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마음의 상처에도 약이 필요하다 [영화]

<어디갔어, 버나뎃>이 그리는 버나뎃의 실패 극복기
글 입력 2023.03.2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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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타는 법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친구와 자전거를 타고 놀다가 건물 벽을 들이받은 적이 있다.

 

울퉁불퉁한 시멘트벽에 부딪혀 왼쪽 손등의 살갗이 까졌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아무 약이나 바르고 밴드를 붙였다. 다행히 피부의 자연적인 재생 능력으로 곧 새살이 돋았지만, 그 자리에는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남았다.

 

어떤 상처도 제때 치료하지 않으면 결국 흉이 지기 마련이다. 사람의 마음도 똑같다. 크든 작든 상처가 나면 재빨리 알맞은 약을 찾아서 발라줘야 덧나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에 난 상처를 치료할 약은 약국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마음의 상처는 얼마나 빨리 회복될지 아무도 모른다. 하루 만에 씻은 듯이 나을 수도 있지만, 맞는 약을 금방 찾지 못해 흉터가 생길 수도 있고, 어쩌면 상처가 났다는 사실조차 몰라서 영영 낫지 않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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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영화 <어디갔어, 버나뎃>은 실패의 수렁에서 허우적대며 살고 있던 건축가 버나뎃이 곪아버린 마음의 상처를 스스로 꿰매는 이야기이다. 자신의 상처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 외면하고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그가 정면 돌파의 길을 선택하고 나아가는 모습은 관객들의 마음에도 용기의 씨앗을 뿌린다.

 

다소 신경질적이고 비협조적이며 무기력한 버나뎃 폭스의 태도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20년 전, 모든 것을 쏟아부어 완성한 버나뎃의 두 번째 건축물 ‘20마일 하우스’가 철거되는 사건이 있었다.

 

고작 한 유명 코미디언의 개인 주차장을 위해 버나뎃의 작품이 희생된 것이다. 그는 한때 건축계의 아이콘이었으나 자기 집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보고 충격에 빠져 결국 LA의 건축계를 떠났다.

 

버나뎃은 시애틀에서 사랑하는 엘진의 아내이자 비의 엄마로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20년 전의 그 사건에 묶여 있다. 그는 자신의 집과 가정에 굉장히 몰두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집 곳곳에서는 빗물이 새고 외벽은 페인트칠이 다 벗겨졌으며 그는 남극으로 가족 여행을 가자는 딸의 말에도 싫은 티를 팍팍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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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이자 같은 학부모인 오드리와 수린은 자기들을 친절하게 대하지 않고 항상 날이 서 있는 버나뎃을 사회 부적응자 취급한다. 심지어는 가장 가까운 관계인 남편 엘진마저도 버나뎃에게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치료를 권한다.

 

그가 묘사하는 버나뎃은 일부러 이웃의 집을 파괴할 환경을 만들고 처방 약을 한데 쌓아 두며 학부모를 차로 치고 그 학부모를 조롱하는 표지판을 설치하는 악마 같은 사람이다.

 

하지만 사람은 보고 싶은 대로만 본다고 하지 않던가. 버나뎃의 마음에 난 커다란 구멍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그의 모난 부분에만 집중한다.

 

버나뎃은 실제로는 담쟁이넝쿨이 벽을 타고 올라와 방바닥까지 자라나자 카펫을 잘라 넝쿨이 자라날 구멍을 만들어주고, 방에 갇힌 반려견 아이스크림을 꺼내주기 위해 주저 없이 창문을 깨는 그런 사람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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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버나뎃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는 전혀 이해받지 못할 때 생각지도 못한 사람으로부터 상처 입은 마음을 위로받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동력을 얻는다는 점이다. 20년 전에 버나뎃과 LA에서 함께 활동했던 건축가 폴은 버나뎃이 불행해 보이자 이렇게 말한다.

 

“너 같은 사람은 창작을 해야 해. 그러려고 세상에 태어난 거고. 그렇지 않으면 사회에 위협이 되지. 네 모든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하나야. 다시 일 시작해. 뭐라도 만들란 말이야.”

 

20년 만에 만난 동료가 한 몇 마디 말은 놀랍게도 버나뎃의 마음에 큰 변화를 일으킨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남극 여행을 피하려고 예약해두었던 사랑니 발치를 취소하고, 자신을 요양원에 가두려는 사람들에게서 도망쳐 홀로 남극으로 떠난다. 어쩌면 버나뎃은 누군가가 자신에게 먼저 이런 말을 해주기를 20년 동안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20마일 하우스가 무너진 일은 네 탓이 아니라고, 너는 실패자가 아니라고.


버나뎃은 그동안 아픈 실패를 겪으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18가지의 계시 중 남은 16개를 그냥 새로 태어난 딸에게 넘기고 무력하게 살아왔다. 그러나 영화는 마지막에 20년 만에 어두운 동굴에서 나와 남극 기지를 건축하며 자신의 세 번째 계시를 스스로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버나뎃의 모습을 보여준다. ‘다시 창작에 정진하기’라는 꼭 맞는 약을 처방받은 그의 표정에는 행복과 기쁨, 만족감이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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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상 속 아주 작고 사소한 실패에도 좌절하고 넘어지기 일쑤지만, 영화 <어디갔어, 버나뎃>은 상처받은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지며 새로운 시작을 마주할 용기를 마음속에 심어준다. 폴이 버나뎃에게 했던 말은 결국 영화가 제자리에 멈춰있는 이 세상의 모든 예술가에게 전하는 응원의 메시지가 된다.

 

지금도 자신의 네 번째, 다섯 번째 작품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 버나뎃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get your ass back to work and create some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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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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