게 편지를 쓰련다. 허나 나의 편지를 쓰기에 앞서, 네 편지가 먼저 내게로 닿게 된 경위를 잠시 곱씹는다. 지난번 아트인사이트 오프라인 모임이 끝나고, 사람들은 서로 연락처와 인스타 아이디를 교환하느라 떠들썩했었다. 그리고 서로 안녕, 누군가는 약속이 있노라 조금 더 쉬이 빠져나갔고, 별다른 약속이 없는 또 다른 치들은 조금 더 머뭇거리다간 장소를 떠나갔다. 떠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는 언제나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아쉬움 보다는 깊은 무언가를 느낀다. 보드라이 감춰두어야 옳을 무언가를.


떠나는 걸음을 계단에 옮기는, 그 사람들의 뒤편으로는 아직 몇 명의 사람들이 동그라니 남아 있었다. 아직 오늘을 완전히 털어버리고 혹은 매듭짓고서 각자의 행로에 오르기를 저어하는 사람들, 끝내기 아쉬운 기색에 가림 없이 전전하는 에디터들이 거기 남아 있었다. 우리는 다 같이 식사를 하러 갔다. 그리고 무언가를 이야기했다, 종일을 그토록 말하고도 아직 가슴 안에 다 채워지지 않은 무언가가 있어, 우리는 이야기하는 속에서 그것을 발견하려는 듯이 계속해서 말했다. 식사를 마치고, 아직까지도 아쉬운 뒷맛에 우리는 그 추운 날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갔더랬다. 그건 아마 좌중 누군가 말하였듯, 아트인사이트와 그 구성원들의 울타리 안에서만이 우리 느낄 수 있었던 독특한 편안함을 대하여, 그 안에 조금 더 머물러 보려 하는 그런, 애틋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톺아 볼 제 하등 신비로움이나 놀라움이 없건마는, 우리가 그 안에서 나누는 이야기들이 어찌나 귀한 것으로 다가오던지를 반추할 때에도, 나는 아쉬움보다 깊은 무언가를 느낀다. 우리가 아트인사이트에서 나누는 이야기들이 무어냐. 아주 귀한 정보나 요긴한 비밀이냐 아니, 전에 없던 놀라운 영감과 그에 대한 환희의 찬사이냐 아니, 끈끈한 유대감과 소속감을 배태하는 우리들의, 우리만의 사상이냐 아주 아니, 나는 글을 쓰고 글을 좋아하오, 이 간단명료한 것에 지나지 않음이다. 이 간단한 것이 어찌나 드물던지를, 나의 삶에는, 그것을 생각하면 아쉬움보다는 짙은 무언가를 느낀다. 다행인 것은, 그것이 나의 일만은 아니었던지 우리 이렇듯, 추운 날에 아이스크림을 다 먹으러 가지 않았더냐. 밥을 먹고 아이스크림을 먹고, 그 내내 이야기하고서도 남는 아쉬움, 마침내 우리도 이별했다. 또 보자, 산뜻한 말을 나누고서.


'또 보자', 나는 이 세 글자를 믿지 않는다. 그건 나의 염세하는 천성 그 자체라기보다는, 내가 사람을 너무 지나치게 좋아하던 까닭이야. '우리 다음에 꼭, 또 보자', 나는 이 달콤한 문장을 믿지 않아. 왜냐하면 그건 너무 달콤해, 내 그것을 지나치게 원하기 때문이다. 조만간 밥 먹자는 말이 '안녕, 잘 지내'라는 말인 줄을 몰랐던 시절,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고, 그건 내게 기다림을 학습시켰다. 왜 이 말을 꺼내었느냐면, 나는 우리가 그 이후에 실지 또 볼 줄을 아예 몰랐던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놀랐던 거야.



그 날이 첫눈 내린 날이었지, 아마? 몇 에디터들과 약속을 잡아 강남에서 다시 모이기로 한 날, 내 흐린 기억이 맞다면 첫눈이 내렸다. 가장 가까이 사는 나는 조금 일찍 도착했기에, CGV 건물 처마 밑에서 눈 내리는 걸 구경했다. 꽤 송이가 커다란 눈발이었다. 우리는 그날 고레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을 보고, 보드게임을 하고, 술을 마셨다. 첫눈이 왔고 너희랑 바깥에서 처음 만났고, 영화를 보고 보드게임을 하고 술을 마시고… 그런 일련의 하루, 그 자체로 보아도 흡족한 하루였으나, 그 과정에 필연히 수반되는 무언가, 우리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감각이 더없이 좋았다.


그리고 술자리에서 민지는 가방을 뒤적여 편지를 주었다. 모인 사람들 하나 하나에게, 걸맞을 카드 시도 한 편씩을 끼워서. 아, 이런 젠장, 젠장, 정말이지 욕지거리가 나올 정도로 훌륭하군! 편지를 받는 건 정말이지 훌륭한 일이야, 너무 소박하나 놀랍도록 귀한 것, 말하자면 우리가 앞서 에디터들을 원하고 그리워하던, 바로 그 이유처럼 말이지. 너무 소박하나 놀랍도록 귀한 것, 하여 글 쓰는 나는 이런 편지를 쓴다.


우린 그 자리에서 각자의 편지를 읽었다. 그리고 나는 그 내용 앞에서 여느 때 같은 반응을 보였다. 수줍음과 부끄러움이지, 간단하게만 말하자면 말이야. 오프라인 모임에서도, 네 편지에서도, 우리 에디터들 가운데서 내 가장 자주 느끼게 되는 감정은 수줍음과 부끄러움이다. 왜냐하면 내 글을 읽었노라, 고백하는 듯이 다가오는 그 말씀들 앞에서 내가 무던한 중심을 잡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라 차라리 나는 풀어두거든. 내 글은 일단 길어, 그냥 무턱대고 많이 길고 또, 우울하고 염세적이지. 그리하여 나는 내가 발견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그것을 불신으로 두드리고 망설이는 마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활자 안에 눌러담은 나는 발견되고 싶으나, 대체 누가 이걸 읽을 것인가, 하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발견되면 일단 부끄럽지, 허나 이건 자연스러운 감정이야.


네가 내 글을 전부 다 읽었더구나. 나는 이토록 소상히 내가 발견되는 것에 대해 놀라움보다 깊은 무언가를 느낀다. 자극이 일정 이상의 역치를 지나면 그에 대한 반응이 소강하는 듯이, 억세게 좋은 것에 대하여서는 환희와 까무러치는 들뜸을 지나 아주 고요한 차분함으로 귀결되는, 매우 흥미로운 경험 속에 내가 앉아 있다. 나의 '무애'는 읽기에 퍽 벅찬 글이라 자고 自顧 하고 있건마는, 그 안에 깃들어 있는 것들과 '오래된 기도'로 이어진 개인적인 변천사까지를 모두 훤히 꿰뚫고 있는 네 앞에, 내가 벌거벗기어 전부 드러났고 환희의 기분을 넘어서, 고요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편지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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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편지 전문을 여기다가 옮겨대는 건 실례일 것 같다. 대신하여 네가 같이 끼워둔 주머니시를 여기 옮긴다. '신은 믿지 않아도 구원은 믿으니까, 믿는 만큼 나는 글을 썼다.' 보내준 시를 이렇게 바꾸어 읽었다. '사실 나는 시간을 낭비하며 살고 싶어, 마음껏, 무용하게, 넘쳐 흐르는 듯이, 이를테면, 더 이상 쓰지 않고도 괜찮은 삶.'


내 소원은, 내 안에 꾸물거리는 모든 영감을 활자로 옮기는 것. 강 위에 튀어오르는 윤슬처럼, 번쩍이고 시시각각이 변모하는 것, 아름답고도 어지러운 것, 더 이상 머리로는 그걸 따라갈 수 없어. 토막씩은 옮겨볼 수 있으나, 부문별로는 펼치어 볼 수도 있으나, 내 안에 아직 채 온전히 발견되지 않은 무언가가 있어. 전부 다 꺼내어 말리고는 활자로 탈곡하여, 씨와 날을 올올이 엮어대는 일. 그리하여 내가 드디어 정돈되고, 스스로 발견되는 것, 그리하여 한 가지 모습으로 내가 꾸준히 존재하는 일이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구원.


 

나의 글과 사상을 사랑한, 나를 발견하고 이해하는 모든 이에게 지금껏 나는 편지를 써왔다. 영혼에 세들은 사람들에 대한 나의 생각이 편지가 되어 나오는 것은, 그저 자연한 수순. 오늘의 편지엔 내 이야기만 잔뜩 쓴 것 같지만, 일종의 헌정이라 생각해 주, 표현하지 않으면 영영 알 수 없는 것이 있어, 너희들이 내게 어떤 의미로 갈무리되어 있는지도 그렇지. 너희는 내 소원의 주문이다, 루프리텔캄 Roopretelcham, 얼굴과 표정을 가진 소원의 주문. 나는 속으로 너희를 부르리, 그러니 내 곁에 있어주어, 그러면 내 소원이 이루어지는 어느 날까지 나는 계속해서 쓰고 또 쓸 것이다. 딱 지금 그대로, 오래도록 여기 있어주어.


내 말하였고 네가 인용하였듯, '나는 그대들을 생각하면 글을 더 잘 쓰고 싶어져.' 내 글을 발견하였고 사랑하노라, 고백하는 듯이 말해주는 사람 하나하나씩은 내 영혼의 아주 깊숙한 곳에 자리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줄곧 거기 있어, 이따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식으로 그를 생각해. 그리하여 그대들을 생각하노라면, 나는 더욱 쓰고 싶어져. 더 잘, 더 훌륭하게, 더 정확하게… 아름답게. 그러니 너희가 내게 어떤 존재로 되어 있는지를, 이만하면 충분히 표현한 것 같다. 꾸준히 여기 있어주어, 아트인사이트에.


쓰느라 머리가 과열되었구나. 조금 어지러우니 화답의 편지는 여기까지. 이만, 또 보자.



[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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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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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머니시
    • 안녕하세요. 서상덕 에디터님. 저는 주머니시를 제조하고 유통하는 송유수라고 합니다. 다름 아니라, 해당 글을 주머니시 SNS 계정에 소개하고 싶어 인용을 허락 받고자 댓글 남깁니다. 메일 주소를 찾지 못해 댓글로 남긴 점 양해 바랍니다! pocketpoem.mail@gmail.com 으로 회신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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