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여름은 차가워

그리고 겨울은 따뜻해
글 입력 2023.07.14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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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를 스치는 바람이 따가워 외출하는 것을 꺼리던 것도 수 개월, 가슴을 들뜨게 하는 따스함이 찾아와 풀 향기 나는 바깥으로 나를 이끌었다. 선선한 듯, 부드러운 공기를 가득 머금었다가, 크게 한숨을 쉬어본다. 바다 너머로 채 못 건너 간 차가움과 곧 다가 올 뜨거움 사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그 계절이 좋다.


올해는 뭐가 그리 급했는지 온 줄도 모르고 보내 버린 봄이 아쉽다. 지나간 계절을 돌아 보느라 내 옆에 다가와 앉았던 온기를 그저 스쳐 지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를 채운 공기는 무겁고 뜨겁다.

 

사람들은 더울 때 차가운 것을 먹는다. 또는, 아예 뜨거운 것을 삼켜 더움을 잊기도 한다.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는 축축하고 더운 계절의 향기를 털어 낸다. 여름이 불쾌한가? 일단 나로선 이 계절이 기껍지 않다. 겨울이면 추울 때 껴 입으면 된다지만 여름엔 벗는 데 한계가 있으니까.


땀은 흐르면 흐를수록 옷을 적시고 피부를 축축하게 한다. 땀이 스며든 곳은 이내 끈적해진다. 더운 곳에서 버텨낸 성과에 대한 보상은 고작 끈적하고 눅눅한 상태 뿐이다. 2023년의 지금을 살아가는 모든 이가 청춘이다. 여름 아래 그들 모두 당연한 고통스러움을 감내해야만 하는 시기이니까.

 

누구 하나는 죽이고야 말겠다는 듯 위용을 뽐내는 태양 아래 섰을 때, 땀을 뚝뚝 흘리는 이의 팔뚝을 만져 본 적 있는가. 무심코 그 피부에 손을 대 본 이의 감상을 전하자면, 차갑다. 지면에 닿아 있는 것들로부터 전해지는 뾰족한 열기 가운데 무덤덤한 시원함을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해방감이랄까. 조금은 충격적일 정도의.

 

팔에 닿은 손을 통해 전해질 답답함이 만져진 이의 불쾌감을 일으키는 것을 고려할 필요는 없다. 요점은, 여름 아래 존재한 모든 이들의 피부는 차갑다는 것이다.


몸을 달구는 공기와 옷깃을 적시는 끈적함을 이겨낸 이들만이 가지는 차가움이다. 그리고 그 차가움은 나누면 나눌 수록 반이 되다가, 반의 반이 되다가, 반의 반의 반이 되다가, 곧 사라진다. 그 자리에 남는 것은 만진 이의 손이 남긴 단풍잎 모양 뜨거움과 뺏겨 버린 잠깐의 시원함 뿐이다.

 

*

 

여름을 이겨 내려면, 철저히 혼자가 되어야 한다. 혼자서 굳건히 뜨거움을 감내하고 피부 위를 세로 지르는 물방울들을 모른 체 하다 보면, 바람이 불어올 때쯤엔 그 누구보다 먼저, 그 누구보다 진정으로 해방감을 느낄 수 있을 테다. 선선한 바람을 온몸으로 껴 안으며.

 

다만, 조심해야 할 것은 감기다. 뜨겁다가 갑자기 시원해지면, 몸이 당황하여 오만 데 있는 기능들을 분별 없이 조작한다. 그러다 보면 고장이 나는 곳이 생기고 교체해야 할 부품이 나오기 마련이다.


병을 예방하려면, 시원해질 때 후다닥 몸을 덮을 수 있는 겉옷을 준비하는 게 좋다. 그러면 추워지더라도 몸이 날뛰는 일을 막을 수 있게 될 테다.

 

또는, 나보다 뜨거운, 무언가의 품에 쏙 들어가는 것도 좋겠지. 대신, 그 어떤 것은 내가 필요로 할 때, 아니, 필요로 하지 않더라도 항시 곁에 둘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사용기한이 너무 짧아도 좋지 않다. 있다가 없어지는 것은 더 독한 감기를 불러온다.


오래 사용할 수 있도록 틈날 때 마다 들여 봐 주고, 사용하고 나면 그것이 쉴 수 있도록 충전도 해줘야 한다. 남은 날들을 안락하고 행복하게 보내려면 어쩔 수 없다. 여유가 중요하다. 너무 빨리 못 쓰게 될 경우를 방지하려면.

 

하지만 이미 못 쓰게 되었다면, 재빨리 다른 것을 찾아 나서면 된다. 찾아 나서는 과정이 험난할 수도 있겠지만, 따가운 바람과 몸을 얼어붙게 만드는 공기, 이따금 찾아 오는 감기를 헤치고 나아간다면 그 끝엔 분명 새로운 것이 있을 테다. 이전 것보다 못한 것을 마주하게 된다면 조금 아쉬울 수도 있겠지. 오랜 방황 끝에 얻었으니 실망스럽진 않을 것이다. 이젠 망가지지 않게 더 세심히 관리하면 되니까.


이 모든 것이 귀찮다면, 몸을 덮을 담요와 따뜻한 무언가를 준비해서 춥고 외로운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들어가면 된다. 그리고 여름엔 온전히 홀로, 그 무엇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으며 올곧게 버티면 된다.


그것을 고립이라 말하는 이도 있다. 어쩌면, 부딪히지 않기에 살아 남는 나약함이라 비난할 수도 있다.


허나 그것은 오롯한 담금질이다. 그리고 또 다른 여름이 찾아왔을 때, 내 옆에 멈춰선 사람은 안타깝지만, 그가 가진 차가움을 나눠줘야 할 것이다.


당신의 답답함은 내게 중요치 않아. 난 내가 시원한 게 중요해. 그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리는 이도 분명 있겠지. 그래, 더 해라, 하며 팔을 내어주는 이도 있을 테다.


그 때서야 비로소 동등한 승리를 나눠 가지리라 믿는다. 그저 쓰고 버리고, 새 것을 찾는 일로부터 해방된. 우리에게 찾아올 수많은 계절을 그저 두려워하지만은 않을.


올해의 여름은 뜨겁고, 내년의 여름도 어쩌면 뜨거울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의 여름은 차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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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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