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오래된 기도

꾸준히 바라고 길이 부름, 이건 내 오래된 기도이다
글 입력 2023.10.14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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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미기][크기변환]10회 아트인사이트 초대.jpg

 

 

아트인사이트가 무얼까. 그 질문을 내게 던져보았어. 그러면 어김없이 내 안에서는, 나를 투영한 대답이 돌아 나오곤 하지, 내 안엔 나로 가득하거든. 말하자면, 아트인사이트는 '내게 있어' 무엇이다, 라는 대답이 돌아 나온다는 것이지. 나의 아트인사이트는 아무런 편견 없이 들어주는 귀이고 그저 품 너비 담아내는 그릇이며, 다정한 눈빛을 띤 침묵이다. 긴 글을 시작하려 해, 내 안엔 문장이 너무나 많아, 백지 앞의 나는 그걸 자제하지도, 잘 통제해내지도 못하곤 하거든.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게 나의 아트인사이트이고 내가 여기 머무는 이유이지.

 

난 말야, 어질고 온순해지고 싶었어.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기존의 성격들 중 삿된 것들은 너무도 소름 끼치는 것을 대하는 듯이, 내팽개치듯이 곧잘이라도 던져버리고 싶었어, 그렇게 열매를 고르는 듯이 행할 수 없는 것이라 하시면 전부를 버려서라도… 막 고교에 입학하고 야간 자습 시간, 답답한 마음에 자습실을 나서 무작정 다다른, 봄철 잎이 다 떨어진 벚나무 아래로부터 시작된 이야기야, 어언 15년이 되어가는구나.

 

내겐 화가 참 많아, 그리고 예민하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걸 해결하기 위한 시간들이었어, 지금껏 살아온 내내는. 무작정 사람들을 찾아도 보았고, 많은 활동도 해보았으며, 줄곧 사색하였고, 딴에는 책의 구절과 위안감에서 찾아보려고도 하였지, 어디서도 찾지 못하였지만 말야. 난 예민하고,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으며, 그걸 무지하게 싫어해. 그래서인지 내 안에는 말로써 뱉어낼 수 없는 게 너무 많아, 예민함이란 감각과 감정의 역치이자 촉수, 무심코 툭 스쳐버린 모든 것들로부터 가시가 올라오니 말이야. 나는 내게서 떠오르는 감정을 두려워하고, 정확하게는 그것이 내가 붙잡아 꺾어보기도 전에 툭 하고 쏘아나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 두려움에 비롯되는 긴장 어린 침묵은 늘 나를 감돌아, 그러는 동안 문장은 가슴 안에 켜켜이 쌓이지.

 

나는 이게 모조리 나의 탓, 아니 나의 것이란 걸 알아. 그러니 답을 구하려고 오랜 길을 걸었어. 혹여 그대 가슴 속에도 조언과 답변이 치밀어오르걸랑 다정한 침묵 속으로 삼켜줘, 무수히 들어왔지만 한 번도 되지 않았거든. 내 천성이 참된 만큼, 그건 쉬이 바꿔낼 수 없는 것이었다. 천성이란 타고난 것이라, 그 사람의 이마 위에 새겨져 있는 운명의 예언이기도 하거든. 나는 나에게 이미 주어진 어떤 운명을 본다. 그건 내 할아버지의 고독한 뒷모습이자 분노로 일그러진 아버지의 얼굴이며, 거기서 비롯되는 모든 당연한 결과들이지. 피하지 못할 고독으로 덕지덕지 주름진 나의 얼굴, 일찍이부터 그것을 보았어, 삶의 힌트가 아주 일찍 주어진 셈이니 나는 기쁘다, 우리 삼대 三代를 잇고 묶는 아주 질긴 핏줄로부터. 그러나 처음부터 내가 나의 운명과 화해하고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 아니었겠어?

 

*

 

어린 때 되뇌던 기도, 나는 나의 운명을 거부하고 원망했다, 내게 아주 마법 같은 순간이 찾아, 한순간에 다른 사람이 되어버릴 수 있다면... 똑같은 얼굴과 손을 하고서는 그러나, 그 안에 품고 있는 감정의 그릇만이 송두리째 바뀌어버리는 것이지, 그 감정의 연원인 기억과 경험은 송두리째 바래버리는 것이지, 더는 아무런 기능도 하지 않는, 낡은 책 속에 담긴 고루한 낱말들처럼, 나는 그것을 기억할 수 있겠으나 더이상 아무런 일렁임도 없는 거야. 그렇게 여느 때와 같이 눈을 뜬 하루는, 어제와 너무도 선명히 분리되어버리고 나는 명랑해지는 거야,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왜냐하면 그런 일은 존재할 수 없기에 어떤 이유도 가질 수 없는 것이니까.

 

만약 기도를 들은 신이 꿈결 머리맡에 가로되 거듭나라 하시면, 그리하여 별것 아닌 기적이 일어나 나는 다시 태어나고, 그리던 순간 앞에 눈을 떠 느끼게 될 것은 무엇인지를 상상해봐. 아, 나는 드디어 어질고 온순하고 상냥해졌어, 눈을 뜸과 동시에 곧잘 느끼어 알 수 있을 거야. 아무런 거울과 상관물, 행위와 반응 없이도 마음 안에 일체 부정이 사라졌다는 것을 나는 알아차릴 수 있을 거야, 그건 언제나 느껴지는 것이었고 줄곧 밀어 넣어 가둬야 하는 것이었으니까. 붙잡고 잠궈둘 아무런 불길함도 텅 비어버린 마음에는, 낯설고 온순한 고요함이 감돌고 나는 처음으로 편안하겠지. 얼마나 조용한 놀라움일 거야, 그러나 아직은 의뭉스러움을 느끼어, 반신 半信과 반의 半疑 사이를 오가며 헤맬 나는 옥상에 오른다.

 

아침 찬 바람이 불어 드는 옥상에는 투명한 세상과 명상과 질문이 가득하지. 산뜻하기가 다시 없을 이 새로운 가슴 안쪽으로, 살아온 시간만큼 단단한 기억에다가는 몇 가지 문답을 하게 될 거야. 어제까지 우울하던 것을 떠올리고 싫어하던 것들과 두려워하는 것과 불안과 슬픔에 대해 물어볼 거야, 그리고 마음은 묵묵부답으로 답한다. 아무런 일렁임 없는 고요함으로 답한다. 문답이 길고 차츰 의심이 확신이 되어가매 얼굴 위로는 미소가 번지고 잘 지워지지 않을 질기고 온화한 미소가 번지고 드디어 새로운 하루를 받아들이게 될 거야. 그리고는 기억해내겠지, 여명이 비추고 있는 꿈의 끝자락으로부터, 휘날리는 재처럼 타들어 사라지고 있는 꿈의 기억 속으로부터 떠올려 보일 거야, 거듭나라는 그 음성을. 영영 휘발되기 직전에 나는 그것을 기억해내고, 그가 모조리 가져가셨음을 마침내 알 수 있을 거야,  오랜 기다림이 있었고 마침내 기도가 이뤄지는 그 순간을 알 거야.

 

 

그 이전까지의 존재의 역사가 마치고 명백한 새로움과 낯선 이 아침을 기점으로 분기 처리되어 버리겠지. 나는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태어난다, 아직 다른 사람들은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으나,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것이겠지. 하루를 겪어 낯섦과 어색함과 수상함인 것이, 사흘을 겪으며 못내 의뭉스러움으로, 아흐레를 겪으며 보드라운 의문으로, 보름을 겪어 자연스러움으로 변해갈 것이며, 그렇게 긴 시간에 걸쳐 점차 받아들이게 되겠지. 곧 도시가 깨어나고 나는 사람들에게로 내려간다, 조금은 떨릴지도 모르겠어, 주변의 사람들이 당장 새로운 나를 받아들일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럼에도 나는 즐거울 거야, 얼마나 오래 기다리고 바라던 순간이 아니었겠어. 새 부대에 새 술이 담기는 듯이, 아무런 부정이 없는 이 마음으로 세상과 사람들은 어떤 새로움으로 다가와 줄지를 생각하면 전율마저 할 거야.

 

앳된 시간이 그치고 새로운 감각으로 새로운 존재로서 첫 번째 하루를 맞이하는 상상. 그 상상 속에서 나는 속 깊고 어진 존재로, 복되고 복된 사람으로 거듭나 있다, 나의 오랜 불안과 분노와 두려움은 스러진다, 한순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얼마나 허탈하고도 감미로울까. 경계가 그어진 어제는 바로 눈감은 직전으로부터 맞닿아 있어, 시간의 저편을 향해 뻗어져 있음을 기억하는 이가 느끼게 될 가벼운 허전함에 한편 몹시 두근거림으로 경계의 시작 앞을 나는 서 있다.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는 그 상상의 경계 앞에서, 설레는 첫걸음을 내딛으려는 순간 그러나, 나는 꿈을 깨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는 법이지.' 나는 눈을 떠 습관처럼 꿈을 깨었다. 상상이 차츰 환상과 공상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탈바꿈되는 것을 경계하거든.

 

 

그럴 순 없는 법이지, 하고 아무도 없는 방에 울려 퍼졌다. 눈을 떠 빈방을 돌아다보았어, 그리고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 내 곁에 가득 차 있음을 보았지. 조금 창백한 불빛이 비추이는 현실, 오직 여기서부터 나아가야 해. 평소라면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담담하게, 너무 당연하여 어쩜 유치하게까지 여겨지는 문장을 그러나, 상상이 주는 여운 속에서 조금 낯설게 바라보았다. 이 낯섦, 감미로운 상상이 짙은 감상과 아쉬움을 깊어 내기 전에 나는 꿈을 깨야 해. 익숙할 정도로 반복해온 일이거든. 어찌 되었든 나는 가야만 하니까.

 

지상의 모든 것은 딱딱한 인과의 계단을 밟아 오르며 차근차근히 닿아가는 것이니, 본 적 없는 신을 빌려 오지 않는 한, 그런 상상을 기대로나마 믿어볼 수는 없는 것이니까. 나로서, 나로서 존재하고 나로서 걸어가야 해. 그건 이미 정해진 것들이니까. 정해진 것들, 그렇지 않겠어, 놀라움은 없는 거야, 그런 건 오직 환상이지. 그러나 환상이란 딱딱하고 고루한 인과율을 벗어, 성큼성큼 공중을 타고 밟아 오르는 산뜻함과 쾌감일지라도, 환상보다 깊은 허탈함을 아는 바에는 지지부진하되 확실한 현실감으로 한 발 한 발을 떼일 거야, 그래 오고 그래 왔듯이. 환상으로부터 눈을 떠, 나는 흰 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위로는 지난 15년간 걸어온 길이 펼쳐지지, 돌아볼 제 그것은 휘청이는 갈 지 之 자로 뻗어나와 여기 내 발끝으로 이어져 있음을 느낀다. 마구 흔들리며 휘청이며, 돌아 돌아 굽어진 나의 행보, 더디게 뻗어온 나의 삶, 지지부진함.

 

지지부진함, 나는 세상과 그 위에 쌓여가는 모든 인생들을 그런 것으로 바라본다. 그건 한 발 뗀 만큼만 나아갈 분명함과 엄중함이고 한 발씩만 갈 수 있는 자그마함, 그런 길 위로 일렁이는 여정의 아득함과 머나먼 지루함에 대함. 지지부진함, 이렇듯 딱딱하고 이따금은 가슴 먹먹하면서도 지엄한 현실감, 그리고 그에 대한 수긍과 체념의 말간 읊조림. 인생은 아주 긴 여정이며 연속적인 것이며 필연적인 것이니까.  한 발씩 가는 꾸준함이고 아주 조금씩 바꾸어낼 수 있는 행보이며, 그런즉 인생이란 것의 비유는 충분히 지나와 돌아다 보는 것, 행로가 되어주는 것이었겠지. 나는 꿈을 깨 빈방을 돌아다보았다. 조금 창백한 불빛이 비추이는 나의 방, 흰 벽 위로 걸어온 길과... 걸어온 만큼 가야 하고, 그보다 멀리 가야 하고 아마 도착일랑 없을, 기특할 나의 행보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어질고 온순해지고 싶었어, 진심을 넘어 마음 깊은 곳 본질로부터. 그건 참 멀리 있고 아득히 높이 있는 것 같아.

 

**

 

난 내 성격을 바꾸고 싶었어. 남들처럼, 남들처럼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그로써 내가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랐어, 또는 분노를 모르는 나무처럼, 미소 짓는 쿼카처럼 사랑스럽기를. 사랑스럽기를, 그리하여 사람들이 내게로 와 머무르기를 새가 나무에 걸터앉는 듯이 자연스러움으로 하고, 사람들이 내게로 와 말하기를 새가 지저귀는 편안함으로 하고, 그리하여 그 중 어떤 사람이 내게로 와 빨간 사랑을 건네는 일은 그 새가 둥지 터를 고르는 듯이, 신중한 고심 끝에 내리는 굳은 믿음으로 행하여주기를. 그대는 이렇게 나를 대해주기를, 나는 그런 사람이기를. 편안한 나무처럼 나는 사랑스러워지기를 바라는 것이지, 내가 거듭나고 싶다는 것은.

 

한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는 일은 둥지를 짓는 행위와 닮았다, 그런 신중함과 조심스러움으로 행해지는 것 같아, 사랑함 그것은 가슴을 떼어 내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헤집어 낸 가슴은 취약해지는 것이니까. 이제는 진부해지기까지 한, 사랑에 대한 고루한 명제들과 짙은 기억들에 비추어, 우리는 이 문장에 대해서만큼은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며, 아마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을 테지. 한편 진부하다는 것은 오래된 만큼이나 적확하다는 뜻이기도 하거든, 물론 실체가 없는 것에 적확을 논한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을 일이니, 본질을 꿰뚫었다고 풀어 이야기해보아야겠지만 말야. 여하간 사랑에 대한 유명하고도 지루한 문장들을 부러 늘여놓는 건 그만두도록 할게. 이것은 전제일 뿐, 내 하고픈 말은 아니거든.

 

새는 줄기가 바스러지지 않을까 발로 골라보고 부리로 쪼아대며 발생하는 공명음으로 하여 그 밀도를 가늠한다. 그리고 결정했다는 듯이 위태로운 공중에 마침내 둥지를 짓기로 하지. 하루는 옥상에 걸터앉아, 너무도 무료한 눈 위로 포착된 어느 새의 행적을 오래도록 바라본 기억이 있어, 까치는 둥지를 짓고 있었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그려볼 수 없겠더군. 잠시 숨 고르기 위해 내려앉은 난간에서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너무 머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기쁨도 슬픔도 없는 동그란 눈을 하고 있었어, 권태와 허무를 모르는, 참으로 투명하고 무애한 눈. 까치는 좁은 부리로 한 가지씩 마른 가지를 물어다 옮기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침으로 굳히거나 이슬이 묻어 있는 아침 거미줄을 훔쳐 구분구분 이어 붙이기도 하더라지. 까치는 나와 만나기 오래전부터 가지를 물어다 옮기고 있었을 것이고, 이윽고 그날의 해가 남중고도를 지나 빨갛게 타들어 가는 때까지도 그치지 않더군, 지치지도 지겹지도 않은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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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 아래 수평으로 나는 까치의 그림자, 바라보던 그때는 약간의 외로움 말곤 별생각이 없었지만, 지금에 문득 그게 사랑 같다는 생각을 해. 조금 우겨보자면 보금자리이자 요람을 짓는 그 마음 자체를 두고 보더라도 사랑이라 할 테요, 별개로 보아도 그건 우리 사랑이란 것의 작태가 가지는 한 가지 은유가 되어줄 수 있겠지. 저토록 살뜰한 것이라니, 사랑, 그러니 사랑스럽다는 것은 말야, 둥지를 지을 가지의 자격에 대함이고, 그건 내게 있어 자칫 대단한 일이 되어버린 것 같아. 내게 그 부지런한 잔가지를 옮겨와 집을 짓고 그 안에 눌러 앉아버리는 것이라니, 얼마나 될성부르고 속이 알찬 나무요 그 줄기여야 하겠어.

 

찬 비가 내리면 곧 있을 가을 생각에 새들은 여러 가지를 전전하며 기웃거린다. 내게는 사람들도 그리 다르게 보이지 않았어. 가슴 한쪽에는 사랑이란 이름의 뿌리 내릴 씨앗을 안고서, 가지를 골라보는 신중함으로 읽히곤 하지, 사람이 서로 사람을 향하는 그 마음은. 우리는 가는 사랑으로서는 새와 같이 하고 사랑받음으로서는 그 나무와 같이 이해되지 않는가. 네게서 와 내가 안아 들고 또 내게서 가 네가 받을 것이며, 안아 들 내게로 네 것이 오고 안아볼 네게로 내 것이 갈 테니까. 물론 어떤, 아니 많은 사랑에는 불가항력과 비가역성이 있지만, 카오스, 그것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해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은 이런 것이다, 올 곳으로 오고 갈 곳으로 가는 것. 나는 사랑에 대단히 서툴러, 정확히 말하자면 언제나 사랑이란 어려웠기에,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기나긴 궁리가 먼저 있었고, 이상은 그것이 남긴 자취와 그 자투리들일 뿐. 그래서인지 아무리 열심히 쓰고 꼼꼼히 써보아도 딱딱하고 변변찮군, 그건 사랑을 머리로 먼저 그리려는 까닭에 분명일 테지.

 

 

사랑이 내겐 너무 어려운 것 같아. 그건 내게 주어진 화가 많고 두려움과 불안함이 많기 때문이지, 말하자면 나의 줄기와 이파리로는 가시가 돋아나 있음이니. 온순한 사랑이기를, 나는, 어질고 온순해지고 싶었어, 허나 바람이 길고 기도가 오랬다는 것은, 내가 그로부터 얼마나 멀리 있었는지를, 또 멀리서부터 오고 있었는지를 담담하게 가리킨다. 닿아가고 있는가, 나는? 가끔은 회의감이 들어, 그럼에도 지지부진한 걸음을 떼어 가고 또 가야 하지, 그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니까.

 

나는 언젠가부터 답을 정해놓고서 길을 찾으려 해, '그래서, 어찌하란 말인가, 이미 가야 할 곳은 분명하다', 치미는 회의를 대하면 가슴은 이런 문장을 꼭 붙잡지. 미리 정해둔 것들이 있은 다음에야 향하는 걸음은 눅진하고 끈질기게 이어지는 것이니까. 엄습하는 회의와 피로감에 대한 저항이었겠지. 고된 길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야 할 곳을 분명히 하여야는 것이니까. 해도 海圖 없는 바다를 가는 듯이, 길이 나지 않은 수풀을 거치는 듯이, 피로와 불신이 깊은 길일수록 필요한 것은 오직 믿음이었다.

 

믿음, 그것은 지지부진함으로, 또 꾸준함과 신실함으로부터 오는 것, 기도하는 마음으로부터 서서히 응어리지는 것... 꾸준히 바라고 길이 부름, 이건 내 오래된 기도이다. 바라고 바라되 어렵고 멀리 있는 것에 대하여, 가슴 깊이 품어 외고 또 외는 것, 되뇌는 것은 기도이니. 얼마나 오랬는지 이제는 기억이 선하지 않아. 낡은 농부가 익숙한 괭이와 보습을 무관심하게 쥐는 것과 같이, 그보다 일찍 아침에는 하루를 시작하는 빵과 옥수수 수프의 앞에서 읊는 무의식적인 그 기도문과 같이 친숙하고 무심하지. 언제나 홀로 걷는 시간이 오면, 나는 조용하게 읊조린다. 그리고 치미던 불신을 넘어 나를 찾은, 이 친숙한 무심함이 곧 내 믿음의 증거임을 이따금 느끼곤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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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신과 기적을 빌어 거듭난 내가 느낄 것이 환희, 그뿐이었을까. 그토록 애쓰고 기도하던 시간들이 그저 끝나버린다면, 바라던바 하나씩 성취하며 지지부진한 한 발씩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툭 하고 던져지고 뚝 하고 맺어버리는, 교향곡이 악장의 페이지를 갈아치워 버리는 듯이, 그 주어진 아침에 내가 느끼게 될 것은 정말 환희에 더 가까울까, 아니면 쓸쓸함에 더 가까울까. 낭만을 거둔 상상 속에서 가늠할 수 없는 것을 가늠해봐, 그리고 밤 하나가 기울 때쯤 나는 답했다. 어쩌면 그것은 쓸쓸함에 가까우리라고. 나는 걸어온 거리와 떠나보내온 시간만큼, 바친 시간과 그리고 앞으로도 바치리라 미리 염두에 둔 시간만큼 커다랗게 느낄 거야, 아쉬움을.

 

아쉬울 거야. 그렇게 주어진 건 내 것이 아니니까. 내게 있음으로 나의 것이라 말해볼 수도 있겠으나, 주어진 것으로써는 나의 것이라 말해볼 수 없을지도 모르지, 왜 그러했고 어떻게 그러했느냐 누군가 묻노라면 나는 답할 수 없음이니. 나는 말야, 내 손으로 이루기를 바래. 분명하고 확실하게 쥐어 보이길 바래. 다시는 변치 않는 것으로써, 단단하게 거머쥐길 바래. 왜냐면 말이지, 너무도 많은 것들이 닿았다가 사라졌고, 가졌노라 생각한 것들도 다시 스러지기를 반복하였기 때문이야. 지지부진한 발걸음으로 가되, 차곡차곡 단단히 갈 거야, 그렇게 변치 않는 것을.

 

나는 기도한다. 그러나 한편 기도하고 있는 나의 마음은 참 황량한 것 같아, 사실 버겁거든,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는 감각과 그럼에도 아직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는 사실은 상충해, 소망은 멀고 기도는 오랬다. 회의 懷疑는 언제나 나를 감돌고 나는 다만 오기와 반항으로 걷는다, '그래서, 어찌하란 말인가, 이미 가야 할 곳은 정해져 있다'. 눈은 정말 창이라 사람들도 나의 마음을 알아보는 듯해, 이 황량함을. 그래서 아직은 그대들에게로 마음껏 갈 수 없다. 그러나 아직 머물러 있기로 한 이 황량함과 침묵 가운데에서 나는 가끔 외로워, 아니, 어쩌면 자주. 쌓이고서 분출되지 못하는 감정과 문장들과 켜켜이 뜨거워지는 가슴은 버거워, 그래서 마침내 글을 쓰기로 하지. 철저히 고립된 곳으로부터 느껴지는 두려움과 공황감, 글 씀은 고독에 몰래 서려 있는 광기의 어둠 속에서 휘두를 횃불이 되어준다.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오르탕스 블루의 유명 시 '사막'의 전문이야. 아주 간결하고 명료하지. 나는 글을 쓰기로 해, 글은 나의 발자국이 되어주는 셈이니. 홀로 걸어가는 것은 분명 벅찬 일이라, 나는 쏟아낸 나의 조각들을 굽어보며 어제의 나와 마주하지. 그러면 이상하게 반쯤은 이해받는 듯한 안도감을 느껴, 비록 제 꼬리를 무고 도는 우로보로스 같은 우스움일지라도. 가슴에 쌓이는 문장을 분출하기 위하여, 아직 이해될 수 없는 나와 이해받을 수 없는 나의 천성을 위하여 글을 쓴다. 내가 이해될 때까지, 아주 깊이 들여다보고, 오래 들여다보기 위하여, 침잠은 즉, 외로움과 꾸준함을 위하여. 그리고 그건 포기하지 않고 오래 걷기 위함, 이 사막을 건너 사랑스러움에 가닿기 위함이지. 오랜 기도를 마치는 그날, 지지부진한 걸음으로 마침내 도착하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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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설이 무척 길었구나. 나의 글은 이런 것이야, 침잠의 수단이자 기도문 같은 것이지. 그리고 아트인사이트는 내게 있어 글의, 정확히는 글'쓰기'의 동의어야. 유의어가 아니라, 동의어라고 나는 한 번 더 힘주어 말한다. 글 쓰는 이유이자 동기, 그리고 동력이기까지 하지. 아무도 읽지 못할 글을 생산하는 것은 쉬이 지치는 일이야. 아트인사이트를 찾게 된 것도 그걸 느끼게 된 시점이었지, 2년간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글을 써내다간, 더는 글을 쓰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벅참과 두려움. 사정이 어떻든 나는 글을 써야만 하니까, 분출하고 침잠하며 나아가야 할 길은 분명한데 아주 멈추어 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커가는 즈음 이리로 왔고, 나는 아직도 여기 있지. 아트인사이트는 아무런 편견과 지도편람 없이 들어주는 귀이고 그저 담아내는 품 넓은 그릇이며, 다정한 눈빛을 한 침묵이다. 지나친 편견이 아니라면야 무얼 써내더라도 괜찮을 것 같은 느낌. 얼마든지 안아줄 수 있는 누군가의 품이야, 나는 그 속에 있지.

 

그건 언제나 나를 귀 기울여 들어주는 사랑스러운 백지에 같으나, 아트인사이트는 그 백지들이 한 데 모여 엮이는 어여쁜 노트와 더욱 가깝다고 해야겠어. 거기에는 나뿐 아니라 또 다른 사람들의 발자국이 있으니 말야, 그리고 그건 내게 안도감을 줘, 그대가 얼마를 생각하건 그보다 크고 많이. 여러분의 글들이 모여있는 것을 보고 있자면, 언제나 다행인 기분이 들어. 얼굴도 모르는 우리는 각자의 방에서, 빈방 흰 벽 앞에서 각자의 글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이 나를 위안하지. 글은 반드시 침묵과 고독으로부터 오는 것이니까, 쓰는 동안만큼은. 홀로 찾은 여행지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오색연필로 그려진 누군가의 방명록을, 여행객의 발자취를 보는 듯한 느낌. 이 어여쁜 얼굴을 한 노트에는 나와 그대들의 자취가 모이어 오래 남아, 매끈한 마감칠이 된 용수철로 한 데 묶인다.

 

 

나는 지금 속초에 와 있어, 글을 마무리하기 위해. 첫 짐을 풀고 게스트하우스 라운지로 내려왔지, 거기 조용하게 놓인 방명록이 눈에 걸려서 맨 먼저 들춰보았다. 가만히 보고 있자면 나는 그대들이 생각나, 나의 아트인사이트. 가끔 글이 막히면 혼자 떠나온 여행이 나는 좋지만, 고독은 터미널 하차지에 이르러 감미로움이 되어 있음이니, 그럼에도 이렇듯 그대들의 상관물을 만나 그대를 떠올리곤, 이내 미소 짓는 일이란. 잠깐 아트인사이트의 아는 얼굴 몇을 떠올린다, 그러면 나는 글을 더 잘 쓰고 싶어져.

 

아트인사이트는 대략 분기에 한 번씩 오프라인 모임을 해. 거기서 알게 된 몇 사람들의 얼굴이 낯선 여기 속초까지 따라와 어른거린다. 재훈이, 윤화, 금미, 정은이, 세나... 이런 이름자 한 번에 얼굴 한 가지씩을 왼다. 그 외에도 아경이, 현정이, 진주, 수영이, 민지, 세희와 같은 이름들을 또 잇따라 생각하지. 비록 우리가 얼굴을 마주한 적이 한 손으로 꼽을 만큼 적어서, 이 마음은 아직 퇴적해두어야 할 때,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대들에 대한 나의 마음 자체가 아니라, 무엇이 이토록 그대들을 생각케 하였는지에 대함이겠지.

 

숙소 근처의 영금정 靈琴亭은 바다 쪽으로 멀리 뻗어낸 돌다리 끝에 댕그라니 매달아둔, 그림 같은 정자이다. 동해의 깊은 물살이 연안과 모래사장에 닿으며 슬며시 스러지는 것에 비하자면은, 바다 가운데서 힘차게 부서지는 포말은 보기에도 참으로 흡족하다. 너끈한 양감으로 밀려오는 바다의 울렁임이 정자 밑동의 암석에 이르러 강하고 연약하게 부서지는 것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포말은 어지러이 비산하고 어여삐 흐트러지는 것이 꼭 영감 같아, 아름답고 혼란스러우며 곧 사라질 듯 희미하고 곧 사라질까 두려운 것. 멍하니 바라보며, 내 안에도 저같이 이지러지는 영감이 차오름을 느껴. 영감이 춤을 추고, 이지를 흐트러뜨리는 영감이 내 안에서 춤을 추고 곧 문장이 될 것들이 범람한다.

 

그 앞을 홀로 일출을 기다리는 동안에 문득, 쓸만한 영감이 가슴을 채울 때면 그대들을 생각해, 말하였듯 나는 그대들을 생각하면 글을 더 잘 쓰고 싶어지고, 글을 몹시 쓰고 싶어질 때에도 그대들은 떠오르니까. 왜일까, 생각하면 그대들이 나의 글을 사랑하였고, 나를 이해한다는 듯이 말해주었기 때문이지. 아이는 100이라는 숫자에 연연함으로 받아쓰기를 연습하는 게 아니라, 너무도 기특하다는 그 눈빛과 쓰다듬에 이끌리는 것이었듯이, 그 소박한 칭찬이 내게는 너무 묵직하고 기꺼웠던 까닭인 듯해. 그들은 처음으로 나의 가장 비밀스러운 부분에 대해 읽고, 알고, 이해하는 사람들이었다. 단언컨대 그런 적은 처음이라 나는 몹시 당황했어, 내가 아직 이해받으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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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오며 만나 온 사람들은 나를 잘 이해하지 못했어. 그리고 나는 그들의 나에 대한 몰이해와 더불어, 내가 느껴야 했던 약간의 외로움을 이해하지. 나는 일관되지 않거든, 복잡하고 혼란해 그리고 어딘가 까다롭고 쉬이 피로하며, 지독히도 염세적이야. 이제 나는 그걸 아주 잘 알아, 왜 그러했는지까지도. 다만, 바꾸어내는 것에는 아직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해. 마음에 어리는 한 가지 부정이 한 가지의 사랑스러움으로 변모되기 위해서는 그저 끌어안는 방법으로는 할 수 없지, 그건 분명 상냥함이나 한편으로는 자신의 참뜻을 소외시키는 방법이기에,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돌아오는 마련이더라고. 오직 그것을 속들이 이해하여 자기 자신으로서 느끼는 방법으로만이 온전하리라고, 나는 믿고 있어.

 

아트인사이트에서는 '무애 無碍'라는 연작 에세이를 쓰고 있어, 원효의 '무애가 無碍歌'에서 차용한 단어이지. 1편이 나온 지는 2년이 조금 안 되었구나. 무애, 그것은 마음에 거리낌이 없다는 뜻이야, 거리낌이란 일상 속의 작은 망설임이라기보단, 마음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온 장애들을 총칭한다지. 이건 내 궁극적인 목표야, 무애, 마음에 티 없는, 애써 감추어낼 그 무엇도 없는 자유로움, 그리고 사랑스러움으로 이어지는.

 

내 안에는 마음을 붙잡는 장애들이 많아, 내가 이렇듯 무애를 생각하고 동경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을지도 모르겠어. 그러나 나는 모든 장애와 이별하는 방식보단, 그것을 모조리 이해하여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자유로움을 구한다. 무애란 잊거나 이별하는 것도 극복하거나 극기하는 것도 아니, 모조리 이해함으로써 모조리 집어삼키는 마음이자, 거기서부터 떠오는 안식의 연화 蓮花. 나는 모조리 끌어안고 갈 거야, 염세와 회의, 어느 하나 두고 오는 마음 없이.

 

****

 

무애란 나를 이해하기 위한 아주 긴 여정, 그 자취인 동시에 그 여정의 끝에 놓일 비석이다. 상념 속에 맺히온 나의 정수들을 말로써 끄집어내는 건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더군. 8년은 방황했고 7년을 침잠하였다. 그 간 맺고 쌓아둔 열매 같은 문장들이 많아, 나는 오리고 붙이며 기쁘고 어렵게 헤매는 중이야. 이 글은 아직도 뻗어나고 있다, 나를 이해하기 위한 여정이 아직 길이 남은 것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꼼꼼히 이해되고 나서야 누군가에게 충분히 이해받을 수 있는 것이라, 언제나 한 사람의 마음과 사상은 불온한 언어로 하여 네게로 가, 이지러지고 흩어지고 마는 것이었으니, 내가 가야 할 길이 아직 충분히 남아있음을 느껴.

 

게시된 것은 13편까지이고 쌓여 있는 것은 그보다 아득하다. 근 4개월, 그러니까 올여름을 꼬박 14편에 매여 있었어, 그 챕터는 사랑스러움의 반대편, 사랑스럽지 않음과 추함에 대함, 아주 중요한 분기점이면서도 일컫기에 송구스럽고 조심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에. 언어를 계속해서 고르고 있어, 누군가에게는 읽기에 너무 고약하거나 고통스러운 반감을 일으킬 것이기에 망설임은 커다랗다, 하지만 사랑스러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랑스럽지 않음에 대해서도 이해해야만 해, 나는 고집을 부리고 있지.

 

무애, 거리낌이 없는 자유로운 마음을 위해 나는, 마음을 마음대로 되지 않게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생각해, 자유를 위해 자유롭지 않은 모든 것들에 대해 생각해, 왜냐하면 이미 마음속에 존재하는 애 碍를 의지만으로 지워낼 수는 없는 법이고, 완전히 안아 들기 위해서는 오직 이해해야만 하며, 이해하기 위해서는 거기 무엇이 있는지를 낱낱이 들여다보아야 하는 것이니까. 무애를 쓴다는 것은, 떠올려 볼 수 있는 온갖 애 碍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같아. 사랑스러움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이 존재를 사랑스럽게 하는지를 안다는 뜻, 그러므로 모든 사랑스럽지 않은 것까지 이해하여 받아들인다는 뜻이거든.

 

어쩜 너무 집요하게 파헤치는 나의 글은 읽기에 고통스러워, 나도 알고 있지, 그러나 사랑스러움을 이해하기 위해 사랑스럽지 않은 것마저 이해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안식에 대하여서도, 행복에 대하여서도 그러하기에... 몇몇 주변의 사람들은 나에게 쉬어가라고 말해, 멈추라고도 말해주었어, 왜 그렇게까지 고집스럽고 악착스러운가. 나도 이게 내 욕심임을 알아, 어떤 관점에서는 순응하지 않고 유화되지 않고 버티는 일에 지나지 않음이니.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기 위해, 자신의 참뜻대로 살아가기 위해 버티고 견디는 일은 아집인가 신념인가, 나 또한 그 질문 속을 영원히 헤매는 사람이야. 불신과 믿음 사이에서 줄을 타지.

 

내가 우리가 되기 위하여서는 그저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들과 같이 생각하여야 하는가, 나의 생각은 나의 바깥에서 얼만큼이나 사실될 것인가, 이 모든 것이 오독이자 집착의 허상은 아니었을지. 나는 불신으로 걷는다만, 그럴수록 글은 역설적인 것이 되어 나오지. 나는 갈 수 있을 때까지 걸어볼 거야, 그 사막은 위험하다 내게 말해주던 그 상냥함을 이해해, 그럼에도 나는 오기일지 신념일지 다 알 수 없는, 이 불타는 마음을 오롯이 안고 살아볼 거야. '내 속에서 솟아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살아볼 거야.'

 

 

언젠가 이 글이 끝나는 날이 오면, 그때 나는 완전히 자유로울 거야, 사실 이미 일말의 자유로움이 나를 감돌기 시작하지만, 아직은 나를 그 바람 위로 던져두지 않으려 해. 코끝을 간지럽히는 자유로움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건데, 실은 그대들이 이미 나의 무애야. 23년 3월 어느 날 옥상 서재에서 글을 쓰던 나는 꿀렁-하고 단전으로부터 무언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때 힘든 겨울을 지나보내고 첫 봄바람이 불었던가 그랬다. 그리고 그 순간으로부터, 아주 커다란 변화가 시작됨을 감지했지. 30년의 천성, 15년의 우울과 언제부터일지 모를 경계선 성격장애로 비롯된 것, 질긴 역사의 분노와 우울과 불안감이 끝나리라는 것을 말이야. 대뜸은 우스운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걸 알 수 있어,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았으면서 한순간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한 나의 오기 혹은 신념과 그 내내 벼려온 예리함은 그걸 느껴볼 수도 있는 법이지.

 

나는 옥상에 서 바람을 맞으며 별안간 멍해졌었어, 그대들로부터 나의 무애가 미리 시작되어 버렸다는 것에 나는 기쁘고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아주 어렵게 행하고 스스로 얻으리라고 잔뜩 힘주어 벼루고 있었으나, 결국에 내게 필요한 것은 한 줌의 오롯한 이해였다는 것을, 이토록 소박한 것이었다는 것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기란 주저스러웠던 건지도 모르겠어. 단전에 가두고 밀어 넣어둔 독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요즘 자주 보는 무협지의 설정을 끌어대자면, 산공독 散功毒에 당한 무인 武人의 단전으로부터 평생 쌓은 마공 魔功이 흩어져버리는 것 같다는 실없는 생각에 웃기도 하지. 이런 생각을 그냥 두는 것도, 실없이 웃는 것도 내겐 놀라운 변화야. 보이지 않는, 아주 놀라운 변화이지. 그러나 그래서 무애는 더욱 어려운 것이 되어 있어.

 

내가 살아온 모든 애 碍, 마음의 장애들이 망각의 축복 속으로 흩어지기 전에 붙잡아야 한다는, 기쁜 초조함 속에 살아가고 있어. 하지만 어려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이미 해, 벌써 많은 표독들이 흩어지고 있거든. 평온해, 꿈꿔온 평온함을 느껴, 하지만 아직 다 쓰지 못한 게 있는데, 벌써 누워 잠들면 안 되는데... 이게 얼마나 기쁜 초조함인지, 행복한 양가감인지...

 

이 원고에 마침표를 찍고선 한 일 년은 글을 쉬고 싶어, 왜냐하면 이것은 기억을 들추어내고 감정을 되살려, 쥐어짜 내는 글이었기에. 일단 모든 것을 게워낸 다음, 퇴비처럼 곱게 삭혀 출간 준비를 하여야지. 13편까지 2년이 조금 안 걸렸으니, 나머지 부분도 2년 정도로 가늠하면 되겠지, 그리고 1년을 푹 쉬고, 다음 1년간 써낸 것을 다듬으며 책으로 엮어서 낼 거야. 표지는 하얗고 우둘투둘한 종이로 하고, 좌상귀에는 음각으로 무애 無碍 라고 써둘 거야, 속지는 미색 모조지로 해야지. 여정의 비석을 세워놓고 나는 비로소 마음껏 떠나올 수 있을 테지, 그런 다음부터는 아름답고 어여쁜 것들만을 써야지. 행복한 것들을 써야지...

 

 

그러니 조금만 더 고독 속에 날 두어야겠어. 그러나 언젠가는, 언젠가는 반드시 그리운 그대들에게로 갈 거야. 아직은 자유롭고 명랑한 그대들에게로 다가가지 않으련다. 저기 캠프파이어 주변으로, 불을 향하여 모여있는 그 축제의 원형 바깥에서, 그대들의 뒷모습과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어. 그러나 그대에게는 혹여 쓸쓸함으로 비추어질 것이 도리어 나에겐 즐거움이리라는 것을 이해해주어, 나는 점차 가까워지고 있음이니, 이곳은 내게 바깥도 멂도 아니라, 여지껏 가본 곳 중 최선의 가까움이라는 것을.

 

조금만 더 고독 속에 날 두어야겠어. 내게는 사랑과 염세가 가득하니까. 넘치는 사랑만큼이나 넘치는 부정. 내가 이것을 모조리 안아 들 때까지, 그러기 위하여 모조리 이해하고 속들이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그리하여 한때 이해치 못해 쉽사리 부정되던 것이 이해하고 몸소 느낌으로써 정다움이자 무색한 덤덤함이 되어버릴 때까지, 나는 여기 머물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대들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지지부진하게 갈 거고, 사막을 걷는 듯이 오래갈 것이며, 차곡차곡 단단히 갈 거야. 내가 글을 써 나아가는 것이 아트인사이트에 동행하는 것과 같은 뜻이라면, 나의 글과 발자취가 마치는 때까지 나의 있을 곳이 되어주었으면. 그리고 마침내 내가 모든 표독한 기억들을 과거에 두고 분연히 떠나와, 행복한 글을 쓰기 시작하는 것을 지켜봐 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올해를 기점으로 너무도 많은 것이 변하고 있어, 비록 쓰던 글은 더욱 어려운 것이 되어 있지만, 오래도록 바라던 것들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열사 熱沙의 땅에서는 상 狀들이 굴곡되어, 볼 수 없는 곳으로부터 미리 볼 수 있다고 하더라지, 지평 너머 신기루. 내게도 보이기 시작한다, 안식이... 오래된 기도의 끝, 영원한 가을바람이 부는 곳, 기다리는 안식의 대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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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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