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봄, 조금 앞을 보는 일 [여행]

한강, 한리타 그리고 봄
글 입력 2023.05.15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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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랑 대화를 하고 있으면 봄이라는 계절에 한 걸음 다가가는 기분이 들어.”

 

이제는 완연한 봄 속에서 있어서 일까, 봄에 태어나서 일까. 여러 이유들이 떠오르지만 그보단 그 말에 설레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봄을 특별히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나에게서 봄을 떠올리는 이유에 대한 생각은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올해 봄은 부지런히 즐겨봐야지 하는 결심으로 이어졌다.

 

봄의 관찰자로서 피어나고 스러지는 꽃의 노래를 부르는 한리타의 단상집 <사라지는, 살아지는>을 읽으면서 작은 것들에게 얻는 큰마음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지난겨울을 아주 춥게 보냈던 나에게 그런 위로들은 성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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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빠진 겨울을 뚫고 뽐내는 꽃들이 평소보다 눈에 더 들어왔다. 벚꽃, 개나리, 수수꽃다리가 특히 그랬다.

 

그래, 이번 봄은 좀 더 길게 즐기고 싶어. 그런 생각으로 시간을 벌어보기로 했다. 사실 이건 그 꽃들을 보기 조금 전의 이야기이다. 그렇게 후쿠오카로 떠나는 것은 조금 충동적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오래 기다려 온 일 같았다.

 

봄을 미리 다듬고 오는 일.

 

나에게 있어 앞서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드물다.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보는 것을 안전하게 생각해서일까. 그래서 봄을 미리 보고 오는 것은 분명 봄이 너무 길어질까 두려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드디어 겨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 마음으로 오른 새벽 비행기에서는 한숨도 잘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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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치듯 본 올해 첫 벚꽃나무

 

 

따지면 일주일, 일 년을 하루로 비유한다면 고작 5분 정도의 시간을 미리 보고 오는 일이다. 이국적인 풍경이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지만 들려오는 외국어와 모르는 문자들로 빼곡한 간판들은 충분히 겨울을 쫓아낼 만큼의 환기가 되었다.

 

또 하나 눈에 띄게 달라지는 것은 옷차림이었다. 아직은 두터운 패딩을 입는 한국에서 벌벌 떨며 걸치고 온 얇은 자켓마저도 벗게 하는 따뜻한 날씨가 그렇게 우리를 맞이했다.

 

이름 모를 풀꽃과 어디서 본 듯한 나무들을 보니 다른 나라보다 다른 시간에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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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저녁을 서랍에 넣어두었다>

 

 

맛있다는 음식을 찾아 먹고 유명한 곳에 가는 것처럼 평소에도 할 수 있는 일상들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계절의 간극에서 조금 여유를 되찾게 된 기분이었다. 모르는 사람, 모르는 언어에 둘러싸인 채 내가 읽을 수 있는 건 풍경과 들고 온 책 속 활자들이었다.

 

어떤 시는 가끔 용기를 주는데, 그건 나도 모르는 새 겁내고 있었음을 알려준다는 말이다. 이상하게 한강의 글들은 시리게 슬플 때가 있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눈을 뚫고 걸어가는 주인공이 특히 그랬다. 죽어도 멈추지 않는 그의 발걸음처럼. 결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시도 그렇다. 오랜 시간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다가 막상 나에 대해 말해야 하는 때가 오자 당황스러웠다.

 

기차를 타고 가는 것이 여행인지 도망인지 모르겠지만 이 여유만큼은 온전히 즐길 수 있었고 다시 낯선 곳에 갈 수만 있다면 '이렇게 한 계절 더 피 흘려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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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니 여기는 조금 바스락거리고 건조하고 까끌까끌한 먼지 속 봄. 이 봄에 꼭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 나에 대해 깊게 알게 되는 것이다.

 

나를 구성하는 것들이 어떤 이유로 계속 나를 만들어내고 있는지그래서 뭘 하고 싶은 건지. 가능하다면 여기까지 알아내고 싶다. 또 가능하다면 가장 괴로운 계절인 여름을 버틸 수 있는 용기, 아니 용기 비슷한 것이라도 얻어 가고 싶다.

 

봄이 좋아지게 된 기억에 올해 2월이 있었으면 좋겠다. 아팠던 기억보다 버텼던 기특함이 남으면 감사하겠다. 사람과 사랑을 떠내보내는 봄의 중간에서 초록들을 마주한다. 매번 찾아오는 푸른 잎들을 존경한다.

 

조용히 작은 봄의 주인들에게 배운다. 매년 그 마음이 꺼질 듯 꺼지지 않고 다시 살아오길 바란다.

 

 

 

컬처리스트 한승하.JPG

 

 

[한승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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