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굳이’ 예술을 하는 사람들을 응원하며

그리고 할리우드 작가 조합의 승리를 축하하며
글 입력 2023.10.12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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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집>에는 '왜 굳이 결말을 바꾸냐'는 주변의 물음에도 꿋꿋이 영화를 다시 촬영하는 감독이 나온다.

 

 

 

그 감독이 ‘굳이’ 영화를 찍는 이유


 

<거미집>은 완성된 영화의 결말을 ‘굳이’ 바꾸려는 감독 ‘김열’과 영화 크루의 고군분투를 그린 영화다. 1970년대 영화 촬영장에서 일어나는 여러 소동을 제법 있음 직하게 그리는 이 작품은, 충무로에서 활약한 한국 영화계 선배들에 대한 후배들의 동경과 애정을 바탕으로 영화 제작의 고통을 그럴듯하면서도 재미있게 그린 작품이다.

 

검열, 허가 없음, 배우 이탈, 촬영장에서 일어나는 배우와 스태프의 이렇고 저런 ‘미묘한 삼각관계’와 갈등, 열악한 촬영 현장을 모두 딛고, 결국엔 원하던 결말을 손에 넣은 감독. 영화의 마지막에는 텅 빈 촬영장을 바라보는 김열의 알 수 없는 표정을 보여준다. 기어이 결말을 바꾸는 데 성공한 그의 그런 표정은 과연 만족감에서 오는 것일까?

 

왜 김열 감독은 ‘굳이’ (그 모든 멸시와 스승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까지) 영화의 결말을 바꾸는 것일까? 나는 문화예술 자체가 이 '굳이'라는 물음에 답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계기는 할리우드에서 최근에 일어난 어떤 사건이었는데, 그 사건은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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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작가 조합(WGA)은 148일 간의 파업 끝에

영화/TV 제작자 연맹(AMPTP)과 협상을 마무리했다. (사진 출처 - NBC)

 

 

 

우리 예술가들은 ‘효율적인 AI’를 반대한다


 

지난 10일 미국 작가 조합(WGA)이 할리우드 역사상 두 번째로 긴 파업 끝에 영화/TV 제작자 연맹 측과의 협의를 이뤄냈다. 이들은 3년마다 진행되는 표준 근로계약서의 근간이 되는 합의서를 갱신하면서 여러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주요한 내용은 1. 최저임금의 인상, 2. 라이터스 룸(Writer’s Room) 최소 인력 기준 재정비, 3. AI 도입 관련 작가 권리 보장이었다.

 

제작자 연맹은 왜 콘텐츠 제작에 AI를 도입하려 했을까? 나아가 예술계 외의 많은 사업장에서 AI를 이미 도입했거나 도입하려고 하는 이유가 뭘까? 편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작가를 쓰면 오래 걸리고 돈도 많이 드는 대본 작업이 인공지능을 사용하면 순식간에 빠르고 정확하게 완성될 수 있다! 경영진들의 눈에 AI는 더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황금알 낳는 거위로 보였을 것이다.

 

지난 5월부터 시작된 작가 조합의 ‘AI 반대 파업’은 영상 예술가, 소비자뿐만 아니라 예술계 밖 사람들에게도 소문이 났다. 현재 미디어계의 거물이 된 넷플릭스와의 싸움이기에 경제적 영향력을 크게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예술계에서 일어난 갈등이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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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동주>. 이준익 감독은 ‘왜 (굳이) 흑백 영화여야만 했냐’는 질문에

‘흑백 화면이라면 우리의 기억 속 인물을 사실적으로 그릴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해서’라고 답했다.

 

 

 

언제나 ‘굳이’라는 물음과 싸우는 직업


 

예술계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직업 중에서도, AI가 사용되면 가장 먼저 소멸할 것으로 생각되는 한 분야다. 자동차 회사가 자동차를 만들어 파는 대가로 돈을 벌고 식당이 음식을 준비해 내어오는 대가로 돈을 받는다면, 문화예술은 항상 ‘주는 것이 없다’는 항의를 받는다.

 

공연, 영화, 그림, 글. 이것들은 모두 ‘아름다움’, ‘신념’, 혹은 ‘애정’ 등의 추상적인 감정을 위해서, 때로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비판을 위해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조금 서운하게 굴자면, 사람이 사는 데 이런 것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예술을 다른 활동과 구분할 수 있는 지점이다. 예술은 그냥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기어이 해내는 모든 활동이다.

 

예술은 굳이 밥을 먹을 때 반찬의 배치를 정교하게 설계하는 것이고, 여행을 가서 굳이 같은 모양의 돌멩이만 모으는 것이며, 굳이 다른 사람들의 것과 같은 색의 컵을 골라 커피를 마시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지만 꼭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나름대로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의 개인적인 의도가 있다. ‘작가 노트’다.

 

예술가들은 항상 ‘왜 굳이?’라는 질문에 직면하는 것이 일상이다. 그리고 예술가들은 항상 이 ‘굳이?’라는 질문을 마주하고, 그것에 대한 나름의 답변을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 행동을 보았을 때 자신의 의도를 설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을 설득할 필요는 없다. 최소한 자신은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예술 활동’의 시작이자 목표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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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굳이 펜을 들겠다’


 

작가 조합이 제작자 연합에 요구한 내용과 그것을 사수하기 위한 파업은 기본적으로 단편적인 고용 조건과 불합리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예술이라는 활동이 기본적으로 효율성의 법칙을 어기며 존재하는 것이라는 성찰을 바탕으로 한 활동이기도 하다. 예술의 존재 의미에 반하는 AI의 사용을 경계하고, 그것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며 예술인들은 스스로를 증명했다.

 

멀리서 보았을 때 작가 조합의 파업은 AI라는 신기술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들의 무조건적인 변화 반대로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의 목표는 더 나은 수단이 있음에도 굳이 펜을 들어야 하는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 계속해서 예술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AI와 공존하며 다시 펜을 꺼낼 수 있게 되었다. ‘굳이’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다.

 

이 예술가들의 승리를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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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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