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아는 척에서 살아남기

글 입력 2023.10.01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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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고로 진솔해야 하는 법이거늘, 알지도 못하면서 왜 아는 척을 할까. 한 달에 2번 글을 기고하는 컬쳐리스트인 나의 글을 읽는 첫 번째 독자인 나의 감상평은 항상 같다. 글을 등록하고 출력 대기에서 출력 중으로 바뀔 때까지 글을 읽으면서도 계속해서, ‘아는 척하네?’와 ‘아는 척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몇 명에게나 들킬까’라는 생각을 반복한다. 열 명 중 다섯 명은 눈치채지 않을까? 사실은 나는 빈 깡통이고, 이 글과 주제를 위해 간신히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텍스트들은 간신히 제자리에 정렬해 놓고는 ‘아는 척’한다고. 그러고는 이어 생각하지 않을까. 이 세상에는 쓰레기 같은 글이 너무 많다고. 그런데 나는 ‘못 쓴 글’은 몰라도 ‘쓰레기’는 하고 싶진 않은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아는 척을 더 잘해야 하나?

 

그러나 아무래도 이 문제, 그러니 더 좋은 글을 쓰겠다는 다짐이 아는 척으로 귀결되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나의 관점을 바꿔보는 것은 어떨까? 어떠한 척이라는 어구에서 부정적인 의미를 조금 덜어보자면? 하지만 ‘척’은 무서운 단어였다. 앞에 부정적인 단어를 넣어도, 긍정적인 단어를 넣어도 뒤에 ‘척’만 붙는다면 무조건 나쁜 의미가 되었다. 글을 잘 쓰는 척은 사실을 글 쓰는 능력이 없는데, 있는 것처럼 꾸며 스스로 능력을 부풀리는 나쁜 일이 된다. 글을 못 쓰는 척은 사실은 잘 쓰는데 못 쓰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 이유는 무조건 좋은 쪽은 아닐 것이라는 어렴풋한 서사까지 풀어놓는다. 

 

아무래도 ‘그러니까 저 사람은 사실 글 잘 쓰는데 못 쓰는 척하면서 자기 일 줄이려고 한다’와 같이, 누군가의 입이 누군가의 귀에 아주 가깝게 붙어 속삭이는 소리로 눈알을 살짝 굴리면서 전해지는 이미지까지 손쉽게 떠오른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단어가 존재하다니. 이렇게까지 생각하니 살면서 평생 누군가에게 어떤 척한다는 평가를 듣고 싶지 않아진다. 하지만 두려움에 떨며 노트북을 켜고, 백지의 한글창을 켜서 흰 바탕에 검은 커서가 깜빡깜빡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다시 그 시간이 돌아온다. 아는 척으로 살아남는 시간. 


그 시간을 울며 겨자를 머금은 채로 버텨가다 《책에 대한 책에 대한 책》(2023, 편않)을 만났다. 뉴스레터 〈인스피아〉 발행인 경향신문 김지원 기자가 다치바나 다카시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 되는 100권》에 대하여 글을 썼는데, 일부를 인용한다. 


 

“또한 다치비나 다카시는 아무리 애를 써도 ‘전가통全可通(내용에 통달함)’이 아닌 ‘반가통半可通(내용을 잘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체 하는 것)’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마감에 쫓기는 주간지 기자의 삶에 좌절한다. 다치비나 다카시는 저널리스트의 마감 위주로 굴러가는 능력을 반가통 능력이라고 말한다. 책을 성급하게 읽는 데 익숙해지다 보면 어떤 내용을 깊이 파고들거나 곱씹어 보기 어렵다.”

 

《책에 대한 책에 대한 책》, 61쪽

 


반가통! 잠시 울며 먹던 겨자를 뱉어 두고는 노션을 켰다. 이 부분은 기록해 놓고 나중에 인용해야지. 그래, 아는 척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으면 이를 지칭하는 단어까지 만들 생각을 했을까. 매번 자료조사로 발췌독하거나 통독한 책들이 ‘나중에 다시 읽어볼 책’으로 분류되어 긴 목록을 형성하고 있지만, 그 책들을 다시 찾아보기보다는 새로운 글을 위해 새로운 책에 손을 뻗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게 ‘깊이’라던가 ‘곱씹어 보기’라는 단어는 나의 독서에서 점차 멀어져간다. 

 

그러나 이 위안감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결국에는 반가통이라는 것이다, 아는 척하는 사람. 그러니까 나는 누군가의 입에서 귀로, 혹은 손에서 손으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는’ 바로 그 사람인 것이다. ‘척’이라는 무시무시한 글자가 단어의 뜻으로 모습을 감추니 안도하는 모습이 마치 조삼모사의 유래 속 원숭이들보다 멍청할 뿐이다.

 

다시 기록을 뒤져본다. 내가 사용하는 ‘척’이 붙은 어구는 ‘아는 척’이 일 순위로 많았고, 그다음은 ‘원래 그런 척’이 차지했다. 원래 그렇다는 평이한 문장 뒤에 ‘척’이 붙으면 어떤 의미가 될까?

 

‘원래 그런 척’은 사회에서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고정관념과 편견을 꼬집을 때 주로 사용했고, ‘원래 자연이 그러하다’라는 명제가 가치판단의 근거가 되어 참이라고 여겨지는 자연주의 오류에 대한 설명에서 적어두기도 했지만, 이 어구에서 ‘척’이 긍정적인 칭찬으로 쓰이는 용례를 드디어 하나 찾을 수 있었다. 

 

‘원래 그런 척’의 긍정적 용례는 김보영 작가의 단편집 《다섯 번째 감각》에 찾았다. SF의 특성을 설명할 때 ‘인지적 소외’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한다. 이는 독자를 SF 서사에서 의도적으로 소외시켜 현실과 소설 속 세계 사이의 거리감을 조성하면서 그 낯선 세계에서 현실을 찾아내도록 하며, 낯섦 속의 익숙함으로 우리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얻도록 하는 장치인데, 사실 이건 아주 간단하다. ‘작가가 원래 그런 척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원래 이러한 데(성별이 존재하지 않음, 남성이 존재하지 않음, 거주 구역과 계층이 태생적으로 나누어져 있음, 여러 종족이 함께 거주함, 지구는 이미 멸망해서 인류는 여러 행성에서 나눠 살고 있음, 화성에 거주하고 있음, 가상현실임 등) 너는 몰랐지?”와 같다. 한국에서 ‘원래 그런 척’을 가장 잘하는 작가는 단언컨대 김보영 작가라고 생각한다. 특히 김보영 작가의 단편을 읽을 때면, 그 짧은 분량에서 어떻게 ‘원래 그런 척’과 ‘몰랐지?’를 동시에 해낼 수 있는지 읽을 때마다 ‘정말 나는 몰랐어!’라는 생각밖에 할 수 없다. 그 짜릿함이란 책을 잠시 덮고 현실의 비명을 지르거나,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미쳤다’라는 말을 남발하는 방식으로 표현된다. 


여기서 ‘척’이 긍정적일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확인한다. 척의 긍정적 용법을 가능하게 하려면, 그 결과가 독자가 상상도 못 할 만큼 놀라운 것이어야 한다. 독자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고, 생각해 볼 생각조차 해본 적 없어야 하며, 책을 덮고 벌떡 일어나서 감탄을 입 밖으로 내뱉게 만들어야 한다. 차라리 울며 겨자를 네 번 먹는 편이 더 쉽다.

 

사실 편법이 하나 있다. 아는 척하지 않고, 울면서 겨자를 네 번 먹지 않아도 되는 법. 그것은 나에 대해서 쓰는 것이다. 내 생각이나 감정, 감상에는 정답이나 오답이 없으니까, ‘나’를 주제로 한 에세이는 아는 척할 수 없는 글이 된다. 그러나 그런 것을 누가 읽고 싶어 할까? 나는 만약 황정은 작가가 자신에 대하여 쓴 산문집을 출간했다고 하면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 구매할 것이다. (황정은 작가의 산문집은 《일기》만으로 부족하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읽고 싶다. 그러나 고작 나의 생각이나 감상, 감정은 아무리 생각해도 독자를 찾을 수가 없다. 나조차도 그다지 관심이 가지 않는다. 게다가 나를 드러내는 글은 몇 치수 작은 옷을 꾸역꾸역 입은 것처럼 불편하다.

 

이런 생각을 하다 우연한 계기로 김연수 작가의 인터뷰를 읽었다. 산문을 안 쓰기로 한 이유를 묻는 임지영 기자의 질문에 김연수 작가는 이렇게 답한다. 


 

"소설이 편하고 에세이가 불편해졌다. 예전에는 그 반대였다. 에세이를 쓴다는 것의 한계를 느꼈다. 예를 들어 (눈앞의 커피를 가리키며) ‘난 이런 커피가 좋아’ 이렇게 분명하게 말을 할 때 진실을 담고 있다고 보기가 어렵다. 좋긴 한데 100% 이런 커피만 좋아하진 않으니까. 에세이는 자기를 드러내는 글쓰기이고, 이런 식으로 분명하게 구분을 하게 된다. 그래서 삶의 진실하고는 좀 멀고 가식적인 느낌이 든다. 강연이 끝나면 했던 말을 곱씹으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출처 : 시사IN, 등단 30년 차 김연수, “이제 겪은 세상을 그대로 타이핑한다”, 2023.08.25.

 


가식적으로 나를 비껴가는 글, 내가 몇 치수 작은 옷을 입은 불편함은 이곳에서 온다. 이것은 아는 척은 아니지만 글 전부가 어떠한 척뿐인 글이 되기 때문이다. 나의 확언이 나를 빗겨나가는 감각은 내게는 아는 척 보다 더한 구역감을 선사한다. 그러나 우습게도 이 글의 카테고리도 에세이가 될 테고, 나는 계속 이러한 글을 기고한다. 


최근이라고 말하기엔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주제넘게도 행복한 삶을 살고 있으리라 생각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고, 사회 초년생들이 자신을 보호해 주지 않는 사회 구조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상동기 범죄에 의해 일상에서 살해당하고, 세상에서 사랑했던 남자친구에 의해서도 죽는다. 기념일에 친구와 놀러 나간 길거리에서도, 학교에서 간 수학여행에서도. 

 

내가 아름다운 작품을 감상하고, 멋진 연극을 관람하고, 가슴을 울리는 소설을 읽고 대단한 감상평을 작성한들, 사람이 죽어가는 이 시대에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무수히 많은 주제에 대해 아는 척을 하고, 예술작품들이 대단한 무언가이며 우리에게 멋진 영감과 시각을 준다 한들, 사람들이 죽어가는 사회에서, 젊은이들이 계속 죽는 시대에 무용할 뿐이다. 무용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눈앞이 뿌옇다. 

 

 

“세상이 바뀌기 직전, 말이 먼저 나온다. '차별 철폐하라'는 말이 있 다음에 차별이 철폐되듯이. 어떻게 생각하면 ‘말만 계속한다고 무슨 변화가 있겠어, 똑같이 나빠질 거야’ 싶지만 그렇더라도 말을 다루는 사람들은 계속 그 말을 해야 한다. 소설가는 ‘이후의 세계를 상정하는 말하기’를 하는 사람이다."


출처 : 시사IN, 등단 30년 차 김연수, “이제 겪은 세상을 그대로 타이핑한다”, 2023.08.25.

 


그런데도 모든 것이 의미가 있고, 무용하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는 근거를 다시 김연수 작가의 인터뷰 속에서 찾는다. 나는 소설가도, 에세이스트도 아니지만, 내가 하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감각 속에서, 내가 쓰는 ‘아는 척뿐인’ 글이더라도 작은 무엇인가라도 되길 바라는 일 정도는 할 수 있다.


이 글의 주제가 ‘아는 척’이 아닌 ‘살아남기’에 초점을 맞추어 마무리되었고, 이 글에 쓰인 모든 문장마저도 가식적으로 나를 비껴가고, 여전히 나는 반가통의 자세로 텍스트를 독해하고, (내가 사랑하는 작가들은 언제나 대단한 소설을 쓸 테지만) 나는 무용함과 유용함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위치하는 쓰레기일 수도 쓰레기가 아닐 수도 있는 글을 쓰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어쩔 수 없다. 관측자의 가설에 따라 입자이기도 파동이기도 한 광전자처럼, 작은 가능성이 존재할 수도 있다고 창작자인 내가 생각하는 이상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것뿐이다. 

 

아는 척으로부터 살아남고 싶었으나, 여전히 아는 척으로 간신히 하루를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으로 한숨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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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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