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경계, 그 선을 넘어선 찰나의 순간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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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다양한 종류의 ‘경계’가 존재한다. 시간적, 공간적, 사회적, 법적 경계 등 어떤 경계들은 사실 기술과 분류를 위해 자연스레 형성되고, 또 다른 경계들은 목적성과 강제성을 가지고 인위적으로 형성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단계적 관문의 개념인 경계, 개인적 노력의 성취 개념으로 넘을 수 있는 경계 등의 가변적 경계들이 존재하는 반면, 선천적으로 변화가 불가능한 불변적 경계들도 존재한다.
우리는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경계들이 명백히 존재하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기에 이들을 인식하고 파악할 필요가 있다. 시간적 경계의 경우, 한국에서는 20살이 된 순간부터 미성년자를 벗어난 법적 성인이 된다. 12월 31일 11시 59분 59초를 지나 1월 1일 00시가 된 순간부터 법정 성인으로서 새로운 책임과 권리가 주어진다.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에는 날짜 경계선이 있는데 그 선을 기준으로 한 발짝 뒤는 어제고, 한 발짝 앞은 오늘이자 내일이다.
꼭 기록 날짜가 아니더라도, 해가 지고 또 다른 해가 뜨는 순간을 우리는 새로운 하루의 시작점이라고 인식한다. 경기도에서 서울로 통학하거나 출근하는 사람들도 매일같이 지역적이고 공간적인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요리를 잘 하고, 글을 잘 쓰고, 피아노를 잘 치고, 외모가 뛰어나고, 노래를 잘 부르는 등 ‘주변인보다 잘 한다’라고 평가받던 것들이 막상 생계의 수단이 되고, 전문성을 띤 직업이 되고 책임져야 할 일이 되어버리면 한 없이 평범하고 당연한 게 되어버린다. 일반인과 전문가의 ‘경계’에 따라 기준과 잣대가 달라진 것이다. 이렇듯 우리 주변엔 다양한 경계들이 만연하고 이들은 우리의 삶과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다.
종종 사회적인 경계들은 문제가 되기도 한다. 계급과 생활수준의 차이, 그리고 어쩌면 경계. ‘금수저’, ‘흙수저’라는 말이 있듯이 선천적인 가정형편의 차이를 딛고 성공하기 매우 어려운 사회이다. 계급 사이에 절대적 경계가 있으면 안되기에, 인권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여러 제도들과 복지 장치들이 있고 기회들이 주어지지만, 현대 사회에서 그것들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끊이지 않는 고위층 비리들과 자녀들 특혜 문제들과 커지는 소득격차는 이를 뒷받침한다. 있어서는 안 되는 경계이지만 사실 오래 전부터 이미 존재해왔던 것은 아닐까,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또한 법의 인정 범위와 처벌의 수위, 생명 윤리 등, 어디까지를 범죄로 볼 것인가, 어디까지를 인간으로 볼 것인가와 같은 경계들도 항상 논란이 되어 왔다.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하고 사회적 관심을 가져 바꿔나가야 하는 대상도 바로 ‘경계’이다.
이렇듯 우리 주변엔 다양한 경계들이 만연하고 - 따지고 보면 모든 것들을 경계로 치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이들은 우리의 삶과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반영한 문학 작품에서도 특정한 경계를 주제로 하거나, 보편적인 경계들을 반영한 작품들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경계를 넘는 찰나의 순간의 어색함과 부자유함이 이 개념에 주목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살면서 여러 경계들을 넘어왔지만 난 항상 그 순간들이 이상하고 신기했다. 찰나의 순간, 찰나의 차이, 경계의 바로 전과 바로 후. 나는 그대로 쭉 나인데, 이 선을 넘고 나니 전과는 다른 존재라는 게, 어떤 방식으로든 달라지게 되었다는 게 늘 신기했다.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그러했고, 이사를 했을 때 그러했으며, 20살이 되어 대학생이 되었을 때 그러했다. 경계의 직전과 직후에 누군가가, 무엇인가가 반드시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인데 말이다.
사실 지금까지 내가 넘어온 경계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간이라면 자연스럽게 넘게 되는 종류의 경계였다. 앞으론 내가 노력하고 성취해서 넘어야만 하는 경계들, 혹은 넘을 수 없어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경계들을 마주치게 될지, 기대가 되기도 하고 호기심도 든다. 작품 속에서 내가 발견한 몇 가지 경계들에 대해 주목해보고자 한다.
1. 경계를 지나 변화를 겪는 개인
- 김소진,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
주인공 ‘나’는 도시 재개발로 폐허가 된 옛 집을 찾아가 과거 유년시절을 회상한다. 과거 주인공은 욕쟁이 할머니의 짠지 항아를 깬 것을 감추기 위해 눈사람 속에 깨진 조각을 숨겼었다. 이 실수에 대한 두려움으로 하루종일 방황하고 집으로 돌아온 주인공이 발견한 것은 ‘치워진 눈사람’ 이었고, 태어나 처음으로 ‘세계가 나와는 상관 없이 돌아간다’는 깨달음과 함께 상실감을 느낀다.
나는 나를 둘러싼 세계가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짐작하고 또 생각하는 세계하고 실제 세계 사이에는 이렇듯 머나먼 거리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 거리감은 사실 이 세계는 나와는 상관없이 돌아간다는 깨달음. 그러므로 나는 결국 주변으로 둘러싸인 중심이 아니라는 아슴푸레한 깨달음에 속한 것이었다. 더 이상 나를 상대하지도 혼내지도 않는 세계가 너무나 괴물스럽고 슬퍼서 싱거운 눈물이라도 흘려야 직성이 풀릴 듯 했다.- 김소진,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 중
이 작품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사건이 한 개인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과거의 어떤 순간을 기점으로 개인은 성장하고 변화한다. ‘성장’ 자체를 주제로 삼는 성장소설들은 특히 ‘성장의 경계’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이다. 청소년기의 성장 뿐 아니라 정신적, 신체적 변화를 겪는 개인들에겐 모두 그 변화의 계기가 되는 순간들과 경계들이 존재한다. 치워진 눈사람을 발견하고, 태어나 처음 느끼는 상실감을 느낀 순간을 경계로 주인공은 한 차례 성장하게 된 것이다.
2. 꿈과 현실의 경계
- 박민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주인공은 집안 형편에 보태기 위해 지하철 푸시맨, 편의점 등의 알바를 아침 저녁으로 열심히 하며 살아가는 실업계 고등학교 남학생이다.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IMF 경제위기 시절인데, 경제적, 현실적 무게를 견디지 못한 주인공의 아버지는 어느날 갑자기 실종된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이리저리 치이다 잠시 한숨 돌리려 앉은 벤치에서 주인공은 뜬금없이 양복을 입은 기린을 만나게 된다.
다행히 기린은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주저주저 그 곁으로 다가간 나는, 주저주저 기린의 곁에 조심스레 앉았다. 막상 앉으니 – 기린은 앉은 키가 엄청났고, 전체적으로 다소곳하고 무신경한 느낌이었다. 기린은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나는 혼자 울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자꾸만 눈물이 나오는 것이었다. 아버지... 곧장 나는 가슴 속의 말을 꺼냈고, 기린의 무릎 위에 내 손을 올려놓았다. 떨리는 손바닥을 통해, 손으로 밀어본 사람만이 기억하는 양복의 질감이 그대로 느껴져왔다. 구름의 그림자가 빠르게 지나갔다. 기린은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아버지, 아버지 맞죠?
- 박민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중
소설가 박민규의 작품들엔 환상적인 상황, 동물들이 뜬금없이 등장하는데, 이 작품에서도 도심 속에 뜬금없이 등장한 기린을 주인공은 아버지라고 이해한다. 이것이 주인공이 꾼 꿈인지, 현실인지 작가는 이를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는 어디인가? 인간은 견뎌낼 수 있는 범위 이상의 고통과 고난에 마주했을 때 방어기제의 하나로 허구적 상상력을 발휘한다. 이 정도가 심하면 정신적 치료를 받아야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도 평소 가벼운 상상들로 가끔 도피하곤 한다. 종종 환상적이고 정신분열적인 소설들의 주인공 내면 깊숙한 곳에 트라우마나 상처가 존재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문학 작품들은 가끔 꿈과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설정하거나, 현실을 침범하기까지 하는 현실 침범형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아예 다른 세계로 가버리거나, 꿈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진 세상에서 주인공들은 혼란을 느끼기도 하고 배출구와 같은 안도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 작품에선 고등학생 소년이 세상에 적응하지 못해 겉돌던 아버지를 이해하고 이를 통해 성장하는 것을 동물적 상상력으로 표현했다.
3. 삶과 죽음의 이분법적 경계
- 주호민, '신과 함께(웹툰)'
주인공 김자홍은 과로로 사망한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이후 3명의 차사들과 함께 저승에서 49일동안 7번의 재판을 받는다. 한국 전통의 저승 설화를 차용한 네이버 웹툰인 이 작품은 영화로 리메이크 되기도 했었다.
단연컨대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명확한 경계 중 하나다. 비록 생명윤리, 뇌사, 안락사 찬반논쟁 등 그 기준에 논란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죽음은 ‘심장 박동이 멈춘 상태’이다. 개인에게 죽음은 끝일까? 사회적 의미에서 개인의 죽음이란 무엇일까?
남은 이들에게 의미가 있는 죽음도 있는 법이다. 등장인물 중엔 군대 총기사고로 억울하게 사망한 원혼이 등장한다. 그의 죽음은 사고, 범죄와 연결되어 있었고 밝혀져야 했기에 아직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죽음이었다. 실종된 아들을 애타게 찾는 홀어머니와 죄책감에 고통받는 동료 군인들에게 그의 죽음은 아직 끝나지 않은 숙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저승길에서 김자홍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그 의미를 발견한다. 비록 이는 허구적 이야기이고 산 사람 중 그 누구도 죽음 너머의 일을 알지 못하지만, 인간이라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실존주의적 입장에서, 자신의 삶이 유한하다는 이해를 전제로 인간은 자신의 삶에 의미를 찾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은 끝이지만 끝이 아니다. 매우 명확한 경계이고 생명을 가진 존재라면 모두 겪는 보편적 경계이지만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4. 사회적 경계, 기준 설정의 모호성
- 김웅, '검사내전'
실제 18년간 검사로 재직했던 작가가 쌓은 경험과 생각을 바탕으로 법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법이란 과연 무엇인가? 사람들의 합의에 결정된 법은 과연 타당한가? 불법과 합법의 경계를 어떻게 확정지어야 할 것인가? ‘산도박장 박 여사의 삼등열차’ 에피소드에서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것도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문제이다. 국가는 왜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노름이나 약물 중독에 대해 처벌하는 것일까? 국민은 국가의 자산이고 재산일까? 그것은 아니라고 하는데, 왜 국가는 개인이 자신을 파괴하려는 것을 막으려고 할까? 국가가 국민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종속적인 것이 주된 것의 운명에 개입할 수 없는 것 아닌가?
- 김웅, '검사내전' 중
상습적인 노름으로 경찰관들과 안면을 틀 정도로 익숙한 박 여사와 경찰과의 설전을 통해 과연 법이 무엇이고 개인을 어디까지 강제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과 어느 정도의 해답을 제시한다. 개인의 권리가 성장하고 사회적 권위가 하락한 세상에서, 우리 세대에 마지막 남은 권위는 ‘법’이라고 할 수 있다.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헌법’을 근본 토대로 존재하는 법은 가장 큰 강제력을 지닌 제도이고 그렇기에 그 공정함과 타당함은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시 되어야 할 가치이다. 한 개인의 인생, 더 나아가 사회를 운영하는 척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엔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 만들었기에 법도 불완전하다는 회의주의에 빠질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집행하고 처벌을 내려야 하기에 법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 제도적 결함과 허점을 좁히고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할 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공정하게 법을 제정하더라도 그 경계에선 예외와 허점이 생기기 마련이다. 특히 살인, 강도, 성폭력과 같은 흉악 범죄의 경우 국민 감수성과 선고되는 형량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잦다. 현재는 사라졌으나 한때 시행되었던 ‘술을 마시고 기억이 안나면 형량을 오히려 감형해준다’라는 ‘주취감형제도’는 여론의 거센 비난을 받았었다. 보험료를 받기 위해 법의 허점을 이용해 일부러 범죄를 저지르거나, 제도적 허점을 노려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경우도 여전히 존재한다.
이러한 부작용들을 막기 위해 법과 제도들은 더욱 촘촘하고 정확한 경계에 수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며, 법을 넘는 사람과 넘지 않는 사람에 대한 경계를 공고히 하되 융통성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경계를 넘어서
우리는 경계들로 가득한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과거엔 유의미하고 절대적이라 여겨졌던 경계들이 많이 변화하고 있다는걸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개인에게 유년기, 청소년기, 성년기, 청장년기, 노년기의 삶의 경계들은 각각 그에 맞는 역할과 권위를 기대하게 한다. 이 나이때엔 공부를 하고, 결혼을 하고, 취직을 하고...
하지만 현세대들은 그 속도와 틀에 맞는 모습을 지나치게 강요하던 관습에서 벗어나 자신만이 속도와 방향을 찾는 삶을 차츰 지향하고 있다. 여러 세대에 걸쳐 변화하지 않는 고정된 경계들도 있겠지만,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춰 많은 경계들도 변화할 것이다.
성장한 인권 감수성에 따라 성 범죄에 대한 경계가 변화하고, 국가간 협상에 따라 국가 경계가 변화하고, 가족과 타인에 대한 경계가 변화하고, 때론 이쪽 저쪽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모호한 경계들을 마주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들의 삶과 역사를 반영해 변화해가는 ‘융통성 있는 경계’들은 곧 우리 자신, 더 나아가 우리 세대의 거울이자 반영이 되어 줄 의미 있는 자산이 될 것이다.
[박주연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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