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느 정도의 해방 [드라마/예능]

적정치를 지키고 싶었던 누군가의 해방 일지.
글 입력 2023.05.12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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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 사람들이 나를 볼 때 딱 중간 정도의 사람으로 기억해 주길 원해왔다. 너무 튀지도, 그렇다고 해서 아예 존재감이 없지도 않은. 딱 평범한 정도의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언제나 적정 수준의 감정과 행동을 보이던 사람, 엇나가거나 앞장서지 않으며 조용히 제자리를 지키는 충실함을 지니던 사람으로 모두의 기억 속에 자리 잡길 소망했다.


이러한 나의 생각과 소망을 되돌아보게 한 건 올해 초에 접한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이다. 뭔가가 한창 인기를 끌 땐 관심 없다가, 잠잠해지고 나면 뒷북치는 악질적인 습관이 도진 탓에,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늦게 이 드라마를 몰아 보았었다.


다들 '구씨', '구씨'하길래 드라마의 주인공이 '구씨' 한 명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염미정'을 포함한 그 가족들까지 주연이 3명이나 더 있었다. 그리고 드라마를 쭉 보다보니, 가장 잘 알려진 구씨와 염미정의 이야기는 극히 일부였다. '나의 해방일지' 속에 등장하는 각 인물들의 해방 이야기는 아픈 곳을 찌르기도, 마음 속 한편에 숨겨 놓았던 우울을 위로하기도 하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은 인상을 남겼다.

 

염 씨 집안과 그들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은 서로의 구원이자 해방이 되어준다. 그들은 직접적으로 입 밖에 내뱉진 않지만, 그들만의 끈끈한 애정과 신뢰로 서로를 위로한다. 드라마 전반에서 부르짖는 '구원'과 '해방'이 단지 구씨와 염미정의 남녀관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드라마의 진가가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드라마 속에서 해방의 시작이자 중심이 되는 인물은 '염미정'이다.

 

 

[크기변환]염미정.jpg
'나의 해방일지' 공식 홈페이지.

 

 

 

잔잔한 듯하지만 가장 요동치는,



세상엔 참 다양한 특성의 사람이 있다지만, 유독 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류의 존재들이 있다. '나의 해방일지' 속 염미정이 그러하다. 처음 화면 속 염미정을 마주했을 때, 나는 그녀가 세상사에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주변 인물들의 변화에도 무덤덤하게 반응하는, 그저 무던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매사에 시끄럽고 뜨거운 손윗 형제들과는 달리 미지근한, 어쩌면 조금은 차가운 사람같이 보였다.


하지만 회차가 진행될수록 드러나는 염미정의 여린 부분들은 드라마 초반의 첫인상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 당하고, 수중에 해결하기 곤란한 빚을 떠안고서도 가족들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지 못하는, 떼인 돈마저도 억척스럽게 나서서 받아내지 못하는 염미정의 심성이 미지근함이라는 껍데기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미지근하기에 결코 차가울 수 없고, 아예 뜨거울 수 없다고나 할까? 열정적으로 나서서 쟁취하지도 않으며, 냉랭하게 끊어버리지도 못하는 마음이 충분히 공감 가면서도 안타까웠던 것 같다.

 

 

 

 

나를 추앙해요.

 

 

이 대사는, 이 드라마의 애청자들로부터 많은 공감을 샀다. 사람들 각자의 위치와 입장에서 이 대사는 의미를 달리하며 받아들여지고 널리 퍼졌다.

 

그러나 염미정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오히려 이 대사 뒤에 붙은 말이 더 그녀의 본심에 가깝다.


 

난 한 번은 채워지고 싶어.

 


그저 추앙받고자, 사랑받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타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겠지만 알게 모르게 퍼주기만 하며 텅 비어버린 속을 채우고 싶었던 것이다. 철저히 평범한 사람이고 싶었던 염미정은 그 속을 타인에게 내보이려 하지 않았고, 그래서 구씨를 만난 후 비로소 그는 제 이야기를 퍼뜨릴 사람이 아님을 확신하게 되고서야 묵혀 두었던 속 이야기를 털어 놓은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한 번은 채워지고 싶다던 염미정의 말은 '나의 해방일지'의 모든 이야기를 아우르는 공감대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아무나'라도 사랑하겠다던 염기정과 멋진 차를 갖고 싶다던 염창희, 그리고 이름 없이 비워진 채로 그저 그들 곁에 머무르던 구씨마저도, 실은 한 번쯤 가득 채워지고 싶었던 것 아닐까? 이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묵묵히 자기 삶을 사는 듯 보이지만, 그 속엔 공허를 채우고 싶어 요동치는 울음을 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가장 어렵지만 가장 쉬운, 나로부터의 해방



'해방'도 나를 가두는 껍데기로부터 자기 자신이 가장 먼저 벗어나야만 시도할 수 있다. 늘 해오던 일들과 지켜오던 삶의 루틴들, 그리고 묶여있던 관계들로부터 탈피하려는 마음이 없다면 해방은 시도할 수도, 이뤄질 수도 없다.


염미정이 구씨에게 다가가 대뜸 던진,'나를 추앙해요'라는 파격적인 말은 그래서 이 드라마의 시작과 끝인 것이다. 그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바라는 바를 이야기하며 나 자신으로부터의 해방을 시작했기에.


'애 딸린 홀아비'인 태훈과의 진짜 사랑을 시작한 염기정도, '아무나'와 사랑하지 못하던 자신의 기준에서 벗어나 제 감정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결국 '나로부터'의 해방을 이뤄가는 것이다. 타인을 평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바라왔던 본인의 모습을 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멋진 차와 번듯한 업장을 지닌 사장님이 되고 싶었던 염창희도, 눈앞에 찾아온 천금같은 기회를 버리고 제 사람들 곁에 남길 선택했을 때 해방되기 시작했다. 욕심과도 같던 공허를 자기 의지로 놓았다는 점에서 말이다.


함께 살던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고, 전쟁과도 같던 삶 속에서 동료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버리지 못하여, 비워진 채로 꾸역꾸역 삶을 이어가던 구씨가 결국 염미정과의 재회를 선택했던 것. 그가 더 이상 참지 않고 그녀를 찾아간 것도, 또다시 지키고 책임져야 할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게 하던 무력감으로부터의 해방을 시도한 것이다. 

 

그들의 선택이 앞으로 어떤 현실을 초래할지, 그리고 그들이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될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들은 또다시 자기가 자신을 옭아매는 상황 속에 처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번 '나'를 해방하고자 발걸음을 떼어 본 사람들은 그 또한 훌훌 털고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타인보다 먼저 '나'를 해방하는 것은 처음이 어려울 뿐, 두 번째엔 그 무엇보다 쉽기 때문이다.

 

 

 

그 무엇보다 큰 힘을 지닌.




그들이 해방했다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사실 이 드라마의 끝은 아주 찝찝하다. 어렵게 어렵게 그들이 해방을 시작한 부분을 찾긴 했지만, 여전히 이 극 속의 주인공들은 갈 길이 멀다. 꽉 닫힌 해피엔딩을 원하는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아쉬울 뿐이다.


그러나 시청자이기 전에 사람으로서,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에 큰 위로를 얻는다. 소소한 행복들을 모아 모아 기쁜 한 시간, 좋은 하루를 만들어가기 시작한 주인공들로부터 용기를 받게 된 것 같다. 동시에, 다가올 날들을 환대할 그들이 부러워지기도 한다. 


중간의 삶, 적정치만큼의 존재로 살고 싶다는 소망이 강박이 되어 나를 괴롭혔었다는 것도, 염미정이라는 인물의 삶을 지켜보다 깨달았다. 적당히 사람 사이에 묻어가며 1인분만 하고 싶다는 바람은, 그저 감정의 오고 감을 두려워하는 아주 작은 겁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란 걸 그들 간에 오가던 위로가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로는 우는 것조차 용기가 필요했던 염미정이 고여있던 감정에서 헤어 나오는 걸 보면서 언젠가 나도 그런 해방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얻었다. 드라마 속 염미정이 말했듯, 삶의 틈새를 이어주는 7초, 10초의 기쁨을 모으며 살다 보면, 바삐 살다 돌아 봤을 때 수북이 쌓인 추억들이 있겠지, 하며 말이다.


어쩌면 생각보다 빨리, 나에게도 남은 삶을 환대하는 날이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친다.

 

 

[크기변환]20220530_154837_0149.jpg
'나의 해방일지'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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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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