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취향은 감정으로부터 온다. [사람]

글 입력 2023.07.08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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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작품에 대하여


  

처음 내가 인상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된 것은 2020년 예술의 전당에서 <모네에서 세잔까지>라는 전시를 본 무더운 여름날 이후였다.

 

그 당시 나는 재수를 하고 있었는데 음울하고 그로테스크한 것에 관심이 있어서 <퀘이 형제: 도미토리움의로의 초대>전을 보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날이 너무 덥기도 하고 잔잔한 것을 보고 싶어서 <모네에서 세잔까지>를 보게 되었다. 딱 들어가자마자 별 기대를 안 했었는데, 어두운 조명 사이로 약간의 먼지, 자스민향과 코로의 <나무 사이의 정화>라는 작품은 아직도 선명히 기억에 남는다.

 

전시에 별 관심이 없던 나에게 그 이후 전시 작품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해주었고, 장 바티스트 카미유 코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가 되었다. 코로의 풍경화들은 아무리 봐도 좋다. 무언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미묘하게 그림 속 모든 것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아서, 그림을 보고 있는 나 또한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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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바티스트 카미유 코로, <님프와 새끼사슴>, 1860-1870년, 캔버스에 오일.

 

 

나는 코로의 풍경화들을 보고 현대의 미세먼지로 가득한 하늘 같은 느낌이 저 당시에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이란 파랗고 분홍빛으로 가득한 솜사탕 같은 게 아니라 회색빛으로 탁하니까. 그렇다면 내가 이렇게 느낀 까닭은 무엇일까?

 

 

Camille_-_Richmond_pres_Londres,_1862.jpg

장 바티스트 카미유 코로, <런던 근교의 리치몬드>, 1872년, 캔버스에 오일.

 

 

놀랍게도 당시 유럽은 산업혁명으로 인해, 증기기관차가 발명되었고, 기차들에서 나오는 매연과 산업화한 도시에서는 자연의 푸르름보다 건조한 회색빛이 만연한 도시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물론 안 그런 시골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말이다. 이렇게 내가 느낀 회색빛 대기는 나름의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자연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리기 위해 순간을 포착했다. 코로는 주로 인상주의의 선구자라고 불렸다. 그러나 코로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미학과는 다른 예술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보다는 자연이 가지는 순박함에 더욱 주목했다. 이는 순간적으로 보이는 대로 그림과 동시에 자신의 주관을 담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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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바티스트 카미유 코로, <쿠브론의 추억>, 1872년, 캔버스에 오일.

 

 

모든 화가의 그림은 주관을 배제한 채 그려질 수 없다. 메를로퐁티에 따르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주체인 나 자신인 동시에 객체이기 때문이다. 주체이자 대상이 합치하는 것은 세상 속에서 독립적인 대상들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지각하는 대상은 보는 사람과 보고 있는 대상이 동시에 함께 공존하는 세상으로 주체와 대상이 함께 태어난다.

 

 

Corot_-_Apple_Trees_in_a_Field,_c._1865–70.jpg

장 바티스트 카미유 코로, <들판의 사과나무>, 1865-1870년, 캔버스에 유채.

 

 

코로의 그림은 마치 시 같다. 그 서정성은, 19세기 가장 많은 작품을 만들어 낸 코로가, 아무리 많은 작품 활동을 했다 하더라도 희석될 수 없는 소중함의 영역이었다. 화가에게는 누구나 습작이나, 비교적 덜 힘이 실린 그림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코로의 그림은 습작이거나, 힘이 덜 실렸다 하더라도 그 느낌이 좋았다. 그래서 신기하기도 했다. 코로는 서정적이고 문학적인 그림을 그렸다. 코로는 실제로 연극, 문학과 성서에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글을 많이 읽는 것보다 글로부터 자신이 느낀 것에 마음을 기울였다. 코로는 많은 시간을 들이고 완성도가 높은 그림만이 잘 그린, 좋은 그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제 저녁에 호텔 방에서 천재적인 풍경 묘사가 장 자크 루소의 글들을 다시 읽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제네바의 호수와 그 아름다운 언덕들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특별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건 단지 경치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감동을 주고 마음을 가라앉히는 더없이 흥미로운 것이다.' 내가 지금 이곳에서 느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이것이 바로 화가가 지녀야 할 마음이 아닐까?

 

상징주의 화가 오딜로 르동은, 쿠르베나 마네와 달리 코로는 '관찰한 사실(observed reality)'의 노예가 되어버리지 않고, '시인이자 철학자'로 자연 앞에 섰던 전인적인 화가라고 평가했다. 이 말을 통해 우리는 코로가 얼마나 서정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 알 수 있다. 우리는 그저 유명한 화가면 유명해진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하기 때문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개인마다 좋아하는 작품은 모두 다를 것이고, 나는 코로의 작품을 좋아한다. 누군가 왜? 라고 묻는다면 그냥! 좋아.

 

 

 

선호의 영역은 감정으로부터 비롯될까?


 

이처럼 개인마다 취향, 즉 선호의 영역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선호의 영역은 감정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선호의 영역은 감정의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우리는 감정이 없으면 이성적으로 살아간다고 하지만, 사실 감정이 부재한다는 것은 그보다 더 복잡하고 심오한 문제이다. 감정이 부재한다는 것은 취향이 없다. 즉 세상이 온통 회색빛이어서 무언가 내가 하고 싶은 것이나 뭘 해야 할 지가 너무 모호하고 어렵다는 것이다.

 

단순히 우리가 꿈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예를 들어,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어떠한 반응을 해내야 하며, 그 말의 함의가 무엇인지 도출해 내는 과정이 어려울 수 있다. 상황적 맥락을 파악하기가 어려워진다. 사소한 행위 하나조차도 모든 뇌의 의식적인 조작을 통해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람들이 타인과 맺는 사회적 교감 작용은 얼마나 어색하고 모든 것이 힘에 부치는 행위일까? 사회성의 부족은, 즉 감정의 풍부한 발현을 제한하고 있는 상황에 처했다는 말일 수도 있다.


감정을 통제하고 있지 못해 어려워하고 있는 이들에게 감정은 찾아오는 것이며, 나름 소중한 것이라 말하고 싶다. 감정이 힘들면 그 자체로 불안정한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하고 느낄 수 있는 상태인 것이다! 감정이 평온하고 안정적이라면 안정적인 상태를 가장 잘 즐길 수 있을 때이다. 배우라는 직업을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일상의 사람들은 감정을 작위적으로 짜낼 수 없다. 인위적으로 짜낸 감정은, 무의미하거나 개인에게 스트레스를 줄 수 있다. 억지로 쥐어 짜내 쓴 글이 무의미하듯이. 억지로 짜낸 감정은 안 울고 싶은데 결국 신파적으로 울게 되는 영화 같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순간 느꼈던 감정에 주목하되, 주목하지 않는 모순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 '감정'이라는 기의로 나의 마음과 느낌을 한정 짓고 이를 통제하려는 시도는, 가끔 위험할 수 있다.

 

우리는 너무 불안정하기도, 너무 안정되기도 한 삶을 살며, 이에 전전긍긍하지 않고 이를 즐거워하는 삶의 태도를 지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의식하는 순간 우리는 고요함에 도달하게 된다! 감정에 무디게 될 수도 있다. 이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찾아오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또 감정은 불쑥불쑥 치솟아 올라 화내고 울고, 웃기도 하게 될 거다. 결국 그러니까 너무 깊은 행복과 너무 깊은 우울에 심란해하지 않아도 된다.

 

오늘 하루도 코로의 그림처럼 흐리지만, 맑고 어둡고 밝은 하루일 것이다.

 

 

 

에디터 심선용.jpeg

 

 

[심선용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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