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오천 년 동안 이 자리를 지켜온 우리의 터 [음악]

저 산맥은 말도 없이 오천 년을 살았네, 모진 바람을 다 이기고 이 터를 지켜 왔네.
글 입력 2023.11.13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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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피아노 학원 선생님은 하농, 체르니와 같은 기본 테크닉을 길러주는 책들을 교재로 사용하면서도, 아이들이 피아노에 흥미를 느낄 수 있게 우리가 알 만한 곡들을 담아 놓은 명곡집을 함께 활용했다.

 

내 기억 속 “터”는 노란색 피아노 집 중간쯤 실려있던 노래다. 1987년에 발매된 신형원 2집에 수록된 “터”. 제일 흔한 4분의 4박자의 곡에, 신나게 반복되는 같은 패턴의 왼손 팔분음표 반주. 악보를 보는 법을 익히고, 이제 제법 웬만한 곡은 칠 수 있게 된 어린아이의 자신감을 북돋아 주기 딱 좋은 곡이었다.

 

가사의 의미를 다 이해하기엔 어린 나이였지만, 피아노 의자에 앉아 딱 그 나이대 아이답게 한 자 한 자 힘을 실어 목청껏 부르면서도, 왠지 모를 구슬픈 느낌에 스쳐 가는 쓸쓸함을 지울 순 없었다. 하루하루 커 나가면서 나는 집 근처의 작은 공원을 산책하는 것을 좋아했다. 엄청나게 큰 규모의 공간은 아니지만, 우스갯소리로 이 공원이 없었다면, 동네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싶을 만큼 모두가 사랑하는 공원이었다.

 

무더운 여름밤이면 저녁 밥을 먹고 소화할 겸 걷는 사람들로 산책로가 북적였고, 추운 겨울날에도 두터운 외투와 함께라면 그 어떤 바람도 우리들의 열정을 막을 순 없었다. 공원을 걷다 보면 문득 내가 밟고 있는 땅에 담긴 무수한 세월과 수많은 사람과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바람이 차가워지기 시작하는 가을 산책 중 유독 이 노래가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저 산맥은 말도 없이 오천 년을 살았네

모진 바람을 다 이기고 이 터를 지켜왔네

저 강물은 말도 없이 오천 년을 흘렀네

온갖 슬픔을 다 이기고 이 터를 지켜왔네

설악산을 휘휘 돌아 동해로 접어드니

아름다운 이 강산은 동방의 하얀나라

동해바다 큰 태양은 우리의 희망이라

이 내 몸이 태어난 나라 온 누리에 빛나라

자유와 평화는 우리 모두의 손으로

역사의 숨소리 그날은 오리라

그날이 오면은 모두 기뻐하리라

우리의 숨소리로 이 터를 지켜나가자

 

- 신형원의 터 中

  

이 노래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는 묵묵히 오천 년 동안, 이 터를 지켜온 산맥과 강물에 대한 고마움으로 시작한다. 사실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 온 국민들, 선조들에게 표하는 감사함이라 할 수도 있겠다.

 

예로부터 강대국들에 둘러싸여 전략적 요충지였던 한반도는 그들의 패권 확장을 위한 길목으로 호시탐탐 노려졌다. 오천 년의 시간 속에서 나라를 빼앗겼던 적도 있다. 나라를 빼앗긴 슬픔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그 아픔을 상상하다 보면, 더욱 마음이 시큰해지곤 한다. 뒤이어 화자는 국토의 아름다움을 예찬하고, 그날을 기다리며 명예롭고 아픈 역사를 가진 이 국토를 지켜 나가자고 다짐한다.

 

한라산에 올라서서 백두산을 바라보며

머나먼 고향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하구나

백두산에 호랑이야 지금도 살아있느냐

살아있으면 한 번쯤은 어흥 하고 소리쳐 봐라

얼어붙은 압록강아 한강으로 흘러라

같이 만나서 큰 바다로 흘러가야 옳지 않겠나

태극기의 펄럭임과 민족의 커다란 꿈

통일이여 어서 오너라 모두가 기다리네

불러라 불러라 우리의 노래를

그날이 오도록 모두 함께 부르자

무궁화 꽃내음 삼천리에 펴져라

그날은 오리라 그날은 꼭 오리라 

 

- 신형원의 터 中

 

후반부는 그날이 의미하는 바를 더욱 직접적으로 묘사한다. 화자는 한라산에 올라서서 지금은 갈 수 없는 백두산을 바라보고, 백두산의 호랑이를 불러본다. 얼어붙은 압록강에 한강으로 흘러서 같이 큰 바다로 흘러가자고 부탁한다. 분단으로 인해 갈라질 수밖에 없었던 한 민족에 대한 슬픔이 묻어나지만, 그날은 꼭 오리라는 희망과 함께 곡은 맺어진다.

 

어떤 면에서는 갈라져 있던 간극이 당장 그 날을 바라기에는 너무 크게 느껴진다. 인식의 변화도 있다. 2022년 초 중고 734개교 70,869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통일이 필요 없거나 관심 없다고 답한 비율이 무려 42%나 차지하니 말이다. 통일이 필요하다면, 갈 길이 매우 멀지만,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큰 틀을 잘 잡아놔야 하겠다.

 

비단 이 곡을 통일에 국한되어 생각할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어느 정도의 갈등은 앞으로의 발전을 위해 필연적이지만, 요즈음 혐오와 분노에 사로잡혀 상대를 헐뜯으며, 편을 갈라 싸우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남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우리 선조들이 지켜온 아름다운 우리의 터와 역사를 생각하며 우리가 만들어 갈 미래 또한 앞으로 찾아올 그날이 아닐까.

 

 

 

 

좋은 가사를 알아보는 눈은 다들 똑같았던지, “터”의 작사, 작곡가인 한돌은 이 곡으로 1989년 KBS 가요대상 작사 상을 받았다. 신기한 것은 같은 이야기라도 들려주는 사람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는 것이다. 시원시원한 신형원의 목소리 자체가 주는 힘에 실린 이야기들은 결연함과 비장함이 묻어난다.

 

 

 

 

곡의 창작자인 한돌의 이야기는 또 다른 감동을 준다. 또박또박 투박한 듯 자연스러운 그의 이야기는 마음속에 콕콕 박힌다. 이렇게 누가 부르냐에 따라 느껴지는 것이 미묘하게 다르지만, 이 노래를 부를 때의 마음은 다들 똑같지 않나 싶다.

 

노을 지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오랜만에 이 노래를 다시 불러보고 싶다. 첫 소절에는 평화롭게 일상을 향유할 수 있음에 감사함을 담아, 다음 가락에는 모두가 행복했으면 하는 염원을 담아, 그렇게 작은 마음 하나하나 담아 빨갛게 타오르는 석양 너머로 읊조려 본다.

 

“저 산맥은 말도 없이 오천 년을 살았네. 모진 바람을 다 이기고 이 터를 지켜왔네”

 

 

[원정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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