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들어 '영화를 사랑하는 영화'가 눈에 많이 띈다. 올 초에 개봉한<바빌론> 이나 몇 년 전의 <라라랜드>부터 1952년 작 <사랑은 비를 타고>까지, 이 업계의 사람들이 그려내는 영화라는 종합예술은 고통스럽지만 사랑스럽고, 손바닥 뒤집듯 휙휙 바뀌면서도 태양처럼 그 자리를 지키며 언제까지라도 찬란히 빛날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든다.
이토록 이중적인 산업이 아름답게만 그려져야 할까?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은 <이마 베프>를 통해 날 것의 영화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영화 현장이란 아주 낡고, 시끄럽고, 지치는 데다 보잘것없다. '영화를 사랑하는 영화'로 보기에는 일면 악의적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재미있는 점은, 그렇기에 이 작품이 '영화를 사랑하는 영화'라는 것이다.
영화는 마법이 아니다?
과거 프랑스 무성영화의 전설로 일컬어지는 <뱀파이어>의 리메이크를 찍기 위해 홍콩에서부터 장만옥이 날아온다. 이상한 이야기다. 프랑스 파리 노동자의 얼굴로 동양의 여배우를 불러내는 것은 자칫 작품의 의의를 무시하는 엉뚱한 선택으로 보인다.
보조하는 제작진 역시 감독의 선택을 미심쩍어 한다. 르네 비달은 노쇠하였고, 이젠 퇴물의 길로 접어든 옛 거장일 뿐이다. 그들은 그의 흉을 보고, 현장의 분위기와 질서는 적은 예산과 함께 이미 바닥을 기고 있으며, 감독의 까다로운 주문과 서로에 대한 불신이 맞물려 화합의 장이 되어야 할 공간은 고립으로 접어든다. 느껴진다, 이 영화는 버리지도 못할 망작의 어드메에 있을 거라고.
모든 것이 틀린 것만 같다. 결국 감독은 교체되고, 배우는 떠났으며, 남은 거라곤 스크리닝도 해보지 않은 가편집된 짧은 영상 하나뿐이다.
"대체 왜 저 여배우를 기용한 거야?"
쫓겨난 르네 비달 대신 마저 작업을 진행하게 된 후임 감독은 거의 화를 내며 묻는다. 이미 완성된 작품을 왜 다시 만들어야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가 스크리닝실에 앉아 테이프를 튼다. 나오는 영상은 원작을 도저히 떠올릴 수 없다. 그도 그럴 게, 이것이 영화인지 현대미술인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이미지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마법이 아니다. 영화는 테크닉이고 과학이다. 테크닉은 과학으로부터 잉태되고, 의지의 지원을 받는다. 그들 자신을 자유롭게 하려는 노동자들의 의지.
영화 속 흑백영화의 한 장면에서 이런 문구가 등장한다. 테크닉, 과학, 의지.
르네 비달이 추구하려던 작품은 당대 프랑스 영화의 침체와 세계적으로 부상한 홍콩식 액션 영화의 결합에서 탄생했다. 이는 트렌드를 좇고 흉내 내기 급급한 영화산업에 대한 비판임과 동시에, "과학"적인 결합으로도 보인다. A와 B, 아니면 A와 C, 혹은 A와 D,E... 과학은 도전하려는 의지와 새로운 결합, 그리고 반복적인 실험으로 성장했다. 르네 비달의 홍콩 여배우의 <뱀파이어> 역시 도전이자 결합, 실험이었다.
<뱀파이어>라는 작품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새롭게 탄생시키고자 한 비달의 의지는 그를 신경쇠약으로 몰아가게 했지만, 그 의지는 또한 테크니컬한 작품을 탄생시켰다. 장만옥의 위로 선이 마구 그어진다. 온갖 도형이 튀어나오다가, 화면이 잘게 쪼개져 나가는 에러 영상처럼 보이다가도, 단순히 필름에 낙서한 것도 같다. 이렇게 프레임 단위로 그려낸 이미지의 연속은 영상에 신비롭고 예술적인 힘을 불어넣는다. 마법적인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테크닉, 과학, 의지다.
영화는 마법이 아니다?
맞는 말이다. 마법적인 힘을 가질 순 있을지라도 마법은 아닌 것이다. 누군가 뚝딱 요술봉을 한 번 휘둘러 만들 순 없으니 말이다. 제작 상황이 힘들면 힘들어질수록 좋은 작품이란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상황이 잘 굴러가지 않더라도, 만들어진 영화엔 어떤 힘이 있다. 우리를 울게 하거나, 웃게 하거나, 화를 내게 하거나, 지루하게 만든다. 보기만 해도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은 사실 기적에 가깝다.
장만옥, 시네마의 얼굴이 되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장만옥의 존재다.
프랑스 영화의 주인공으로 낙찰된 이 홍콩의 여배우는 프랑스어를 한마디도 할 수 없다. 그런데도 감독의, 혹은 영화의 가장 큰 이해자가 되어준다.
영화는 이미지다. 이미지를 골자로 한 종합예술이다. 그는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감독이 보낸 전작들의 대사를 하나 알지 못해도 이미지에 매혹되어 단번에 타지로 날아올 정도로, 또 라텍스 코스튬의 도발적인 시각의 힘을 몸소 은밀히 체험할 정도로 말이다.
장만옥은 결국 이 저예산 작품에서 잘려 LA에서 거대예산의 블록버스터를 찍게 된다. 저예산 예술영화와 거대자본의 블록버스터, 장만옥이란 배우는 그 모든 작품을 이해하면서도 대표할 수 있는 얼굴이 된다. 가장 원초적인 상징이자 영화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엘리트 의식이 가득한 프랑스 영화계를 비판하며 오우삼을 찬양하는 기자에게 장만옥은 말한다. 하나의 영화만 영화관에 상영될 순 없다고, 영화의 다양성이 각자의 작품에 의미를 불어넣게 만든다고. 결국은 시네마 그 자신이 관객에게 던지는 말인 셈이다. '영화를 사랑하는 영화'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