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끝과 미래, 글과 이미지 0-4

글 입력 2023.10.19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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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2023년 9월 17일. 아침엔 하늘이 흐리고 먹구름이 끼었다. 습한 공기가 올라오고 이내 비가 부슬부슬 내렸었다. 한 시간 정도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다. 역사를 빠져나오려고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이동하는데 바닥에 아주 센 빛이 드리우고 있었다. 빛이다. 따뜻함이다. 무언갈 기대했고 마침내 출구를 빠져나오니 세상이 밝았다. 하지만 그 빛은 아직 물기를 다 빼지 못한 기운을 간직한 채였다. 눈부셨지만, 과거를 씻기는 아주 깨끗한 빛과는 다른 감정이 들게 하는 풍경이었다. 지난 시간을 기억나게 했다. 잊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뉘앙스로. 이게 정직한 거지. 나는 옛날을 완전히 잊어버릴 수 없고 아예 깨끗해질 수 없다. 항상 여기서 시작한다.


나는 미래를 믿지 않았다. 정확히는 믿고 싶지 않았다. 미래를 생각한다는 건 희망을 품는다는 것이고 희망이란, 빛이 비치듯 항상 밝고 행복한 것이어야 하니까. 나는 그곳을 바라보는 일이 힘들었다. 눈부시고 사랑받을 수 있고 축복받을 만한 일들이 나에게 일어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일은 자신을 속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 걸 좇는 사람들이 순수하기보다 오만해 보였다. 어떻게 자신들에게 ‘그것'이 올 거라 생각하는거지.


하지만 단순한 면도 있다.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는 것처럼 삶이 움직이는 방식도 그냥 그런 거라는 사실을 이해하면 되었다. 미래를 생각한다는 건 나의 몸을 여기에서 저기로 옮기는 일 같은 거였다. 사람들은 그저 이동하고 싶을 뿐이라는 것을, 그냥 어딘가에 다가가서 다다르고 싶을 뿐인 마음을 희망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을. 그러니 희망을 품는 마음에는 어떤 계산도 오만도 순수도 확신도 필요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1. 

 

윗글을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렸을 때 누군가 보낸 디엠을 받았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내 기억엔 꽤 오랫동안 ‘인친'이었던 사람. 그도 요즘 미래에 관해 생각했었다고, 그러나 그려지는 색채는 대부분 어두웠고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서 자라나는 희망이란 것이 방어기제가 아닐까, 생각했다며. 나는 그 말의 의미를 한 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밝은 날은 흐린 날의 반대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오늘은 그렇지가 않은 거예요. 분명 공기는 젖어 있는데 해는 눈부시게 뜨거웠어요. 맑음과 흐림의 경계였고, 상반된 것들이 공존하고 있었어요. 그런 날씨가 과거를 어느 정도 품고 있는 현재 같아서 정직해 보였고. 정직하게 흘러가는 삶과 시간에 관해 생각했어요. 그리고 몇 년 전에 쓴 계획서 같은 걸 볼 일이 있었는데, 미래를 상상해야 했던 과거의 나를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때도 ‘이런 게 무슨 소용이 있나’ 하며 적었던 기억이 생생했고. 그런데, 결국 삶이 저를 속이지 않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는 걸 알았어요. 이제는 미래를 전보다는 더 안전하게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고. 안전하다는 의미는 조금 덜 두려워한다는 뜻.


왜냐하면 Y님, 시간이 지나면 소멸하고 말 것들 ‘이면에’ 영원히 존재할지도 모를 무엇이 있는 게 아니라 그 둘은 같이 있어요. 어느 순간엔 겹쳐 있고 우리는 둘 다를 경험할 수 있어요. 그러니 두려움 없이 미래를 그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 미래는 둘 다를 똑같이, 공평하고 정직하게 보여줄 뿐이라는 걸 기억만 하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삶은 정확히 보여줄 거고, 결국 날 이해시킬거예요. 어떤 시기를 겪고 지나가는 이유같은 것들을 결국에는, 어떤 방법으로든.”


내용의 80프로 정도는 쓰기 전 이미 정리된 생각이었지만, ‘삶이 날 이해시킬 것이다'는 표현은 글을 쓰면서 튀어나왔다. 이게 무슨 말이지. 글은 앞 문장이 다음 문장을 불러오는 식으로 써지기 때문에 이런 순간이 글을 쓰다 보면 종종 있다. 무의식이 적절하게 뱉은 것 같은 결과물을 곱씹었다. 뭐지, 이 말을 나는 정말 믿어서 썼나 아니면 이제 이 말이 스스로 일하기 시작할 건가. 책임질 수 없는 말 같아 걱정이 스며들었다. 이렇게 말했다는 것을, 훗날 오만이라고 여기게 될까?


오만이라고 여기게 될까, 아니면 이 오만이 될 수도 있는 믿음에 다른 이름을 붙여줄 수도 있을까. 적어도 나의 현재는 과거의 어리둥절한 나를 미래의 위치에서 삶의 명암을 이해하도록 돕는다면, 미래도 가능하지 않을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므로 길게 작성한 디엠을 용기 내어 보냈다.



2.


물기를 가득 머금은 뜨거운 햇살이 비치는 하늘을 본 ‘그날’, 집에 와서 열어본 계획서는 5년 전 작성한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신청서였다. 앞으로 5년 계획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돌아보고 싶었던, 5년을 지나온 시간의 처음.


파일을 열기도 전에 그 신청서를 내가 어떤 마음으로 썼었는지 갑자기 떠올랐다. 나는 당시 아무것도 믿지 않았지만, 그걸 쓸 수밖에 없었다. 믿고 싶지 않더라도 믿어야 다음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이성적인 판단 혹은 생존본능이었다. 그래서 그 신청서에는 진심이 담겨있기도 하지만 나만 알아챌 수 있는, 쓰다가 맥이 빠져버린 문단도 있다.


가령 2018-2023년, 5년간 계획을 쓰는 칸.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단 세 줄로만 적혀 있다. 여기다, 나의 빈 공간. 믿고 싶어서 쓰기 시작했지만 솔직하고 싶어서 끝내 채울 수 없었던 나의 미래.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모든 것이 5년 전 ‘한꺼번에' 시작되었다. 작업을 하기로 한 결정, 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는 과정, 불필요한 방해 요소들과의 이별, 새로운 이동을 위한 준비. 말인즉슨 5년 후의 미래는 이 결정과 과정, 이별과 준비의 결과로 채워지지 않을까.


그동안 하고 싶은 걸 많이 했다. 글을 많이 썼고, 그림을 많이 그렸고, 책과 영화도 만들었다. 작품의 완성과 발표 자체도 중요한 성과겠지만, 삶에 어떤 형태로든 이런 작업이 모습을 드러내도록 하는 일이 ‘내가’ 살아갈 힘이라는 걸 인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에는 비견할 수 없다. 어려움은 있겠지, 항상 있겠지, 그리고 해결책도 있겠지. ‘있겠지, 있겠지' 하며 되뇌기. 그것들은 모두 함께 존재함을 기억하기. 항상 건너가고 있는 상태임을.


‘미래가 날 이해시킬 것이다'라는 문장은 문득 튀어나왔으나 지나간 시간이 내게 조금이라도 준 믿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믿음.. 믿음이란 단어는 쓸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쓰리다. 그러나 이 글에서 많이도 썼다. 이런 단어는 없었으면 좋겠다, 이 단어 대신 쓸 말이 있다면.

 

 

3.


대체할 말이 없으니, 대신 이미지를 선택하기로 한다.


최근에 <이 영화의 끝에서>라는 영화를 보며, ‘미래'의 의미를 ‘끝'이란 개념에 더 맞닿게 생각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간 열심히 살게 될수록, 나는 이 삶의 끝에 대해 염려해 왔다는 것을.


4부로 구성된 러닝타임 175분인 이 영화에서* 3부가 끝을 향해 달려갈 때, 영화는 주인공의 산행길(창작하는 삶의 기로에 선 듯한 길)에 선 한 나무를 스크린에 비춘다. 잎이 없이 가지만 마른 꼿꼿한 ‘그 나무’를 보자마자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희생>에 나오는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나무의 이미지가 떠오르며 상이 겹쳤다. 겹치며, ‘그렇구나, 이게 끝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이 영화의 끝에서> 주인공은 영화감독이며, 영화 제작이 계속 엎어지는 상황에서 그로 인한 절망과 고통이 영화의 제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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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희생>


 

삶의 끝을 염려하는 마음은 두려움보단 자조하며 해탈한 상태에 가까웠다. 구체적으로 ‘이러다 40대에 망하는 거 아닐까'하는 현실적인 걱정인 것. 망하고 싶지 않아서 현재에서 최선의 결정을 내리지만 이 최선의 최선도 밝지 않으리라는 걸 직관적으로 느끼고 있는 상태를 감각하며 살기.


여기가 생각을 글로 쓰며 아쉬운 지점이다. 겨우 작업하고 겨우 살아가는 이 삶의 끝이 어떨까 몇 번 생각한 결과나, 희망은 무조건 약속된 미래가 아니라는 걸 순순히 받아들이게 된 과정을 글로 정리하면 어떻게 써도 위 문단처럼 하나의 흐름을 갖게 되어버린다. 의도와 달리 비관 아니면 낙관 둘 중 하나의 색이라도 묘하게 갖게 되는 것. 머릿속에서 말로 정리하는 생각의 흐름도 마찬가지.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종착지가 있는 것처럼 달려가게 된다. 그래서 다들 생각이 위험하다고 하는 건가, 아무튼 이럴 때 이미지가 필요하다.


<이 영화의 끝에서>라는 제목 때문이기도 했고, 주인공이 겪는 일이 일반 예술인의 현실이기도 했기 때문에 나는 <희생>의 나무와 <이 영화의 끝에서>의 나무를 동시에 떠올리는 방식으로 끝과 미래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 이미지를 내 안에서 번지게 하며, ‘끝, 미래, 죽음, 희망, 희생, 예술’이란 단어가 갖는 의미의 교집합이 생각보다 크지 않을까 짐작했다. 이건, 하나의 영화로는 안 될 일이었다. <희생>은 몇 년전 여러 번 본 영화이지만,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리하여 내가 몇 번 불안하게 상상했던, 겨우 살아가는 이 삶의 끝을 영화의 이미지에 대입하여 이해하니 비관도 낙관도 아닌 그 자체의 이미지 안에서 머물 수 있게 되었다. 이미지로 생각하는 방식은 글보다 이런 면에서 거부감이 덜하다.


‘그 나무’는 이 삶의 끝이다. 다시 말해볼까, 나의 끝은 그냥 ‘그 나무'이다. 무엇을 가득 담았다가 모두 비워냈을, 그 ‘무엇'은 손에 쥐기 전까지 정체를 알 수 없을, 거쳐온 풍요와 빈곤의 리듬을 따지자면 경우의 수가 아주 무한할, 그러나 끝은 하나인. 이 이상 쓰기 어렵다. 어려운 이유는, 이미지는 보는 것 외에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요즘 나의 관심은 무엇을 보는 순간 느껴지는 모든 것-말로 설명할 수 없는-에 잠겨 있는 행위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순환을 보는 것. 부러 의뭉스럽게 만들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대로 바라보는 시선만이 의미를 흐트러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이 ‘흐트러트리지 않음’은 결국 다른 의미-내가 필요로 했던-의 창조로 이어질 것이다. 생각해 보면 자주 그래왔다. 말을 멈춘 순간 어딘가 잠겨 있으면 암막을 뚫고 솟아 나오는 얇지만 날카롭고 선명한 바늘이 보인다. 그 끝을 잡아 이해의 정곡을 찌른다. 그걸 계속하고 반복한다. 이해와 창작이 연결돼 있다. 살면서 눈 앞에 놓인 걸 똑바로 보는 것,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가. 글과 이미지는 서로를 보조하지 않는다. 그저 각자 할 일을 해낸다. 이 명제는 그림책 인터뷰를 하거나 책을 만드는 동기 중 하나이다. 내게 예술은 글과 이미지다. 이 둘에 관해 생각하거나 경험하는 것이다. 글과 그림의 관계가 빚는 효과. 궁극적으론 이에 관한 체험이 삶으로 환원되기를 원한다. 첫 번째는 작품 활동, 두 번째는 생각을 끌어내는 대화. 이걸 계속 하기.


 

4.


나에겐 죽었지만, 별처럼 존재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내 생애에 물질적으로 사라졌으나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이 아이러니를 이해하는 데 아주 많은 시간을 썼지만 부족하다.


위 문장을 쓰고 죽음과 슬픔이 또 낭만적으로 표현돼 버린 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그러게, 사람이 왜 별이 되어야 하나, 별처럼 말고 내 곁에 존재했어야지 이런 시를 쓸 필요도 없게. 라는 생각도 가끔 치밀어오르지만, 이런 불만과 상관없이 내 삶은 그 별과 함께 펼쳐져 왔다는 걸 이해할 수 있을 뿐이겠지. 예술은 이런 이해의 형태일 것이라 짐작해 본다. 처음엔 ‘하고 싶어'라며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오다가 이제는 ‘해야 해'라며 태도를 바꿔 내 앞에 확실히 서 있는, 삶의 방식이 된 얼굴들. 가늠할 수 없었던 변화들.


지금은 당연한 것 같으나 이전엔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내게 벌어지고 있음을 잊지 않으려 한다. 그에 대한 감사함을.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해야 할 것은 나의 삶이고 예술은 나의 삶에 관해 생각하는 일이다. 이건 특별하지도 일상적인 일도 아니라고 쓰고, 쓸 수 없는 나머지는 언젠가 어디에선가 다른 형태로 드러나도록 기다리기로 한다. 앞으로도 나는 내가 쓰는 글과 그리는 그림을 더 믿기로 한다. 계속 하기로 한다. 지지 않는 별이 있으니, 끝까지 가능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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