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ri.(나리)의 EP [소녀,N] 속에는 하나가 되지 못한 채 둘로 나뉘어버린 소년과 소녀가 거울을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
그들을 가른 건 벽이 아닌 거울. 완전히 차단된 상태가 아닌 끊어질 듯 말 듯 희미하게 이어져있다. 각자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그들은 멀리서 서로 응시만 할 뿐이다.
소년과 소녀가 거울을 통해 보는 건 분리된 차원의 나이자, 낯선 모습을 한 타인이다. 명확히 규정지을 수 없는 모호한 정체성의 존재, 밝혀내야 할 또 다른 내 모습.
허나 서로 다른 존재인 그들은 쉽사리 가까워지지 못한다. 끝없이 일고 마는 균열, 부서지는 자아 속에서 소년은 광기서린 눈으로 얇디 얇은 거울을 노려본다. 소녀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에 응답한다.
1. 아이
소년은 울부짖는다. 과거의 기억에서, 어두운 골방에서, 치명적인 상처에서 자유롭지 못한 자신을 비관적인 시선으로 내려다본다. 악에 받친 듯 냉소적인 말과 언행들을 자신에게 쏟아붓는다. 저 건너편 자신을 지켜보는 소녀에게 쏟아붓는다.
더원 체인지 옆
놓여있던 그 lighter
불을 댕기면 맞이할
그의 뜨거운 환영
The illusion so vital
하루하루 survival
추락하는 순간 날아오를
자기애 (파멸)
아 난 모르겠어 이제
너의 진실 혹은 거짓
다시 벌어지는 거리
머리부터 가슴까지
내가 말했잖아 행과 복은 반비례니
받아들이라고 이 시대의 아이러니
소년은 타인의 시선에 연연하느라 솔직해지지 못하는 소녀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거짓된 자기애, 떠오른 환영 속 흐릿한 모습을 진실이라 여기는 맹목적 믿음, 추락하는 순간에도 날아오를 적 영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여운 영혼.
점점 목소리는 날카로워지고 감정은 극에 치닫는다. 포기하듯 모든 걸 내려놓는 그는 자신의 행복마저 저버린다. 자신을 버린다.
Then nobody does like me
꺾어 마신 술 같지
됐어 나는 굴 안에
아무도 봐줄 이 없어
나 혼자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 걸 알았지
빨리 달려와 어서
2016 3월부터 위치
언제나 옥상에
이건 사랑 아닌 고백
네가 잊은 자기소개
자신을 고립시키고 만 소년. 이제 소년의 눈에는 그 누구도 보이지 않는다. 구원을 기대해보지만 돌아오는 건 메아리 치는 자신의 목소리 뿐이다. 계속해서 내뱉는 아픈 말들이 자신을 찌른다. 상처는 손 쓸 새도 없이 퍼지고 만다.
아파, 괴로워, 도와줘. 나 여기있어, 빨리 달려와 어서.
아물지 못한 상처. 피로 물든 동굴 속에서 소년은 결국,
입이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
입이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
입이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
입이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
"감히 기쁨에 저런 바른말을 해"
"감히 기쁨에 저런 바른말을 해"
"감히 기쁨에 저런 바른말을 해"
나 이 슬픔을 걸어가는 사이에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둔 소녀를 소년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 기쁨 속에 자신을 숨기는 소녀를 향해 모진 말을 뱉어낸다.
난 이토록 슬픈데, 너는 어째서. 내가 이 지경인데, 너는 어째서. 난 삐뚤어진 내 모습을 인정하는데 넌 뒤틀린 네 모습을 인정하지 않아.
거기선 너
울지마
속지마 이거 전부 다
의미 없으니까
나를 똑바로 봐 더
더 똑바로 봐 널
거기 선 너
울지마
속지마 이거 전부 다
의미 없으니까
너를 똑바로 봐 더
더 똑바로 봐 날
소년은 거울 반대편의 소녀를 향해 울부짖는다.
나를 똑바로 봐, 네 모습이 나고 내 모습이 너야. 외면하지 마, 고개 돌리지 마, 너를 똑바로 봐.
거기선 네가 애써 피하며 밝게 웃을 수 있겠지. 다만, 거기 선 네가 주저앉지 않는 건 지금의 내가 있어서야. 그 거울 안에서 얼마나 행복할 수 있나 보자.
여리고 여린 아이는 거울을 깨뜨린다.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해, 거짓된 소녀의 세계를 부수기 위해.
2. 밀어
구태여 말해 뭐해
그대여 나를 보게
제 과거 하나 간수 못하면서
무슨 고백
남 붙잡고 말하지마
남부끄런 고해
아무도 공감 못해줘
접는 게 좋아 기대
더 세게 밀어
박살나버린 Mirror
도달한 미로 속에서
걸은 시간이 길어
한번을 봐주질 않아서
미뤄진 내 치료
이제 내게 집중해
늦은 대가를 치러
또 세게 밀어
나는 네가 미워
아무렇지 않은 표정
나는 그게 싫어
언제까지 못 본 척
못 들은 척
내 입을 막고
눈을 가려
내버려 둘 건데
거울을 건너 소녀의 영역에 침범한 소년. 갑작스런 균열에 소녀의 세계는 금이 간다. 소녀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을 쏟아내는 소년.
넌 나와 다르잖아, 날 이해 못하잖아. 그러니까 그냥 내버려 둔거잖아. 뭐라도 말 좀 해봐. 가만히 입 닫고 있지 말고.
소년의 말에는 분노가 담겨있다. 핏빛으로 물든 거울 세계 속, 윽박지르듯 소녀를 다그치는 소년은 소녀의 텅 빈 눈을 바라본다. 거기엔 태초부터 잉태된 공포와 언제부터 자리잡았는지 모를 두려움이 가득 서려있다.
겁이 나서 난
소리 쳤어
저 밖의 누군가
Call me now
Fallin' now
Darlin' 날
꺼내줘 밖에서
닿을 수 없게 더는
절규와도 같은 소녀의 외침.
거울에 갇힌 건 비단 소년만이 아니었던가.
거울 바깥 처음부터 끝까지
뒤집힌 참과 거짓
매끈하게 다듬어진
'아름다운' 전개
정반합의 연속
정방향의 변곡
밀어봐도 없는 탈출구에
괴로워 결국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거울 밖 세계. 무엇을 믿어야 할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종잡을 수 없는 혼란 속, 부서져버린 거울을 바라보는 그들.
오차도 없이 매끈하게 다듬어진 거울이 비추는 것은 분명한 진실이었을 터. 다만 현재의 부서진 거울이 비추는 것마저 진실일 텐가. 아니, 진실이라 믿어왔던 저것조차 허영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을까.
...여긴 지금 거울 속 세계인가?
3. ISBN 9781406309140(skit)
감정을 가라앉히고 서로를 직시한 소년과 소녀. 다른 그 누구도 이해해주지 않았던 생각들을 차분히 풀어놓는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너무 멍청하다니까.
행복해지려고 집단을 이루는 것만큼 멍청한 게 있나?
행복의 근원을 건드리는 소년.
집단은 행복의 필수조건일까? 집단은 개인에게 행복을 담보할까?
아니, 정말로 자기가 자신이 없으면 남을 안 붙잡는 게 맞지 않나?
"지금도 너무 행복하고 충분해서 기쁨을 새로운 사람과 나누고 싶다"
이런 게 아니면, 그러니까 자기가 정말 행복하다는 자신이 없으면,
남한테서 행복을 찾을 생각은 하면 안 된다고
행복은 스스로 차올라야 하는 것. 타인에게서 행복을 얻기 위한 노력은 착취에 불과하다. 행복은 갈구하는 것이 아니다. 느끼는 것이다.
난 행복한가?
돌아본다. 난 행복한가?
이 행복을 나누어 줄 상태인가? 행복이 충만한가?
맞다고? 그럼 난 진짜 관계를 맺을 준비가 된 거다.
아니라면,
그건 무슨 심보야 대체 그러면?
자기도 행복하지 않으면서 생판 남한테서 맡겨놓은 것 찾는 것도 아니고.
진심으로 상대를 좋아하면 행복하게 해줄 생각을 해야지, 뜯어낼 생각이 아니라.
하긴 뭐 어차피 다들 껍데기랑 알멩이가 달라가지고...
행복해 '보이는' 사람을 붙잡았는데 사실 텅 비어 있었다,
이런 일이 더 많긴 하겠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행복해 '보이는' 사람을 찾는다.
저들과 가까이 하면 나도 행복해질 수 있을거야, 나도 행복해질거야. 그건 곧 구원이야. 난 구원받고 싶어! 날 구원해줘. 이 불행의 늪에서 날 꺼내줘.
착취가 시작된다. 그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건 진짜 행복이 아니었으니까. 거짓에 불과한 껍데기에 불과하니까.
행복에 대한 갈망은 더 심해진다. 공허하고 텅 빈 사람들은 가면을 쓴다. 가면 뒤에 숨어 행복을 연기한다.
나 이렇게 잘 살아요! 나 이렇게 행복해요! 내 주위에는 이런 사람들이 있어요!
이제 됐죠? 난 행복한 사람이에요. 그러니 다들 나를 찾아줘요. 나와 관계해줘요. 제발.
그래서 나는 '외롭다'라는 감정은 되게 위험하다고 생각하거든?
외로운 사람들은... 안타깝긴 해도 끝까지 외로워야지 뭐.
내가 봤을 때 외로움은 약간 유전병 비슷한 거라서,
시대랑 세대가 거듭된다고 막 희석되지도 않거든.
나만 불행하면 됐지, 나 한번 행복해 보겠다고 멀쩡한 남까지 끌어들일 필요없잖아.
아니야?
외로움은 광기와 비슷하다. 지난한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무엇이든 닥치는대로 할 테니. 결국 외로움은 오롯이 홀로 감내야한다. 소년의 처절한 끝맺음에 소녀는,
맞지. 물귀신 되는 것보단 그냥 잠겨버리는 게 더 나을걸?
아, 이를 위해 긴 시간을. 부유하는 소년, 침잠하는 소녀. 비로소 공명하게 된 서로 다른 자아.
4. 蜜語
Uh-oh 너는 언제나
시린 듯한 맘에
어두운 밤을 매일 데려와 난 익숙해
아름다운 너와 나, then it's okay
Ooh 바래
너의 밤도 아름답기를 난 왜
슬프지만 다시 발길이 닿네
"너의 존재, 나를 위해"
거짓말 해
소녀의 음성은 잔잔하다.
소녀는 소년의 밤을 받아들인다.
어두운 밤, 그 밤이 아름답기를 바라며 속삭인다.
"너의 존재, 나를 위해"
넘어지면 닿을까
(멀어질까)
물러서면 돌아볼까
(버려질까)
손 뻗기가 무서워
괜한 핑계를 대봤어
잃을 게 많아질수록
널 물끄러미 봤어
아침에 머물렀음 해
나 비 맞고 왔거든
이렇게밖에 못해서
미안해 그게 뭐든
그래도 들어줬음 해
다 피해서 가거든
반 지하가 내 위치라
다 위에서 보거든
소년의 음성도 잔잔하다.
소년은 소녀의 아침을 받아들인다.
밝은 낮, 그 낮이 찬란하기를 바라며 속삭인다.
"너의 존재, 나의 위에"
Wanna love me, love you, 계속
뛰는 발걸음은 배속
항상 마음이 급해서
해석 못해 너의 배려
사랑한다 말하잖아
안아줘 더 빨리
계절처럼 몇 번이고 돌아올게 다시
...
미워하게 두지 마
가까워 심장소리가
잊기로 해 그 거리에
울렸던 그 종소리도
돌려줘 나의 시곗바늘
들려줘 너의 마지막을
밤이 낮을 받아들이고 낮은 밤을 받아들인다.
난 이토록 어두운데 넌 왜 그렇게 밝아? 난 이렇게 밝은데 넌 왜 그토록 어두워?
흐르는 하루 속 이해가 사라지던 순간들을 지나,
흐릿해진 밝기를 맞춰본다.
새벽과 황혼의 시간, 밤과 낮이 교차하는 순간들, 흐르는 시간을 잡지 못해 번번이 놓치고 만 순간들.
얼마나 빨라야 하는지, 어느정도로 느려야 하는지, 알지 못했던 변화무쌍한 계절의 변화.
짧아지는 낮, 길어지는 밤. 길어지는 낮, 짧아지는 밤.
봄과 가을이 오면, 같아진 시간의 흐름 속에서는 서로의 심장소리가 들릴까.
멀리 가지 않을게
언제나 너의 뒤에
빨리 가지 않을게
어제와 같은 미래
그러니 더 꽉 안아줘
나의 밤을
그러니 더 꽉 안아줘
나의 날을
닮아버린 속도, 닳아버린 거리, 닿아버린 마음.
5. I
그러니까 그랬으면 어땠을까 해
나의 마음이 흑이든 백이었든 간에
그건 그대로 두어도 괜찮다 말해
또는 섞어서 회색이 되면 어떨까 해
희미해진 경계, 하나된 색, 합쳐진 마음. 흑-백, 낮-밤이 아닌, 회색과 새벽으로 다시 태어난 그들.
살아가는 날에
닳아버린 나래
얼룩처럼 변했지만
아직 너를 갈해
나 이제야 논해 나아감을
수많은 반향을 딛고
너에게 도달해
살아감에 변화란 퇴보가 아니라 나아감을 의미한다고 믿는다. 무수한 상처를 남긴 성장통은 퇴보가 아니라 나아감이다. 생전 겪지 못했던 타인을 만난 후 그를 이해하려는 치열한 노력 끝에 얻게 된 영광스런 상처.
이런 방식의 삶도 있는거구나, 이런 생각과 행동도 있는거구나.
이 사람은 나와 이런 점이 다르구나.
이대로 너의 거울 안에 무너져도 좋아
다시는 너와 구별되지 못한대도 좋아
감히 내가 바란 게 있다면
지우지 말아줘 상처들도
무너져버린 거울 속, 더이상의 구분은 의미없어진 세계. 여기가 안인지 밖인지. 저기가 밤인지 낮인지. 나의 상처는 곧 너의 상처, 소년의 상처는 곧 소녀의 상처. 분열된 자아는 그렇게 손을 잡는다.
길었던 눈보라도 바람도
아무도 가릴 수 없던 네 모습
사랑도 사람도 다시 또
믿지 않을 수 없게 한 이름들
거울 속 아이는 결국 I(나)였음을.
받아들일 수 없던 내 모습조차 내가 받아들여야 할 나이자 내 과거. 그렇게 지우고자 노력했던, 부정했던 어린 시절의 내가 바로 이 앞에 있다. 싱그러이 웃는 천진난만한 모습 뒤에 벌벌 떨리는 손이 보인다.
아니, 웃는 게 아니다. 억지로 웃으려 애쓰는 것 '같다'. 어서 가서 저 손을 잡아줘야지. 잘 견뎌내주었다고, 고생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줘야지. 꽉 안아줘야지, 네 덕분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고, 고맙다고.
나지막이 불러보는 그 이름, 거울 속 아이, 거울의 아이, 과거의 아이, 아픔을 간직한 소중한 I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