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사랑하는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 - 사랑하는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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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사에 시니컬해도 내 아내에게만은 따뜻한 할아버지 제르맹. 그는 갑작스러운 아내 리즈의 사망에 따라 오래전 그녀와 했던 약속을 지키고자 한다. 바로 먼저 떠나간 이가 진행 중이던 일을 남은 사람이 대신해 끝내주는 것이다.
그리고 제르맹의 눈물 나게 웃긴 집 대탈출이 시작된다. 그도 그럴 게 제르맹에게 남겨진 리즈의 일이란 현대무용단에서 춤을 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머리는 새햐얗게 세고, 배는 불뚝 나온 데다 온몸 곳곳이 아플 나이의 할아버지가 춤이라니!
가뜩이나 홀로 남은 아버지를 걱정하며 온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그를 감시하느라 난리다. 옆집에선 하루가 멀다고 엄청난 양의 음식을 가져다주며 안부를 묻고, 가족에게선 전화가 수십 통이 울리다 못해 찾아올 사람들이 색색깔 메모지로 예약되어 집 한구석에 붙어있다.
그 모든 관심과 걱정은 전부 사랑으로 가득 차 있건만, 제르맹은 버겁다 못해 훌훌 털어버리고만 싶다. 그러니 춤을 추는 것을 가족들에게 이실직고하기란 그의 선택지가 아니었다. 밝혔다간 얼마나 잔소리를 듣게 될지!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까진 아니지만, 그는 뒷문 넘어 도망치는 100세 이하의 노인정도는 되기로 결심한다.
온 길거리 고양이들에게 음식을 넘겨주고, 비행기 모드가 무엇인지 모르는 척하고, 무용단원을 아내 묘소의 경비로 속이는 한이 있더라도 그는 악착같이 자신이 춤을 추는 것을 숨긴다.
제르맹의 이같은 가족으로부터의 자유 찾기는 관객의 웃음을 자아낸다. 얼마나 들키고 싶지 않으면 그렇게 애쓰는지, 오히려 후에 밝히게 되었을 때 내가 다 아쉬울 정도다.
그러나 한편으론, 가족들의 걱정도 제르맹의 춤도 모두 애정에서 비롯된 점이라는 점이 인상적이다.
사랑. 남녀노소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그 어떤 것. 이것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다가도 벅차오르게 만들고, 어떤 무모함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게 하다가 겁을 내게 하고, 모든 것을 숨기게도 또 밝히고 싶게도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나 자신의 한 부분을 잃은 것처럼 아파한다. 그리고 아픔이 영원할 것만 같아 도저히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상실에서 비롯된 쓰린 눈물. <사랑하는 당신에게>는 그 너머의 삶도 유쾌할 수 있음을 따뜻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꼭 눈물로 누군가의 빈 자리를 채울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아픔이 일시적이라고 스스로를 속일 필요도 없다. 다만 제르맹처럼 누군가를 추억하는 방식을 바꿔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 아픔을 나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을 수도 있다. 그뿐이랴, 우리 곁에는 여전히 나를 아끼는 사람들이 있다. 눈물로 상실을 채우기엔 아직 소중한 것이 너무 많다.
<사랑하는 당신에게>라는 제목은 제르맹이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의 첫 문장이다. 그러나 이 문구의 발신자와 수신자는 다양하게 해석해 볼 수도 있다.
비록 당사자가 그것을 매우 성가시게 여기나, 제르맹의 가족(과 그의 지인들)이 제르맹에게 전하는 메시지의 첫 문장으로도 가능하다. 그리고 그들이 러닝타임 내내 보이는 불안과 걱정, 공포가 본문일 테다. 그것들이야말로 사랑을 드러내는 가장 직접적인 형태니까.
혹은 영화가 관객에게 전하는 편지의 첫 문장일 수도 있다. 상실을 딛고 일어서는 한 노인이라는 본문을 통해 우리도 무언가 얻어갈 수 있기를 바라는 따뜻한 인사말이다.
나의 추억이 누군가에겐 하나의 객관적 역사로 기록되고 전시될 수도 있다. 아내와의 연애 시절 비밀스럽게 나누던 편지들이 도서관의 역사로서 기록되자 제르맹은 미묘한 표정을 짓는다.
제르맹은 아내 대신 춤을 추겠다며 무용단을 찾았던 날, 돌아가기 전 건물의 계단을 바라보았다. 화면비에 꽉 들어찬 회백색의 그것은 꽤 아찔하리만치 높았다. 제르맹에게 닥친 춤이라는 시련에 대한 막막함을 잘 보여주는 장치였다. 그러나, 아내에게만큼은 따뜻한 시니컬한 할아버지 제르맹은 결국 그 계단을 오른다. 그리고 제르맹은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춤을 추는 동안 리즈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글자와 종이로 기록되어 전시된 제르맹의 젊은 날의 사랑은, 결국 후들거리는 다리를 들어 한 발 한 발 계단을 오르던 노년의 그가 공연을 성황리에 마치게 됨으로써 영상과 몸짓으로 다시 한번 사람들에게 기록되고 전시된다.
많은 사람이 현대예술을 난해하게 여긴다. 나도 그중 하나다. 특히나 춤에는 더욱이 문외한인데, 이 영화를 통해 처음으로 현대무용에 담긴 아름다움과 뜻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예술은 이야기와 사람의 교차점에서 탄생한다. 현대무용도 예외가 아니다. 그것을 제르맹이라는 가상의 춤꾼이 말해주었다. 언어로는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없다. 제르맹에게 리즈의 존재가 어떤 무게를 가졌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래서 그의 춤은 소중하다. 어떤 이야기는 말과 글이 아닌 방식으로 더욱 풍부하고 깊이 있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게 그 어려워 보이는 예술의 핵심이다. 리즈에 대한 제르맹의 사랑은 편지일 땐 살랑이는 봄바람 같았다. 그러나 춤이 되자 그 사랑은 건물이라도 집어삼킬 것 같은 파도가 되었고, 얼음도 녹일 태양이었다.
노년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잔잔하고 마음 따뜻한 영화 <사랑하는 당신에게>. 특히나 부모님이 나란히 손을 잡고 같이 관람했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다.
[유다연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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