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죽었다고 사라지는 건 아니야 [영화]

<걸어도 걸어도>, 상실을 통해 가족을 말하다
글 입력 2023.07.11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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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언제나 조금씩 어긋난다’는 한 문장으로부터 시작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걸어도 걸어도>는 10년 전 바다에 빠진 소년을 구하려다가 세상을 떠난 준페이의 기일을 맞아 고향 집에 모여든 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남겨진 사람들은 죽음과 상실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대하며 끊임없이 미묘하게 어긋난다. 따뜻한 듯하면서도 때로는 너무도 날카로운 진심이 일상적인 풍경 안에서 오고 가며 보이지 않는 가족의 거리를 그려낸다.

 

 


서로 다른 상실의 무게



이날은 준페이의 10번째 기일이다. 준페이는 10년 전 물에 빠진 한 소년 요시오를 구하기 위해 물에 들어갔다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가족들은 그런 그를 기리기 위해 10년째 여름이 되면 고향집에 모여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영화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지극히 평범한 명절의 분위기를 풍긴다. 엄마인 토시코와 딸 지나미는 가족들을 기다리며 집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아들인 료타는 결혼할 상대인 유카리와 그의 아들인 아츠시를 데리고 고향에 내려가면서 하룻밤을 자고 올지, 말지 고민한다. 

 

다 같이 둘러앉아 하하 호호 즐겁게 식사를 하고, 옛날 물건을 꺼내 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니 역시 상실의 아픔도 10년이라는 긴 세월을 견디지는 못하나 보다. 날이 시원해졌으니 이제 산소에 가겠다는 료타의 무덤덤한 말투에서도 그가 이제는 형의 빈자리에 익숙해졌음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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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텔레비전에서 우연히 흘러나온 피서객 사망 뉴스와 준페이 덕분에 살아남은 요시오의 방문을 기점으로 집안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진다. 상냥한 말투와 무거운 침묵 속에 감춰져 있던 날카로운 진심은 공기를 금방 얼어붙게 만든다.

 

요시오가 인사를 전하고 돌아갈 때까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던 료타의 아버지는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지 못해 아르바이트만 하고 있는 뚱뚱한 요시오를 한심하다며 질책한다. “저런 하찮은 놈 때문에 하필 우리 애가. 우리 애 아니라도 되지 않은가? 쓸모없이 덩치나 큰 놈. 저런 놈은 살아 있을 가치가 없어.”

 

료타의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요시오가 집에 그만 와도 되지 않느냐고 넌지시 묻는 료타에게 그의 어머니는 그 어느 때보다도 차분하고 냉랭하게 대꾸한다. 

 

 

료타: 저기... 요시오 군 그만 와도 되지 않아요? 이제 그만 부르자고요.

토시코: 왜 그래야 해?

료타: 왠지 불쌍해서요. 우리 보는 거 괴로워하는 것 같고.

토시코: 그래서 부르는 거야. 겨우 10년 정도로 잊으면 곤란해. 그 아이 때문에 준페이가 죽었으니까.

료타: 요시오가 죽인 건…

토시코: 그게 그거지. 부모가 볼 땐 똑같아. 증오할 상대가 없는 만큼 괴로움은 더한 거야. 그러니 그 아이한테 1년에 한 번쯤 고통을 준다고 해서 벌 받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까 내년, 내후년도 오게 만들 거야.

료타: 그런 생각 하면서 매년 부른 건가요? 너무했네.

토시코: 너무한 거 없어. 그 정도는 보통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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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은 잃었어도 대신 살아남은 아이를 자기 자식처럼 생각하면서 사는 부모들도 있다는데, 준페이의 부모는 준페이 대신에 목숨을 건진 요시오를 한없이 차갑게 대한다. 그들의 진심을 듣게 된 료타는 준페이의 빈자리를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부모가 여전히 상실의 아픔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음을 확인하게 된다. 

 

한 사람을 잃었음에도 그를 잃은 아픔의 크기는 사람마다 다 다르다. 같은 가족이라도 형제를 잃은 아픔과 자식을 잃은 아픔은 비교하기 어렵고, 사람들은 서로 다른 상실의 무게를 짊어진 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지울 수 없는 가족의 이중성



영화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준페이에 대한 가족들의 상실감이지만, 료타를 따라 그의 가족들이 있는 고향집을 방문한 유카리와 아츠시도 각각 남편과 아빠를 잃은 상실의 아픔이 있는 인물들이다. 

 

원래 아츠시에게 죽음이란 단순히 없어지는 것이었다. 읽을 사람도 없는데 죽은 토끼 앞으로 다 같이 편지를 쓰자는 친구의 말이 웃겼다는 아츠시의 말에서 죽음을 일차원적으로 바라보는 그의 시각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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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페이의 산소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가루이자와에서 아빠와 함께 잡았던 노랑나비를 보고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던 아츠시는 늦은 저녁 집에 들어온 나비를 보고서는 준페이가 왔다는 이상한 말을 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죽음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게 된다. 

 

 

아츠시: 할머니 아까 이상했어요

유카리: 할머니 눈에는 그렇게 보였던 거지

아츠시: 이미 없는데도?

유카리: 죽었다고 사라지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아빠도 계셔, 아츠시 네 안에. 아츠시 반쪽은 아빠, 나머지 반쪽은 엄마로 만들어졌거든.

아츠시: 그럼 료짱은?

유카리: 료짱도 이제 들어오겠지. 아주 서서히 말이야.

 


아츠시는 한밤중 마당에 나가 달을 보며 아빠처럼 피아노 조율을 하고 싶다고 기도하다가 그게 안 되면 의사가 되고 싶다고 기도한다.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의사는 좋은 직업이라는 할아버지의 말을 새겨들은 아츠시는 이미 료타를 자신의 아버지로, 료타의 가족을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된 듯하다. 

 

어린 나이에 아빠를 잃었는데도 그 빈자리를 료타에게 내어주는 성숙한 아츠시와 달리 료타의 어머니는 아츠시를 순순히 손자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딸 지나미의 아들딸과 달리 아츠시는 항상 이름 뒤에 ‘군’을 붙여 부르고, 기차역에서 아들 료타의 잠옷을 사면서 손자인 아츠시의 잠옷은 사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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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타의 어머니는 료타가 집에 오기 전부터 자신의 딸에게 료타의 아내가 된 유카리에 대한 악담을 조곤조곤 풀어놓는다. 사별은 죽은 남편과 비교당해서 힘들다며 차라리 싫어서 헤어진 이혼이 낫다고 할 뿐 아니라 “고르다 고른 게 하필이면 중고”라고까지 표현하며 그를 탐탁지 않아 한다. 

 

료타의 어머니는 본인도 소중한 아들을 잃어본 경험이 있지만, 절대 남편과 사별한 유카리의 슬픔을 이해하거나 그를 가족처럼 보듬어주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그를 자기 아들인 료타에게서 떨어뜨려 놓으려 하고 료타의 진짜 가족이 되는 것을 막으려 한다. 

 

1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상실의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해 허우적대고 있으면서도 자기와 같은 상실의 아픔을 지닌 사람들은 하자 있는 존재로 여기고 은근히 배척하는 어머니의 이중적인 태도는 아무리 사랑해도 더는 가까워질 수 없는 가족의 거리로서 묘사된다.

 

 

 

조금 어긋나더라도, 결국엔 가족



이틀 동안 누적된 가족들 사이의 미묘한 엇갈림은 작별 후 료타 부부와 료타의 부모가 하는 말을 통해 전해진다. 료타 가족을 떠나보낸 아버지는 료타가 다음 설에 올 거라고 기대하지만, 료타와 유카리는 힘든 일을 겨우 끝낸 사람들의 표정을 하고 설엔 안 와도 되겠다며 다음번엔 자지 말고 오자는 이야기를 나눈다. 

 

전날부터 계속 떠오르지 않았던 스모 선수의 이름도 왜 꼭 헤어지고 나서야 떠오르는지. 료타와 료타의 어머니는 서로에게 이야기해주지 못한 스모 선수의 이름을 되뇌며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다. “늘 이렇다니까. 꼭 한 발씩 늦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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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시간이 흘러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가족과 함께 고향의 산소를 찾은 료타는 어디선가 나타난 노랑나비를 발견하고 자연스럽게 한 이야기를 떠올린다. 그는 유카리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아이에게 나비에 대한 전설을 이야기해준다.

 

 

료타: 저 노랑나비는 말이지. 겨울이 되어도 안 죽은 하얀 나비가 이듬해 노랑나비가 되어 나타난 거래.

딸: 누가 이야기해줬어요?

료타: 그게 누구였더라?

 

 

료타는 3년 전에 함께 산소에 왔다가 노랑나비를 본 어머니가 이야기를 들려주셨던 일은 잊어버렸지만, 어머니가 들려주신 그 이야기는 한 토씨도 틀리지 않고 기억하여 자기 딸에게 전해준다.

 

어머니가 스치듯 해주신 이야기가 료타의 마음속에 계속해서 떠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처럼, 가족이라는 존재는 이렇게 남는다. 스티커를 붙였다가 뗀 자리에 흔적이 남듯이, 가족은 죽었다고 해서 사라지지도, 지워지지도 않는다.

 

함께 있을 때는 조금씩 어긋나고 엇갈리더라도 시간 지나 돌아보면 그마저도 그립기만 한 가족이라는 아이러니. 그래서 가족을 잃은 마음의 상처는 유독 잘 아물지 않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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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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