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무애 無碍 10

사랑에 관하여
글 입력 2023.03.1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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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를 낸들 내가 어떤 위압감이나마 가져볼 수 있었을까. 나는 매력도 없고 힘도 약한 사람이며, 그대들에게 티끌만 한 아쉬움도 줄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한 사람에 대한 예의는 그 사람을 잃을까 두려움에서 나오고, 뭇 사람에 대한 예의 또한 마찬가지인 터. 그것은 예의가 되었건, 내키지 않는 화해의 손을 내밀게 하는 마음인 미련이 되었건, 또 못 이기는 듯이 어색함에 고해보는 미안함이건 다 마찬가지이다. 그리하여, 이런 제반 사항을 미리 갖추지 못하고서 내지른 분노는 예상한 결말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침묵이 오래다. 다시금 천치가 되어 그대들을 졸졸 따라다니기에는 쉽게 던져대던 경멸과 수치의 기억이 진동을 해댔고, 또한 그대들 곁에서 줄곧 불안하고 외로웠던 기억이 손 쓸 수 없도록 무력함으로 나를 가로막았다. 그렇게 그대들과 마지못해 이별한다. 우리는 장차 중학생이 될 때까지 같은 공간에 있어야 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나는 그대들과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지만, 비로소 두려운 이별과 고독을 맞았다. 

 

- 지난 에세이, 무애 9

 

 

매미 유충을 꺼내 들어 손바닥에 놓곤 오래도록 바라보던 일이 생각난다. 5년을 기다린 끝에 한철을 못 간다 하던데, 이렇게 허망하면 안 되지, 더 깊은 땅속에 묻어 덮어보았다. 매미의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좋다. 그것은 5년의 침묵을 지나 보낸 이에게 주어지는 보상이고 그의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땅속을 꿈꾸는 동안, 그가 어느 무더운 날에 이르러 비로소, 생명을 태워 환희하고 밤을 잊은 채 목놓아 울어보리라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그때의 내가 지금을 상상할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수업이 끝난 후 학교의 정문을 지키는 100년 된 보호수, 족히 20미터는 될 법한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 모래사장에서 차라리 혼자 땅을 파고 노는 일이 많아졌다. 내 얼굴보다 커다란 이파리들 밑으로는 송충이도 우수수 떨어지고 두꺼비집을 짓기 위해 파내리는 손끝에는 매미 번데기의 물컹함이 느껴지는 일도 빈번했다. 아이들이 쉽사리 소리를 지르는 것들에 대해 유심한 눈길을 건넸다. 딱히 그것밖에는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요, 내게 소리 지를 일이 워낙에 드물었던 까닭이다. 마음에 들끓는 것들은 항시 입 밖으로 쏘아나가기를 청했으나, 들어줄 이 없는 것은 오직 삭혀야만 한다. 빈 운동장의 가장자리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은 무익한 일이요, 실은 그마저도 누군가 들어버릴까 걱정으로 입은 줄곧 굳어있어야 했다.

 

오래 침묵 속에서 그대들을 바라보았다. 바라만 보았다. 그건 참을 수 없이 지루하고 갑갑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참을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하다. 가슴은 그 안에 차오르는 것들, 기어이 입밖으로 나오기를 원하는 것들이 짓는 울화와 그것보다는 조금 더 커다랬을 두려움 사이를 순환했던 것 같다. 그때 두려움이란, 참지 못해 말해버린들 그 누구도 들어주지도, 공감해주지도 않으리라는 것에 대함, 나아가 그 이후의 초라함에 대함이었을 것이다. 예컨대는 그만 좀 놀리라고 소리 질러버리는 일을 들어볼까, 그렇게 나는 삭혀둔 마음의 요청을 말로써 분출해보았으나, 그것은 여전히 분노 위에 얹힌 채로 태어났기에, 그대들로부터 듣고자 했고, 듣고 싶었던 것, '그래, 미안해, 혹은 알았어' 따위의 것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말로써 짓는 것들은 감정 위에 얹힌 채로, 심지어는 거기 단단히 뿌리내림으로써 태어나기에, 나는 나의 말을 그때 분노로부터 떼어둘 수 없었으며, 이것이 더없이 인간적인 일이라는 이해에 동시에 낭패감을 느껴버리기도 했다. 

 

어쩌면 모든 말이라는 것이 각양각색의 감정 위에 얹혀 있다는 것을 두고, 우리는 거꾸로 이렇게 얘기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말하고자 하는 본능은 감정의 방증이며, 감정이라는 것이 발산되기를 원하는 때 우리가 언어라는 양식을 차용하는 것이라고. 그리하여 우리의 사이에 오고 가는 말이 있었지만, 그것은 사실 감정과 감정의 오고 감이었고, 따라서 네게로 쏘아진 감정, 위의 예시에서 분노라 일컬어진 것은 그대에게 가 다시 분노가 되어 돌아오게 마련이었다는 것이다.

 

그대가 나를 분노케 하였노라, 나는 이제 그대에게 분노를 보낸다, 하여 곧 그대에게서 참된 겸허함을 일으킬 수 있었을까. 내가 그것을 거머쥐어볼 수 있었을까. 나는 그대로 기인하는 분노를 정당하게 보낸다지만, 그것은 언제나 나만의 것, 나만의 정당함이었고 쏘아나간 것은 언제나 그 닮은 것이 되어 돌아오곤 했다. 이 얼마나 부조리함이고 억울함인가, 마는 그것이 법칙인양 내게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며 허탄할 밖에. 그대가 만약 나의 분노 앞에서 작고 겸허해진다면, 이제는 차라리 그것을 염려하리라. 그때 그대가 깊은 곳으로부터 느낄 최초의 감정이자 당연한 것은 또 다른 분노이기에, 나는 그대의 분노를 겸허함으로 바꿔놓은 무언가를 생각한다. 그래 나는 언젠가부터 나의 언어가 그대의 가슴에 닿았을 때 곧바로 자아낼 것들, 필연처럼 생성되고 다시 제 주인을 찾아가는 듯이 당연처럼 돌아오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나의 분노가 그대의 분노로 되어 돌아오는 것, 나아가서는 더 커다래져 버린 채 돌아오는 것을 오래 보았다. 이제야 그대의 이면을 알겠으나, 그때의 나로서는 손쓸 방도가 없는 것이기도 했다. 그대의 조롱을 멈추게 하기 위해, 내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너무 어려운 것이었기에. 그대의 조롱이 나의 분노가 되고 나의 분노가 다시 그대의 분노가 되어버리는 일에 대해 길이 생각했다. 그대의 조롱이 내게서 곧잘 분노가 된 까닭은, 내가 받은바 그대에게 조롱으로, 더 크고 익살스럽고 효과적인 조롱으로 되갚아볼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복수심에 더욱 근사한 조롱으로 되갚아보고 싶었으나, 그대에게로 되돌아 간 것은 다만 복수심에 더불어 열패와 낭패감이 낳은 분노였고, 그것이 그대에게 닿으면 한 큰술 복수심을 더 얹어 곧잘 되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그러니 결국엔 누구 하나 침묵할 밖에. 그 끝에 기다리는 것이 주먹다짐이거나 끝도 없는 복수심의 굴레라고 한다면. 영영 복수심의 굴레를 오가다간 결국 주먹다짐으로 누군가의 패배가 결착나거나, 결국 한 쪽이 먼저 침묵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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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침묵할 밖에, 다만 침묵하는 이는 언제나 패배하는 이다. 패배하여 침묵하는가, 침묵하여 패배하는가는 중요치 않다. 그것은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침묵하는 사람은 자주 내가 되어야 했다. 나는 분노와 그 이전에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그대들은 나 없이도 그토록 즐겁더구나. 그대들은 어쩌면 내가 기어이 화를 터트리기 직전과 직후 모조리 그대로였을지도 모르고, 나 홀로 예민하여 그 순간에 오래 남아있었던 것일지도 모르지. 내가 터트린 분노에 제 발 저려 그대들을 떠나간 것일지도 모르지. 그러나 결국 내가 분노를 터트려버린 것은 수치스러웠던 까닭이라면, 땅바닥에 흘러버린 것을 주워 모아 아무것도 없던 일인 양, 다시 그대들에게로 돌아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대들은 사실 애초 신경쓰이지도 않았다는 듯이 내게서 관심을 거두었다. 그대들은 여전히 유쾌하였고, 나 홀로 그대들을 의식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보이는 그대들을 부딪쳐 돌아오는 나의 자화상을 부끄러워했던 것 같다. 결국 그렇게 될 수순이었더라면, 복수심과 패배감이 농익어 이윽고 터져버리기 전, 좀 더 일찍 이별할 수는 없었을까.

 

지금과 그때, 다른 것이 있다면 오직 고독함에 대함 뿐이다. 이제는 너무도 친숙한 것이 되어버려 나는 서두르듯 이리로 돌아오지만, 그때 혼자임은 견딜 수 없이 서글픈 것이요, 마구 눈물 같은 것을 퍼올리는 것이기도, 그 자체만으로 초라해 어딘가 부끄럽기, 소위 쪽팔리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대들이 조롱하고, 야속하고, 서서히 복수심과 패배감을 떠민들 선뜻 고독으로 나서보기 어려웠다.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에게 끊임없는 손을 뻗어내고, 서로 닿아 마침내 맞잡은 손에 힘을 주어 무리를 이루고, 벽을 쌓는다. 그리고 거기에다 우정이라는 이름을 새기곤 이 단단하고도 안정된 착각, 고독을 물리칠 이 힘을 두고 우정의 증거라 일삼곤 변치 않을 것으로 믿고자 했다. 아이들이 무리를 찾아, 타인을 찾아 안정감을 느끼고자 하는 것은 사실 그것보다 먼저 그의 영혼이 고독을 두려워하여 몸서리치는 일이다.

 

아직 고독 안에 가만히 처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을 때, 억지로 떠안은 그것이 얼마나 막막한 것이었는지를 기억한다. 왜 그래야 했을까. 나는 아직 그 까닭을 다 알지 못하지만, 그것이 마치 누군가 정해주신 양 너나 할 것 없는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안다. 후에 고교생이 되었을 때는 나 또한 누군가 벗 없이 홀로 방황하는 모습을 두고 안쓰럽노라고, 하지만 그것은 너의 운명이었노라고 오만히 생각한 적이 있다. 내가 스스로와 타인의 고독을 두고 이리 가혹히 생각한 까닭이 어디 놓여 있는가. 벗없음이란 그대 영혼의 가치를 저울질하는 척도가 돼, 스스로 택한 것이 아닌 떠안긴 고독이 오직 그대의 인간됨을 엿보이기 때문인가. 혹은 사람의 자식인 이상 누구나 사람을 필요로 해, 곁에 아무도 없는 이는 그 사랑이 지어내는 그림자를 흐느끼게 마련인 까닭인가. 내가 그대의 고독을 연민하는 까닭은 오만함이었으되, 그보다 먼저 고독을 본능처럼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대들도 나에 대해 마찬가지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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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꿈 꾼다. 오직 평생 꾸어본 꿈이 있다면, 누군가 개중 하나만 대어보라 말하실 필요도 없이 이뿐이라. 동우가 내게 그러했듯이 내 마음 날 같이 아실 이. 나를 불안에 떨지 않게 하시고, 내 비대해지고 예민해진 신경의 촉수를 재우시고, 쉬게 하시고, 깨지지 않는 평안을 주시고,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만큼 거꾸로 날 사랑하실 이. 만약 그럴 수 없다면, 그대의 사랑이 조금이나마 크거나 작거나 상관없이 무던히 곁에 오래 남을 이. 나는 그대의 애정이 일순 식어버릴까 염려하지 않아도 좋고, 내가 그대를 필요로 하는 만큼 그대가 나를 필요로 하며, 그대의 마음에 의지와 무관하니 어떤 섣부른 감정, 애증과 피치 못할 권태와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못내 아쉬움 같은 것들이 피어나 매달린다면, 스스로 그를 아파하며 역설로 뒤바꾸어버릴 사람. 같이 서되 적당히 떨어져 각자가 각자인 채로, 서로 다른 것에 울어도 좋으니 같은 것에 웃을 수 있고, 모든 순간을 감사할 수 있는 이. 떨어져서도 가깝고, 지척에서도 은근한 사람. 그리하여 오랜 옛날 가슴 안에 묻히어 사라진 내 인간에 대한 애정, 그 믿음을 다시 세울 이. 마침내 마침내 어느 날 떠나가신다면, 이별을 가장 큰 환희로 바꾸어낼 지혜로운 사람을 꿈꾼다. 사실 이와 같지 않아도 좋다. 나는 내가 그려볼 수 있는 것만을 그려볼 수 있기에, 멀리서 오고 있는 그대의 눈썹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 오직 기쁘게 기다린다.

 

바라는 바는 사람을 완전히 사랑하는 일이다. 고독에 편히 안온히 담기어 있는 지금조차 여전히 그 꿈 속이다. 그런 사람이 2명만, 아니 3명만, 아니 5명만 있다면... 5명이 안 될 값이면 3명이라도, 그래도 어려울 값이면 2명이라도 좋으니 나는 그 꿈 속이다. 사람은 사람을 꿈꾸지 않는가? 그대가 겸연쩍음에 나는 그리 애타게 사람을 부르지 않노라 하신들 나는 믿지 않을 것이다. 그대도 다 모르는 사랑이 그대를 찾은 순간 온통 기뻐하심을 믿는다. 그 사랑이 하늘에서부터 햇살처럼 내려와 피어나건 땅으로부터 싹으로 움돋건, 어떻게 오는가에 관계없이, 나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얼굴 없이 빛나는 형상이 꿈처럼 싹처럼 잉태되어 있으리라 믿는다. 아직 눈과 코와 입 없이 거기 먼저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믿는다. 거기 가져다 대고 재고 그려볼 만한 어떤 눈썹도 가지고 있지 않으나 일찍이 너무 긴 기다림에 다 잊혀버린, 애초 그런 기나김을 선사하는 알찬 힘과 꿈과 사랑. 그대도 모르나 그대가 바라는 어떤 얼굴들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장차 단 한 번도 본적 없는 모습으로써 그대에게 나타나시리라 생각한다. 그대의 기다리던 사람을 발견하는 찰나에, 곧잘 편입되어 그대의 마음에 현현하리라, 이제 오래도록 또 알 수 없도록 기쁨이자 초조함이었던 빛무리는 그 사람의 눈과 코와 입과 눈썹을 하고서 그대 안에 태어나리라고 생각한다.

 

이제 우리는 이토록 극적인 만남을 고대해보기에는 머리가 굵어버렸다지만, 만약에 또 만약을 기하여, 우리 영혼에 쓰인 가시로 된 면류관이 시들고 울타리는 허물리고, 한 자 깊음도 갖지 못하는 언어가 이제 얼마간 낮아버린 장벽을 뛰넘어 그대에게 온전히 가고 또 나에게 오고 한다면, 그땐 기적처럼 어떤 그대를 만나보리라. 그리고 일순간 이 안에 자리잡아버리는 것이다. 이런 빠르기라니, 정말 그것이 온전히 바깥으로부터 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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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만약 그대의 참사랑을 만났을 때, 나는 그것이 그대의 이지를 먼저 사로잡고서 그대의 영혼을, 마치 상견례에서 시부모와 장인어른을 설득하듯이 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다음에 비로소 마음의 창을 두드리는 그런 점잖고 새초롬한 수순이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은 화살처럼 먼저 와 꽂히고, 다만 사로잡힌 마음에 대한 못내 두려움으로 그의 영혼과 이지가 쭐래쭐래 전전긍긍 뒤따르는 은유를 띠고 있다. 아이처럼 서두르려는 그대의 마음을, 그대의 이지가 낚아채고자 하리라만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대에게 사랑과 기다림이 잊혀졌다 뿐이요, 진정 그 이를 알아보는 순간 이처럼 기쁘리라. 아이처럼 그러하리라.

 

 고독한 사람, 그대도 마찬가지, 아니 그대가 더욱 그러리라. 그대야말로 크고 높게 사람을 꿈꾸는 사람이다. 그대가 이 사랑을 잊어버리기에는 매일 심장이 가리켜 알려주었을 것이니 그대는 안다. 한시도 빠짐없이 그러하다. 하물며 그리움이 더 오래 깊어 버리면, 곁에 선 그 누구라도 사랑하고 싶어지듯이, 사람을 이처럼 작고 겸손하고 초라하고 곤궁하여 어엿비 만드는 것이 무엇이냐. 이렇듯 그대를 아프게 쏘아대던 것이 무엇이냐. 그 자리에 다른 어떤 것을 가져다 놓으련들 맞아들지 않는다. 그것은 내 몸부림이기도 했다.

 

아직 여물지 못한 이가 고독한 때, 느끼는 수치와 슬픔은 역설적으로 사랑에 의함이리라. 더러는 고독 속에서 피어나는 짓무르는 감정들이 가시를 돋친다 한들 그마저도 사랑 때문이리라. 가시가 돋아난 그대조차도, 이제 모두 필요 없다고 말한 누군가조차도 처음부터 인간에 무심할 수는 없는 법이니. 그리 호랑이처럼 태어날 수도, 거듭날 수도 없는 법이라, 잔뜩 웅크린 채 인간에 적의를 불태우는 그대는 너무나 큰 절망과 실의, 사람에 의한 상처로 하여 깊이 불신 속에 있다지만 그것이 어떻게 끝내 진실한 무관심으로 변모되기를 희망할까. 어떻게 극복의 대상으로써 돌멩이처럼 변모되길 기대할 수 있을까. 그대가 오래도록 그렇게 아프다면, 심지어 그대에게 그 가시가 아주 무디고도 익숙한 것이 되어 이제는 완연한 체념 속에 들어서 있다 한들 이 모든 것은 그대가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고독자로서, 사자와 호랑이처럼 나지 않았더라면, 그리하여 그대의 온갖 나약함이 있어 그대에게로 어떤 강인함을 강권하듯 떠밀었더라면, 나는 그대가 실은, 또 여전히, 또한 꾸준히, 사랑하는 사람이리라 생각한다. 그대의 나약함은 사랑이 아니고서는 그 연유를 찾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대에게 주어진 운명, 제반 상황과 환경, 물질적인 것들로 인하여 느끼게 되는 것을 제외하고서는 그대를 아프게 하는 것이란 거진 반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대는 왜 사람으로 아파하는가. 그리 오래 아프고도 왜 아직 거기 그대로 남아 있는가. 그만큼씩이나 오래 그러했더라면 염증을 느끼며 일체 내던져버릴 수는 없었는가? 그대가 그대의 학업에 대해 그러했더라면, 과제와 공모전에 대해 그러했더라면, 혹은 사회생활과 업무에 대해, 또 쥐꼬리 같은 월급을 모으고 지출을 줄이며 저축하는 것에 대해 지긋지긋한 염증을 느꼈더라면... 그랬더라면 오래 미련하다가는 일체 내던져버릴 수도 있었듯이, 다 포기하는 듯이 버려낼 수는 없었는가?

 

어떤 이는 말했다. 나는 더 이상 사람을 기대하지 않노라고. 사람에 지쳤으며, 그 전에 사람을 구하는 자신에 더없이 지쳐버린 나는 이상 그를 필요로 하지 않겠노라고, 내가 그러겠노라고 선언했다. 그는 그때 자기 자신에 대해 외쳤을 것이다. 끊임없이 갈구하는 마음을 부정하기 위해 그는 절박하거나 지쳐 헤져버린 마음으로 그랬을 것이다. 그런 그대를 보았고, 마찬가지인 나를 보았다.

 

돌멩이처럼 되어야 한다고 했지. 두려움이건 갈구함이건 사람을 나약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초월하고 극복하기 위해서, 극복의 대상은 마침내 아무것도 아닌 것, 돌멩이가 되어야 한다고 했지. 그대에게 마침내 사람은 돌멩이가 되었는가? 바라보아도 아무런 감정을 일렁이지 않는? 곁에 단 하나 없더라도 일점 생각조차 길어올리지 아니하고, 곁에 숱하게 있더라도 마찬가지인? 발을 채는 성가신 돌멩이처럼 되어 있던가? 바닷가의 모래들에 그랬고, 냇가의 조약돌에게 그랬듯이? 그리하여 또한 그대가 한 개의 돌멩이처럼 되어 있던가? 아니지 않은가. 그것을 피하고 외면하려는 나의 조용한 몸부림만이 무성히 일렁이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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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대가 버려낼 수 없는 이것에 대해, 왜 그대는 도리어 잡아보려 하지 않았는지를, 누군가 내게 꾸준히 물어보았으나 그때 답하지 못했던 것을, 나는 고독한 그대에게 되묻지 않겠다. 왜 그대는 그리 사람을 좋아하면서 사람을 멀리하느냐, 어려워만 하느냐, 심지어 적의를 내비치느냐고도, 그것이 그대를 아프게 하지 않느냐고. 미소를 지어보아라, 그대가 그리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 걸맞는 마땅한 것들을 행하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겠다.

 

내가 이다지 사랑한다 하여, 그대에게 사랑을 주는 올바른 방법과 그대의 사랑을 구할 지혜마저 미리 갖고 태어나지는 않았기에. 그대의 사랑은 그 마음 자체로 이미 완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마음과 함께 태어나, 고로 그대에게 처음이자 끝내 마치지 않을 시험이 된다. 우리는 그런 오랜 시험 위에 놓여 있다.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원하는 그대, 그대의 마음에 지치지도 끊이지도 않을 그 이끌림을 두었으니 그대는 장차 닿아볼 때까지 헤맬지어다 하고, 신은 명한다. 점지했다.

 

또 사랑은 그 마음 자체로 이미 차분하고 우아하고 아름답도록 태어난 것만도 아니었으니, 그것은 태초에 위험한 불꽃과도 같았다. 예찬할만한 것, 뭐랄까, 곱고 안온하고 수더분하고 애처롭기만 한 것,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는 차라리 다소곳한 눈물을 뽑는 것이라기보다는 불길 같이 타오르는 맹렬한 힘이었다. 가지고 싶은 것에 대해 그대가 느끼는 것과 같은, 심지어 사랑은 개중 으뜸이니. 그대는 애증을 이해하는가? 너무 사랑하여 증오하는 것을 말이다. 사랑하면 완전히 가지고 싶어진다. 손에 꽉 쥐고 싶어지고, 언제든 꺼내 보고 싶고, 빼앗기거나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잔뜩 예민해지지. 심지어는 자신이 원하는 형상, 원하는 모습 그대로이기를 바라는 지독한 집착이자 오독으로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나아가서는 그 휘청이는 마음을 이기지 못해 폭력이 되어 떨어져 버리는 것도 보았지. 나는 그것을 두둔하지 않는다. 그때 그 사람의 사랑은 스스로 경멸이 되어버리거나, 꼭 그러해야 한다. 다만 사랑이 그토록 강렬하야 불길한 힘마저 내포하고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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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오래되면 썩는다. 구한 사랑이 오래되면 권태처럼 썩어나거나, 한 톨도 구하지 못한 사랑이 마음 속에서 부패처럼 짓무르기도 하지. 미안하다, 사랑에조차 이런 말을 해서. 하나 나는 사랑을 말해봄에 있어, 그저 두어도 좋고, 바라보기만 해도 귀하고, 끝까지 찬양해볼 마음이라고만 할 수가 없다. 그렇게 아름답기만 하다고 말할 수가 없다. 세상 온통 사랑하는 이라면, 고개 돌린 어느 곳이나 넘쳐나는 기쁨과 또 기쁨만이어야 할 텐데, 아니지 않은가. 상처를 딛고 일어서 또다시 사랑으로 나서는 명랑하고 용감한 사람들이야 많지만, 단 한 번도 사람에 아프지 않은 사람이 없지 않은가.

 

사랑은 오래되면 썩는다. 구한 사랑에 대함, 권태는 다른 적당한 때에 말해보련다. 구하지 못한 사랑에 대해 얘기해야지. 그것이 피치 못해 침묵했고, 또 고독했던 그대들과 나를 관통하는 것일 테니까. 크고 높고 지나친 사랑을 품은 사람은 외로워진다. 혹 부담스러워, 또는 미안하여, 혹은... 혹은 유치하다고 여겨 그 사랑을 쉽사리 받아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이 큰 사람은 아무렴 크게 사랑하고 그만큼 사랑받고 많이 행복할 사람인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사랑은 선물이 아니라서, 그 사람의 받아볼 까닭과 안아볼 너른 마음을 먼저 필요로 하므로. 사랑은 먼저 주는 이 오직 그 사람의 기쁨이요, 받는 이에게는 마음의 짐이다. 그래서 일방적이기가 어렵다.

 

물론 일상 속의 우리 사랑하는 모습을 겨누어 말한 것이 아니다. 일상 속의 사랑, 그 이면에는 위와 같은 것들이 이미 잘 녹아들어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대의 사랑을 던져보기에 앞서 이미 조심하기를 능숙히 해내고 있지 않은가. 그대에게 내 사랑을 던지기 전에, 그대도 날 사랑하게끔 행하지 않던가. 심지어는 사랑을 던지는 것에 너무 깊이 두려운 누군가는 사랑받고자만 행하지 않던가. 내게 그대 사랑을 던지면, 그때 나의 것을 조금 보여주겠노라, 하며. 또한 이 사랑을 안아 들 만큼 네 마음에 공간 있는가 섬세한 눈길로 파악하기도 하고, 혹은 네 안아볼 수 있을 만큼만 잘라내어 건네기도 하지. 나머지 부분은 숨기어 둔 채로. 더러는 너무 조심하느라 꽁꽁 숨겨버리는 경우도 있더라마는, 내 이야기이긴 한데, 까닭은 그것이 무턱대고 풀어헤치기에는 부담스러운 짐이자, 자칫 그대 자신의 실망이 된다는 사실을 이미 학습한 탓이다.

 

지금 사랑 속에 있는 자, 그대는 어쩜 이렇게도 이야기할 것이다. 나는 나의 사랑에서 한없이 이타적인 그 마음을 느꼈다. 놀라운 힘을 보았다. 나는 나의 사람에게 아무런 조건도 보답도 바라지 않고서 그리 했다. 그대의 사랑은 앉을 자리를 구해 둥지를 트곤 행복해하는구나. 그것을 짐이라고 하는 내 말이 썩 유쾌하지 않겠지. 하지만 그대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마저 그대가 지금 느끼는 것과 똑같은 걸 느껴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차가운 사람에게 그대가 선사해볼 그 이타, 그 이전에 사랑이 반드시 선물이 돼줄 수는 없기 때문에. 여전 나는 그렇게 싸늘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하신들, 만약 그대에게로 어떤 누추한 이가 찾아와 그대를 그저 사랑하노라, 나는 그대를 위해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면, 그대가 아마 가장 처음 느끼게 될 그것, 그 불편함이다.

 

지금 사랑하는 자, 그대 중 어떤 이는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왜 너는 그러지 않니. 너는 입으로만 사랑을 말하지만, 내가 아무것도 느껴볼 수 없지 않니. 나는 너를 사랑하며 외롭고 괴롭다. 어쩜 너를 사랑하여 그렇다. 그 마음이 그대가 사랑에 함께 떠안긴 짐이다. 주는 사랑에 동시에 생겨나는 받고자 하는 사랑. 내가 이리 너를 사랑하는데, 왜 너는 그만큼 하지 않니. 왜 나는 너를 이토록 아름다이 여기는데, 너는 그러지를 않니. 아마 모든 사람의 마음은 그대의 토로를 곧잘 이해하리라. 물론 의식마저 이해하여, 곧잘 이해한다고 말해오지는 않겠지만.

 

그 전에 언약이 있었다. 연인이 되었건 친구가 되었건, 우리는 이제 서로 사랑하기로 해, 어여쁜 언약이 먼저 있었음에, 기울어진 균형 내지는 변화하는 사랑의 크기 앞에서 느끼는 그대의 슬픔과 그 안에 함의된 어떤 요청들은 그저 투정이 아니며, 터무니없는 것도 아니고 그대만의 이기도 아니다. 다만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마음을 그대가 언약의 상대에게만 선별하여 느끼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언약이란 너와 내가 서로 사랑을 주기로 또 받기로 해, 나는 너의 마음을 짐으로 여기지 않고 너 또한 그러기로 해, 하는 무언의 약속이기 때문에, 사랑의 짐에 있어 조금 더 기꺼울 수 있는 것이라지만, 그 외 언약을 맺지 않은 사람으로부터는 이런 것들을 조금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쩌면 언약이라는 것은 조금 더 솔직하고 용감해지고 가까워지는 한편, 그 이면에 따라 생기는 구속감과 보상심리, 짐과 같은 것을 받아들이기로 하는 무언의 약속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주는 사랑에 따라 생겨나는 받고자 하는 사랑, 그것은 분별없이 생겨나는 것이다. 다만 언약의 상대에게만 조금 더 기꺼울 뿐, 그래서 그대들은 어떤 사랑을 적게 하려 노력하는 것이겠지. 나는 보았다. 그대가 이끌림을 느끼되, 그대가 바라는 무언가를 돌려줄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그에게 얽매이지 않기 위해, 정확히는 사랑을 갈구하지 않고, 구한들 구한만큼 받지 못한 것에 대해 아파하지 않기 위해 부러 적게 사랑하고 더 적게 주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은 다만, 사랑은 그대만의 기쁨이요, 받는 이에게는 짐이었다는 것이다. 받는 이가 다시 그대를 사랑한다면 기쁜 짐일 테요, 또한 그대도 기쁘게 짊어질 테다.

 

서로 짐을 맡겨둘 수 있더라면 더없이 좋겠지.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너도 나를 사랑하면 우리는 각자 짐을 떠 안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사랑을 한다, 마음껏 그러한다고 얘기하는 것 같다마는 다만 여전, 어느 한 쪽이 너무 커서는 결국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져버릴 테지만. 사랑하는 자, 자신의 주는 사랑만으로 오직 기뻐할 수 없다면, 한 톨 돌려받지 않아도 괜찮노라 말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순수하고 무결한 마음이면서도 마음의 짐이요 참으로 무해한 빚이다.

 

생뚱맞은 비유이지만, 나는 강아지를 어려워한다. 나를 향한 하염없는 사랑을 내가 되돌려줄 자신이 없을 때면, 참을 수 없이 미안해지거든. 내 앞에 발을 모으고 앉아서, 올려다보는 고개에는 참으로 투명한 눈빛에 사랑이 흘러넘친다. 까불거리면서 무릎에 손을 올려보기도 하고, 제자리를 퍼드덕 뛰어 맴돌다가는 다시 내 앞에 가만 앉아서 지긋이 바라보기도 하지. 강아지는 그렇게 조건 없이 사랑을 주면서도, 그만큼 나를 바라고 기다린다. 오직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것, 강아지의 눈은 내가 바라보기에는 너무 아프다. 내가 그만한 걸 돌려줄 자신이 없어 차마 발을 돌린다 한들 그 자리에 계속 앉아서 하염없기 때문이다. 또는 어버이의 가 없는 사랑이 가끔은 내 마음에 짐이 되듯이, 이제 둥지 바깥으로 보낸 자식놈이 못내 그리워, 목소리가 듣고 싶은들 쉬이 전화하시지 않고, 내려오라고 말해보고 싶어도 끝내 저어하시는, 그 마음에는 사랑에 앞서, 이제 너무 오래 익숙해진 조심스러움이 가득하다. 이 사랑이 부담스러운 짐일까, 당신들은 너무 많이 보고 느끼고 살아버린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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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모든 존재자가 똑같이 공유하고 있는 사실됨이라 말없이 이미 아는 것이고, 이렇듯 점지되어 있는 원리이다. 다만 그 원리를 장차 믿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어, 나는 이제 구하지 않고 주지도 않는다, 언젠가부터 내 안에는 뿜어져 나가려는 마음이 없고 즉 사랑이 없노라, 고로 더는 믿지 않노라 하신다면, 그대가 내 글의 주인이다. 그대도 한때는 사랑했을 테니.

 

너무 크고 높고 지나치게 사랑하는 자, 그대는 한동안 외로울 운명이었다. 그리고 사랑은 오래되면 썩게 마련이지. 안착할만한 누군가의 마음을 찾지 못한 사랑은 그렇게 차차 썩는다. 그대를 작고 초라하고 외롭게 만드는 힘, 외로운 그대를 더욱 외롭도록 이끄는 힘이고, 겨우 억눌러 볼 수는 있으나 잊어보거나 잘라내거나 극복해볼 수 없는 그 힘, 부패하는 사랑.

 

고독한 자의 마음 속에는 사랑이 썩어가고 있다. 부패하고 짓무르며 퀴퀴한 것들을 자아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대는 이것마저 이해하는가? 그대를 성난 바람으로 화하는 것이 그대의 부패하는 사랑, 즉 그 이전에 사랑하는 원리에 있었다는 것을? 그대가 바란 것이 그토록 높거나 깊고 어려운 것이었던가. 내 말을 들어줘, 그리고 내 이름을 부르고, 사람 속에 있는 나를 이따금 찾아줘, 꺼내줘, 이 정도가 전부 아니었을까. 다만 내가 너를 부르는 그 마음의 깊이와 빈도로, 이것이 어려움이었겠지. 그대는 불리우고 싶었으나, 그 전에 불러볼 이름 하나 없었다. 동우야, 찾아 외쳐볼 이름이 내게서 사라져버린 것처럼.


 

[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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