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여름이었나? [사람]

감정 연습을 오글거림으로 치부하지 않는 세상이 오면 좋겠습니다
글 입력 2023.04.03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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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울 감정들


 

봄은 두근거리고, 여름은 들뜨고, 가을은 외롭고, 겨울은 쓸쓸하다. 그 어떤 계절도 우리의 감정과 결부되지 않은 수식어를 달고 있지 않을 만큼, 해가 지나고 계절이 바뀌면서 다채롭고 새로운 감정들이 켜켜이 쌓이고 있다.

 

그러다가, 감정의 지층 그중에서도 제일 아래에 깔려 있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지는 날들이 온다. 작년의 나는 이 계절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더라, 어떤 감정이었더라. 오래된 일기장에서 그 단서를 찾으려 하지만, 줄글 사이로 생략된 어떤 기쁨이나 슬픔은 너무나도 현장감 넘치는 것들인지라 '이랬겠거니' 하고 추측으로만 남을 뿐이다.

 

그러다 보면 지층에 깔린 감정도 그리고 그것을 촉발했던 과거의 사건들도 전부 그리워지는 감상적인 순간이 찾아오는데, 문득 이 그리움이라는 감정도 언젠가 그리움의 대상이 될 것만 같다. 갈수록 그리운 대상들은 많아질지라도, 그리움의 감정은 차츰 얕아진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추억에 잠겨 있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해야 할 일을 하고, 그렇게 시간의 단절된 경계로부터 빠져나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 점차 짧아질 것 같다. 그리워서 엉엉 울고 매일 가슴 아파하던 골짜기도 시간이 지나면 각종 퇴적물로 덮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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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숲이 문을 닫은 이유


 

최근 페이스북 K 대학교 대나무숲 페이지가 운영을 종료한다는 공지를 올렸다. 이 페이지는 대학생들이 남들에게 쉽사리 털어놓지 못했던 말들을 마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듯이 대나무숲에 제보하면 대신 올려 주는 역할을 했다.

 

대학생도 아니면서, 당장 대학생이 되려면 해야 했던 공부도 제쳐 둔 채, 대나무숲 페이지에 올라오는 수많은 제보를 읽으며 울고 웃었다. 마음에 드는 글은 스크랩해 두고 왠지 모르게 감수성이 풍부해지는 날마다 꺼내 읽었을 정도다. 짝사랑, 꿈, 우울감, 가족, 다양한 주제로 털어놓는 그 한숨 섞인 목소리들은 결코 정형화된 깔끔한 글은 아니었을지라도 오히려 그런 날것의 감정이 느껴지는 덕에 더 많은 사람의 마음을 감응시켰고 또 위로가 되어 주었다. 다만 막상 대학생이 되고 난 뒤에는 한동안 잊고 있던 페이지였는데, 갑작스러운 폐쇄 소식이 들려오니 괜스레 씁쓸해지는 마음이다.

 

대나무숲은 왜 문을 닫아야 했을까? 그 많던 제보가 점차 줄고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던 이유는, 비단 페이스북에서 인스타그램으로 유행이 이전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만약 그게 유일한 이유였다면 인스타그램과 같은 최신 유행 플랫폼에서도 긴 호흡으로 솔직한 감정을 이야기하는 글들을 찾을 수 있어야 하지만, 아무리 사적인 계정에서조차 그런 글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어쩌면 우리가 감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일로부터 점점 멀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요즈음 인터넷 서핑을 하다 보면 지나칠 정도로 냉소적인 댓글을 쉽사리 접한다. 내가 좋아하는 한 음악 유튜브 채널에서는 플레이리스트 영상을 올리면 사람들이 댓글로 음악을 듣고 떠오른 감정을 길게 적어 두곤 한다. 그런 댓글을 읽으면서 음악을 들으면, 왠지 사연이 깊어진 듯한 음악으로부터 마음을 울리는 충만함을 느낀다. 그런데 그런 댓글에 대해 '손발이 오그라든다', '뭐하냐?', 라며 조롱하는 내용의 대댓글이 점점 더 많이 보여서 자주 마음이 아프던 차다.

 

 

여름방학이 끝날 때까지 답장은 오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여름이었다와 관련된 조롱의 문장들을 몇 개 찾아 읽었다. 그러자 여름이었다는 더 이상 예전의 여름이었다와 같아지지 않았다. 작은 떨림이나 설렘으로 반짝이는 무언가를 한순간 우습고 민망한 것으로 만드는 힘에 대해 앨런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다만 앨런은 그해에 여름이었다를 잃어버렸다.

 

<고독사 워크숍>, 박지영

 

 

대나무숲은 '여름이었다'로 가득 차 있었다. 따라서 우리가 '여름이었다'를 반짝이는 무언가가 아닌 우습고 민망한 것으로 여겨 조롱하게 되었다면, 여름 햇살 가득 받던 대나무숲이 시들어가는 건 어쩌면 시간문제였다. 이전처럼 대나무숲 페이지에 사연이 올라온다 한들 반응은 예전 같지 않았을 것이다. 오글거린다느니, 읽기 귀찮으니 세 줄로 요약해 달라느니, 감정과 감성과 감수성에 극도의 피로감을 보이고, 그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조롱하는 사회라면 '여름이었다'가 설 자리는 없다.

 

대나무숲의 폐쇄가 슬픈 그런 글이 그리워서가 아닌 글로 나타났던 그런 감정들이 그리워서다. 그래서 나는 '오글거린다'던가 '진지충' 같은 단어가 가져오는 폭력성을 마주할 때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의 진심이 짓밟혔을까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고, 어쩌면 이 마음 아파함조차도 비웃음의 대상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선뜻 아파하기도 주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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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에도 연습이 필요해


 

우리의 감정과 그것의 표출은 소중하다. 이렇게 적으면서도, 지나친 감성을 경계하며 그것을 자기 검열의 기준으로 삼기까지 하는 나 자신을 종종 발견한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로, 너무 개인적이거나 과한 표현이 누군가를 '오글거리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노심초사하는 내 모습을 보며, 안 오글거리는 글이 정말 좋은 글인지 고민한다. 왜냐하면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들을 보면, 그들은 자기 감정과 느낌과 생각에 당황스러울 만큼 솔직한 매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감정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감정을 억누르고 꼭꼭 숨기다 보면, 정말 내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도 내 감정이 무엇인지 몰라 표출하지 못한다. 마치 만화에서 주인공이 '솔직한 네 감정을 말해!'하고 내면의 어둠에 갇힌 친구를 닦달하는데, 만화와 다른 점은 내면의 어둠이나 슬픈 사연이 있어서 말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정말 내 감정이 뭔지 알 수가 없어서 말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좋았다', '기뻤다', '슬펐다' 같은 간단한 단어들만 늘어놓다가도, '내가 진짜 기뻤나?'하고 의아해진다. 감정 자체는 일종의 자연스러운 생리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감정을 포착하는 건 자연스럽게 가능한 일이 아니며 품을 들여야 한다. 내 안의 감정을 발견하고 표출하는 연습을 반복해야지만, 중요한 순간에 명확한 자기주장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감정 표현에 그토록 각박한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연습 부족으로 인해 하고 싶은 말을 못 하고 답답해할까.

 

나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누군가 그런 연습을 한다면 적어도 비웃지만은 않는 따뜻한 공간이기를 바란다. 누군가가 절절한 진심을 털어놓는다면, 꼭 그에 동의하고 아주 적극적으로 위로해 줄 필요까지는 없지만, 적어도 조롱하거나 민망하게 만들지만은 않았으면 좋겠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기에, 우리는 모두 무수히 많은 순간 감정의 솟아오름을 경험하고 그것을 타인과 공유하며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러므로 타인의 감정을 비웃었던 누군가라도, 언젠가 다른 순간에는 비웃음을 당하는 위치에 놓일 수도 있다. 그러니 나와 너 모두 존중받기 위해서는, 여름이었다를 여름이었다 그 자체로 바라보고, 감정을 터부시하기보다는 공유하는 따스한 시선이 필요하다.

 

 

[김채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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