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알파벳 네 글자 [사람]

볼 빨간 사춘기
글 입력 2023.12.09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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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일지를 처음 읽을 때부터 감이 왔다. 이 학생을 감당하기 쉽지 않겠구나.

 

그를 경험해본 선생님들이 남긴 기록은 가히 화려하다.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감정 기복 등 ADHD로 짐작이 된다며 선생님들의 한숨과 눈물이 보인다. 이들의 토로가 곧 내 미래가 될 것을 예견하고 기다린다.

 

“헬로오 선생니임!!!!” 첫 등장부터 심상치 않다. 그가 너임을 단번에 알아본다.

 

“반가워, I have been waiting for you.” 고될 내 미래를 향해 손을 내민다.

 

역시나 쉽지 않다. 개성이 강한 그와 주변 학생들을 몇 시간 가르치다 보면 내 혼이 내 것이 아닌 지경에 이른다. 이왕 이렇게 된 것 그 학생의 세계에 빠져봐야겠다. 중얼중얼 거리는 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아프리카 악기부터 각종 기계까지 뭔가를 말하고 그린다. 그의 줄기찬 답변이 이해되지 않는다며 학생들이 찡그리거나 서로 (비)웃는다.

 

‘엇! 정상인 척 보여내는 우리가 비정상인 척 엿보이는 그를 이해 못하는 것일지도? 분야를 잘 찾으면 숨은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아.’

 

슬며시 그의 필통과 공책을 관찰한다. 낙서라고 하기엔 수준급의 그림 실력.

 

“이건 무슨 자동차야?”

“어쩌고저쩌고, 이래서저래서, 이러쿵저러쿵 (...)”

영어보다 한국어가 어렵게 느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렇구나, 자동차 그리기 좋아하는구나. 덕분에 새로운 걸 알았네!”

 

학생의 볼이 발그레 물든다.

 


장수탕 선녀.jpg

 

 

시간 맞춰 또 다른 클래스로 입장한다. 수업 마치기 직전 중심 내용을 복습하려는 그때 한 학생이 질문한다.


“선생님, 오늘 MBTI 알려주기로 하셨잖아요. 알려주셔야죠.”

will be able to 숙제 검사 시 눈 동그래졌던 그 친구이다.

 

“그걸 기억하고 있었어? 수업에 관련된 내용이 아니니까 패스하자.”


학생들이 웅성댄다.

“이게 어떻게 수업 내용이 아니에요? 쌤의 MBTI잖아요!”

“MBTI도 영어입니다만”

“약속 어기기 없어요 선생님~”

 

둘러댈 말이 없어 되묻는다. “맞춰봐, 내 것.”

 

“ESTJ입니다!”(몇몇 학생들은 나를 엄격한 관리자로 느끼는구나)

“야, 아까 나한테 감기 괜찮냐고 물어보신 것 못 들었어? 어떻게 쌤을 T발 C라고 말할 수 있어? 쌤은 F야!” (괜찮냐고 물어보면 다 F인가, T는 나쁘고 F는 좋은 건가, 이건 무슨 논리지)

“아냐, 쌤은 E아니고 I야! 우리한테 큰소리 안 치시잖아!” (이건 또 무슨 논리지)

 

“얘들아, 됐고. 나는 _ _ _ _ 래. 나도 안 믿겨. 몰라.”

 

또 웅성댄다. 그 순간 스쳐 가는 말.

“쌤 MBTI 알아요! 쌤은 C (...) ” (C로 시작하는 MBTI가 있나, 새로 나온 이론이 있나)

 

“다시 말해봐 멀어서 안 들려.”

 

학생들이 합심해서 말을 전달해준다.

“C -- U -- T -- E”

 

“풉. 네가 더 귀엽고 사랑스러워.”

 

집에 가는 내내 알파벳 네 글자가 머릿속에 떠다닌다. 장수탕 선녀님처럼 나대는 콧구멍과 우산을 부여잡고 실실 웃는다.

 

네 이름 앞에 ADHD와 MBTI가 아닌 너만의 수식어가 붙길. 네 각자의 세계가 긍정적으로 확장되길. 내 도움 없이 영어를 배우고 즐기는 법을 익히길. 그리하여 내가 필요 없어지길..

 

기도한다는 걸 너희는 알까.

 

 

 

김윤 에디터 명함.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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