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파도 소리에 깬 아침

글 입력 2023.05.07 14:05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서 유독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 하나 있다.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던 아빠가 말한다. 

 

이렇게 소파랑 TV 딱 두 개만 저기 어디 수목원이나 산골에 놔주면 정말 좋겠다. 누워서 TV 보는데 바람은 시원하고 옆도 탁 트이고. 시원-하고 퍼렇-게.

 

최근에 다녀온 첫 차박에서 이부자리를 펴고 누운 뒤 창밖 반짝거리는 네모난 밤하늘을 발견한 순간, 아빠의 말이 떠올랐다. 아. 이런 걸 원했구나, 아빠가.

 

*


차박용으로 개조된 차를 한 대 빌린 짝꿍과 나는, 금요일 밤 퇴근하자마자 온갖 짐을 차에 실어 넣고 고속도로에 올랐다. 운전석과 조수석 뒤 옵션을 갖추는 데에 몽땅 털어 넣은 것인지, 블루투스 연결이 되지 않는 차량임을 깨달은 우리는 다소 당황했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우리에겐 블루투스 스피커가 있고 내비게이션 앱이 있는데. 너무 즐거워서 무슨 일이든 반갑게 맞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우리는 신이 가득 난 채 커피를 마시며 서울을 벗어났다.

 

푸른 하늘이 검게 변하고 도시의 야경이 갈수록 진해지는 시간대였다. 아는 노래는 듣고 싶지 않아서 평소에 내 취향과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채널의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했다.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짝꿍은 좋아했다. 이럴 때는 운전자의 취향에 맞춰야 한다는 건 배웠기 때문에 나는 잠자코 바깥을 구경했다.


콘크리트 숲을 지나자 진짜 숲이 나타났고, 뒤로는 반짝거리는 서울이 보였다. 그렇게 골목길을 나와 대로를 달리고, 간선도로에 오르고, 고속도로에 올라 대교를 건넜다. 도로 위에는 캠핑용품을 갖춘 차들이 넘쳐났다. 떠나고 싶은 순간이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도로 위에 모인 것 같았다. 그중 한가운데에 놓인 우리는, 강한 바닷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려 애쓰며 다리를 지났다.


캠핑 명소로 유명한 해수욕장은, 명성과 다르게 찾기 상당히 어려웠다. 사실 내비게이션만 따라가면 됐지만, 갈수록 음침하고 사건 현장이 있을 것만 같은 마을 분위기에 압도된 내가 옆에서 쫑알거린 탓에 짝꿍은 자꾸만 브레이크를 밟았다. 이 길 맞는 것 같은데. 아니, 여기에 해수욕장이 어떻게 있어?


창을 열면 바다내음이 밀려왔지만 바다는 보이지 않아서 마치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 헤매는 듯했다. 죽어버린 도시의 냄새가 온 도시에 팽배한 것만 같아서, 몇 년 전부터 오고 싶었던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동네인 줄 알았다면 오지 말걸, 하는 생각도 찰나 들었던 게 사실이다.


아니, 여기 맞을까? 우리 그냥 어디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서 자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어릴 적부터 수많은 괴담과 미신을 접해온 나와는 달리 지극히도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짝꿍은 “방송에 나올 법한 분위기네”라는 말만 연신 뱉으며, 거듭 걱정 가득한 질문을 뱉어대는 나를 뒤로한 채 운전대를 놓지 않았고, 결국 길 한번 잃지 않고 해수욕장으로 흘러 들어가는 데에 성공했다. 갑자기 짝꿍이 멋있어 보였다.

 

 

[크기변환]바다 야경.jpg

 


놀라운 광경이긴 했다. 폐가 같은 주택들을 지나고 좁은 비포장도로를 지나자 널찍한 바다가 펼쳐졌고, 몇 분 전까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캠핑카와 텐트들이 줄지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텐트 안 조명들을 밝았고, 간간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런 묘미로 캠핑 다니는 건가.


2시간 전에 서울의 한가운데에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풍경은 적요했고, 바다와 밤하늘은 분간도 가지 않아 그저 허허벌판에 놓인 듯했다.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지만 공허하기도 했다. 파도인지 나뭇잎인지 헷갈리는 얇고 얕은 것들끼리 부딪치고 흩어지는 소리, 옆 캠핑카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 차를 흔들어 대는 바람 소리만이 들려왔다. 우리는 맥주와 감자칩, 먹태를 먹었다. 땅이 기울어져 있는지 자꾸만 내가 앉은 쪽으로 동그란 과자가 굴러왔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바깥은 유독 겨울처럼 춥던 날이었으나 차 안은 너무나도 따뜻하고 아늑했다.

 

 

[크기변환]차박 창.jpg

 

 

파도 소리에 잠이 깼는데, 커튼 사이로 뾰족하게 빛나는 태양이 눈에 들어왔다. 선팅 처리가 된 창문 때문이었다. 짝꿍은 이미 일어나 부지런을 떨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니 시원한 바람과 은은한 햇빛이 실로 적당했다. 우리는 바다를 보며 나란히 양치질했다.


시내 한가운데에 위치한 맛집으로 향하기 위해 전날 왔던 길에 다시 올랐는데, 어젯밤에 보았던 폐가들은 홀연히 사라지고 소박한 바닷마을만이 남아있었다. 무섭기만 했던 검은 숲도 낮에 보니 전부 벚꽃길이어서 짝꿍과 나는 한참을 웃었더랬다. 사람 냄새 나는 도시였네, 하며.


휘어있는 기둥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개심사에 가보고 싶었고, 선상횟집에서 양껏 회를 떠다 먹고 싶어서 꼭 가보고 싶던 도시였다. 점심을 먹고 주변 사우나에서 샤워까지 마친 우리는 개심사로 향했는데, 무언가 심상찮음을 깨달았다. 길 위에는 관광버스가 수없이 많았는데, 전부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던 것이다. 북적이는 곳을 싫어하는 우리지만, 애초에 사람이 많을 것을 알아버려서 그랬을까. 그 인파에도 태연히 사찰을 구경하고는 유유히 빠져나왔다. 개심사에 가려는 이가 있다면 토요일 점심 이후는 피하고, 개심사 앞 쑥전은 맛이 좋으니 시도해 볼 만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크기변환]필름.jpg

 

 

개심사가 궁금해서 올랐던 길이었지만, 사실 개심사보다는 가는 길에 마주한 목장이 더 기억이 선연하다. 윈도우 배경화면 같은 벌판은 오가며 두 번을 보아도 처음 본 것처럼 감탄이 절로 나오는 풍경이었다. 여태까지 사람들이 왜 목장에 놀러 가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는데, 이런 풍경이 사방으로 흐드러진 곳이라면 충분히 갈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차를 멈추고 잔디밭을 구경하다 카메라를 들었다. 여유롭고 귀여운 사진이 많이 나와서 갑자기 들뜬 기분이 들었다.


이모님이 선상에서 푸짐한 인심으로 썰어주신 회를 먹으며 우리는 각자의 ‘그때 그 시절 브금’을 번갈아 틀며 떠들었다. 컵라면과 핫바까지 해치운 우리는 한참을 이야기하다 잠이 몰려오자 물장난을 치며 씻곤 잠자리에 들었다.


두 번째 아침 역시 내리쬐는 햇빛에 깨며 시작되었다. 짐을 정리하고 얼마간을 웃고 투닥거리며 놀고 있는데, 누군가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 돌아보니 옆에 주차된 캠핑카의 아저씨였다. 젊은이들, 어디서 왔어. 서울에서 왔다고 답하자, 그러다가 나중에 캠핑카 하나 사게 될 거야, 하셨다.

 

옛날부터 자전거를 끌고 다니며 캠핑을 즐겼다는 아저씨는 우리의 자그마한 렌터카와는 견주지도 못하게 큰 캠핑카를 갖고 계셨다. 말투에서부터 여유가 느껴지는 분이었는데,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는 모습조차 수묵화에 그려진 나그네 같기만 했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은근슬쩍 안을 들여다보았는데, 안에 꽃병도 놓여있는 것이 꽤 낭만적인 분이었다. 몇 마디를 툭 던진 아저씨는 차 안으로 들어간 뒤 나오지 않으셨고, 우리는 인사도 못 드린 채 캠핑장을 빠져나왔다.


본래 가려던 식당이 문을 닫은 바람에 굴을 못 먹는 짝꿍을 데리고 굴밥집에 들어갔다. 하필이면 그 주변에서 유명한 음식이 굴밥이었던 탓이지, 내가 못된 게 아니다. 굴 반찬이 많았는데 다 남기면 식당 사장님이 시무룩하실까봐 나는 짝꿍 몫까지 찬을 몽땅 비웠다.


바로 앞에는 간월암이 있었다. 물때가 맞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걸음을 옮겼다. 바다는 저 멀리 빠져있었는데, 서해를 겪어본 적이 한 번밖에 없는 나로서는 그저 신기했다. 썰물이 이렇게 심할 수가 있구나. 파도처럼 밀려오라는 말을 서해에서 한다면 그 의미가 더 강해질 것만 같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갯벌을 건넜다.


장화를 신은 아이들은 바닥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캐내는 것인지 줍는 것인지는 보지 못했지만, 아마 이 중 하나였을 게다. 저 애들은 오늘을 어떻게 기억할까, 문득 궁금해졌다. 지금 줍고 있는 조개만 기억할까, 뒤에 서 있는 부모님의 모습을 기억할까, 냄새만을 기억할까, 아니면 풍경을, 공기를 기억할까.


엄마와 함께 보말을 잡으러 갔던 날들을 돌이켜보면 떠오르는 것은 많지 않다. ‘바다 바퀴벌레’로 벌리는 갯강구가 소리 없이 사라지는 모습, 바닷물 속 손에 닿던 보말 껍데기의 촉감, 파도 소리와 바닷바람에 엉키고 기름 지는 머리, 찰박거리는 물소리 같은 것들. 옛적의 나와 모습이 겹쳐 새삼 이 아이들의 오늘이 궁금해졌던 듯하다. 까맣게 물든 빨간 장화들이 귀여웠다. 나는 뭘 신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주말 이후의 삶이 정해져 있는 우리는, 닫히는 바닷길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품은 채 올라왔다. 이 정도의 아쉬움이라면 다시 돌아올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고, 운전하던 짝꿍은 우리 다음에 여기 또 올 것 같아, 말했다. 말을 입 밖으로 낸 것도 아닌데 내 속을 어떻게 알았나 싶었지만, 다음에 꼭 와서 게국지에 밥 2공기씩 먹자, 했다.

 

 

[크기변환]KakaoTalk_20230506_233429859.jpg

 


철썩이는 파도 소리와 내리쬐는 햇빛에 서서히 잠에서 빠져나오던 아침은 실로 행복했다. 커튼을 열면 바다를 구경하는 짝꿍이 보이고, 문을 열고 내리면 신선한 바다내음과 찬 바람이 밤새 데워진 몸을 식혀주는 아침. 두 번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사랑스러운 순간이었다. 이런 식으로 자꾸만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찰나들이 자꾸만 늘어간다. 내 해마가 능력이 좋았으면 좋겠다.


약 1년여간 여행도 가지 못하고 현실을 살아내느라 지쳐가던 찰나 푸르게 트인 광경이 너무나도 그리워 떠난 여행이었다. 숙소를 잡기도 싫었다. 어딜 가든 꼭 벽과 천장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짧게나마 뿌리 내리며 집착하는 것이 새삼 거부감이 들었다. 그냥, 바람 부는 대로 움직여도 좋지 않을까. 해봤자 사흘인데.

 

 

[크기변환]목장.jpg

 


전환이 필요했던 것도 같다. 나를 꺼내어 햇빛에 잘 말려놓고 먼지를 다 털어낸 뒤 다시 안에 집어넣는, 그런 며칠 간의 휴식. 그래서 푸르고 시원한 곳에서 누워 쉬다가 자고 싶었다. 어쩌면 자연에 몸을 뉘고 싶다는 아빠의 꿈을 물려받은 것은 아닐까. 그날 무슨 꿈을 꾸었는지는 기억나진 않지만, 짝꿍 말에 의하면 내가 일어나자마자 정말 해맑게 웃었더랬다. 좋은 꿈을 꾼 것처럼 행복하다는 듯이. 비록 수풀 사이는 아니었지만, 바다 한가운데에서 꿈을 이룬 날이었다.


돌아오는 일요일 오후 고속도로에도 루프탑 텐트를 올린 차들이 많았다. 일상에서 비일상을 향해 밤새워 질주했던 사람들일 터였다. 금요일과 풍경이 꼭 같아 시간이 흐르지 않은 건 아닐까 순간 의문이 들었지만, 손에 잡은 문어 비눗방울 놀이가 재미났던 주말을 증명해 주었다.


아무래도 닫힌 바닷길과 남긴 게국지가 아쉬웠다. 아쉬움 없이 즐기며 사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나지만, 어떤 때에는 일말의 아쉬움을 두고 오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컬쳐리스트 태그.jpg

 

 

[이주연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4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