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무애 無碍 9

수치와 경멸
글 입력 2023.03.01 15:55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부끄러움이란 어디서부터 불어오는 것이었으며, 그것이 대관절 무엇이었는지를, 나는 오래도록 생각해왔다. 왜냐하면 내가 그 부끄러움의 한가운데에 오래 표류해 있었기 때문일 테다. 오래 배기어선 한 시도 떠나지 않은 수치란 마음속에서 절로 바다의 이미지가 되어, 나는 아무리 애타게 바란들 떠날 수 없었고 어느 날엔 차오르는 의지와 결연함으로 맞서 거슬러 노를 저어도 보았겠으나, 결국 한나절도 채 가지 못하는 구도의 감각이란 돌아온 자리에 오히려 그만큼의 좌절감과 낭패감만을 남기게 되다. 차라리 눈 감아 도망치고도 싶었지만, 한순간조차 잊어봄으로써 도망칠 수 없었다. 수치는 물론 그대들로부터 비롯되어, 그대들로부터 나의 마음으로 불어든 최초에 바람이었으나, 그 후로부터는 내 가슴 안에 있어 마치 저 홀로 의지를 가진 것마냥, 나와는 무관하듯이 서고 지는 까닭이다. 


...


이에 나는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수치심은 공황감을 일어 내면을 혼탁하게 만들고, 그 어떤 사안에도 집중치 못하게끔 의식의 대지를 뒤집어엎는 강렬함이라지만, 그것도 결국에는 익숙해지는 수순을 밟는다. 나는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차차 익숙해져 얼마간 굽어볼 수 있는 스스로를 대하여, 완전한 침묵 속에 묻힌 나는 이제 묻는다. 나의 부끄러움이란 어디에서 불어 들어 이리도 꾸준하고 끈질기고 잊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느냐고.

 

- 지난 에세이, 무애 8

 


부끄러움이라... 실로 오래도록 내 곁을 따라다녔던 여러 가지 중 하나. 하나의 감정을 오래도록 느끼다가 보면, 문득 그것이 친숙하면서도 낯선 것으로 다가오는 때가 있다. 눈 떠 의식이 동작하는 매 순간 있어 심장 한 켠에 매달리곤 그 성가신 무게감을 드리웠으니, 그것은 가는 어느 곳에나 있어 내게 속삭이는 것이다. 한편 모든 것을 풍화시켜버리는 시간은 장차 그 낯설고도 버거운 것이 가지는 기피감, 그에 비롯되는 타자성마저 흐려버리나니, 이때 흐려버린 것이란 마치 축객하는 마음, 내 마음은 마당이요 네 깃들 곳 없으니 부른 적 없는 너는 아주 가거라 하는 그런 마음이다. 심장을 계속이 찔러대 매 순간 의식을 곤두세우는 불편한 손이었건만 시간은 그 모서리와 경계를 아주 조금은 깎아내 겨우 참아볼 만한 것으로 변모시키고야 마는 것이다. 차피 여기 들어차선 아니가려는 놈, 보내련들 썩 물러나지도 않을 고얀 놈, 그럼에도 영영 둥글어 친숙한 것마저 되어볼 수 없는 그 아픈 손이란 이제 어떤 시간 끝에 이르러서는 가끔씩만 그 성가신 배타성을 상기시키곤 한다. 그렇게 적당히 영원할 것처럼, 또 영원히 낯설 것처럼 궁근다. 


요는, 그토록 오랜 식객이었다는 것이다. 축객한들 좇아나지 않고, 마침내 거두련들 거두어지지도 않는. 우리의 심장은 그 섬세한 섬유의 질감과 같이 보드라운 것만을 소유할 수 있다. 물론 이제 와선 그 보드라운 것마저 완전히 품어서 가져볼 수 있더랬는지 조금 의문이 든다만, 날카로운 것들이 깃들어 담기기에는 너무나 연약하다는 것만이 분명하다. 가을바람이 들어 물큰해진 홍시처럼, 반을 갈라 얄궂게 펼치어 보면 다홍색의 섬유질이 야들야들하니 떨고 있을 것이다. 심방이란, 모든 지속되는 감정이 기거하는 심장기관의 안쪽 편으로는 겨울철 쇠붙이와 같이 쨍하니 차가운 것, 칼날과 같이 서슬 퍼렇고 예민한 것, 혹은 불길하도록 질퍽대며 모든 것을 짓무르게 만드는 시커먼 부패를 담아보기에 너무나 무르다. 깃들어버린 모든 차갑고도 어둔 것들을 삼키어 소화하길 기대해보기에는 잠깐 머금어보는 것조차 버거워하더라는 것이다. 그 내벽에 살짝 부딪는 것만으로 그여버린 생채기에 끊임없이 아파하더라는 것이다. 


수치, 내 오랜 숙명. 나는 여기다 기꺼이 과장스런 언어를 가져다 붙인다. 자주 수치스러워야 했다. 왜 그래야 했는지는 다 알 수 없다. 그때 나의 지혜가 나와 그대들을 관통할 수는 없었기에, 다만 짐작 가는 아주 자그마한 단편들만을 이제야 유추해볼 수 있을 뿐. 지금에 생각하기를 그것은 결과론적이긴 하나 어떤 운명의 궤적을 따른다. 나는 이제부터 아주 찬찬히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내가 믿는 운명의 관점하에 이 모든 것은 필연이었다. 즉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든 순간은 필연이었으며, 이제 그 시간의 인과를 억지로 늘리어 미래에 가져다 붙인 다음, 또 다른 필연을 그려보고자 한다. 내가 이미 머릿속에 한번 그려본 그것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데에 성공한다면, 정말로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수치, 내 오랜 벗이자 환영. 수치는 낙인처럼 영혼에 와 박힌다. 그대도 아시는가? 숱한 이들로부터 받는 멸시와 업신여김과 배척과 그네들에게는 짓궂은 장난이었지만, 유약해진 나의 자존감을 한없이 끌어내리던 조소와 우악스럽게 밀쳐대는 몸짓들과... 무엇보다도 나를 볼품없게 만들던 것은 적대감과 복수심과 무력감이었다. 이런 것들은 아직 연석 같아 여물지 못한 영혼에 긴 자국을 만들어 그 흔적을 통해 자꾸만 되살아나는 것이다. 잊지 못할 순간들은 환영으로 꾸준히 돌아오더라는 것이다. 


수치, 그것은 거창한 것으로부터 사소한 것까지 모두 포괄하는 단어이다. 학급에서 겪을만한 지독한 것들과 일상에서 소리 없이 피고 지는 것을 포함하는 단어이다. 누군가 나에게 떠미는 것이기도, 내가 스스로 지어 먹는 것이기도 하다. 수치라, 내 가장 부끄러워했던 것은 무엇이었지? 학급에서 공공연한 놀림을 당하는 것도, 흘리대는 조소를 외면하던 일도 아니, 누군가 나의 사상과 취향을 두고 우스꽝스럽다거나 업신여길만한 것인 양 말해오던 것도, 또 어떤 이가 나를 불길하거나 유쾌하지 않다 여기던 것도 아니, 또는 무시하는 누군가의 기색 앞에서도,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사실과 아주 그릇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됨마저도 아니, 사람은 이것만으로도 자주 예민해지는 경향을 보이는데, 그 모든 이면에 묶여 있는 한 가지 본질. 오래도록 수치를 사는, 자랑스럽지 않은 자신에 대함이다. 


그대들의 영혼이 어찌 이것을 진실로 극복하는가. 우리가 같은 것을 느끼었더라면, 하다못해 그대의 영혼 속에 동일한 경험들을 밀어 넣어볼 수 있다면, 그대도 나와 마찬가지였으리라 믿는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마찬가지이겠지. 이것을 어찌 뛰어넘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이 먼저 그것을 완전히 품어내 마침내 소유하거나 영영 이별해야만 하는 것임을. 수치의 앞에 서 마음이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는 중에도 그대의 영혼은 결연히, 그리고 가혹히 마음에 대고 이야기한 적이 물론 있었겠지. 약한 소리일랑 내지 말라고 그대의 안에 있는 그대보다 작은 누군가를 향하여 엄하니 다그친 적이 분명 있었겠지. 나는 약해질 수 없노라고, 나의 의식은 그 어지러이 쏟아지는 마음을 받들어 곧잘 육신으로 이양해볼 생각이 추호도 없으니, 왜냐하면 내 육신과 의식이 마주한 지금 이곳은 첨단이라, 아무리 패퇴해 물러나고 싶은들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패퇴하거나, 아직 패배가 결착나기 전에 마음이 먼저 거기 넘실거리는 것을 안아내지 못해 쏟아버린다면, 그리하여 눈과 입을 통해 토해버린다면, 나는 더욱 커다란 수치와 낭패를, 무력과 자괴마저 떠안아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내하라, 더욱 커다란 아픔을 형벌처럼 안아들고 싶지 않다면, 그리하여 네가 그를 두려워해 지금 아픔보다 맹렬한 위기감을 감지하고 있다면... 하고


누군들 크고 작은 수치 앞에서 결연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혹자는 이런 태도와 그에 기인하는 외양의 굳은 면모를 빌어 강인함의 한가지이자 극복의 단초로 여기시기도 하겠지만,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그대가 바다를 이룬 수치의 앞에 서 있을 때, 그대의 의식은 어지럼증에 위기감을 제한 그 아무것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을 테지만, 그 의식에서 뻗어난 줄기 끝으로는 영혼이 대략 위와 같은 것들을 명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에 그대는 너무도 연약한 그 마음이 힘껏 떨어대는 통에도 참으로 훌륭하게도, 굳건히 서 있고자 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위기를 자아내는 외적 상황들을 물리치거나, 최소한 휴전상태로나마 어떻게든 결착을 내고는 아무도 없는 곳에 이르러서야 한숨을 내쉬고 아직 놀라 떠는 심장의 진동을 몸으로 느껴보았을 테지. 그리고 다시는 이런 긴장을 느껴보고 싶지 않노라, 만약 내 이 간절한 의지와 무관하게 시련은 계속 찾을 값이라면, 흔들리지 않도록 강인해지리라는 소망과 의지가 수순처럼 잇따른다. 


그럼에도 그 상황을 방지하거나 빗겨낼 수가 있을지언정, 이 감정만은 영영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들의 영혼이 차츰 여물어가면서, 그대의 자아에 체면과 자존심이랄 것이 단단히 여물어가는 동시에 그대의 영혼에는 가시가 돋는다. 그대는 학습한 수치, 그 낌새를 놀랍도록 빠르게 예기하곤 그와 동시에 그 상황을 이탈하려 하거나 맺어버린다. 그대들이 스스로 인지하지도 못하는 수준과 속도로 예민해지는 때는 그대의 영혼이 불길함을 느끼는 순간이다. 굼뜬 의식이 그것을 들여다보고 느지막이 이해를 가져볼 즈음에 이미 그대는 그 상황을 이탈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곤 잠잠한 곳에 이르러 내가 왜 그렇게 말하고 행동했는지, 의아해 본 적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것, 그대 몰래 피부에 쭈삣 서는 예민함의 잔털과 마찬가지로 그대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경계의 감정 및 반자동적으로 행하는 비언어적 표현들까지 모두, 그대의 영혼이 수치를 밀어내도록 개발해 둔 장치들을 반증한다. 그것은 그대와 그대가 믿는바 스스로의 존엄성, 실은 영혼의 보존을 위한 고육지책이자 그대를 점차 굳게 만드는 방벽이다.


시간이 흘러 이제 성인인 나는 옛날과 달라 내 마음은 줄곧 평온하고, 가끔씩 떠오르는 내적 위기감은 능숙하게 비끌어낼 수 있다고, 나는 이제 단단하다고 스스로 믿는 시점이 온다. 그대의 영혼에 몰래 둘러진 가시와 방벽, 그리고 그것이 온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슬며시, 허망히 져버리기도 하지. 아직 져버리지 않았다면 그대는 그것을 믿으리라. 그러나 그때 다시 그리어보라. 광장과 강당 가운데에 서 쏟아지는 수많은 눈길을 몸으로 받아내는 광경을. 스무 명으로도 영 시원찮다면, 쉰을, 그래도 아직 적다면 백 명의 관객을 나는 상상 속에 초대해본다. 그들의 눈길은 웃고 있지 않지만, 어지러이 공황하는 그대는 객석에 앉아 하나의 거대한 무리가 되어버린 그네들 하나하나의 눈빛을 바라보지도 고로 인식하지도 못한다. 수천의 정어리떼가 하나로 결집하는 듯이, 그때 그들은 수 천 개의 눈을 한 한 가지 거대한 것이 되어버린다. 다만 좌중엘 감도는 것을 직감하곤 곧바로 진땀을 빼는 것이다. 


적대감이나 배척감, 혹은 몰이해 개중 무엇이 되었건 한 사람의 눈빛쯤이야 개인의 차이로 이해해 받아들이면 그만인 것이라지만, 실로 그렇게 치부해버림으로써 우리는 상황을 벗어나거나 오히려 그 앞에 당당히 서볼 수가 있었으나, 수십이 반대편에 서 같은 눈빛으로 몰아댄다면 그것으로부터 무감할 수는 없다. 그저 그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대는 공황할 것이다. 그대는 물론 쉬이 지지 않을 테요 끝내 허물어지지 않으리라. 하지만 승리하지도 못하리라. 승리하기 위해선 그대가 마주한 상대들의 크기만큼이나 거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수십 사람의 집체가 이루어낸 거인만큼의 형상이 돼있어야는 때문이다. 그들에게 복수심과 승리에 대한 희구가 아닌, 역설적으로 지루한 무심함을 느껴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증하자면, 그대들이 티끌 공황 없는 말끔한 의식을 안고서 거꾸로 상대에게 마찬가지의 것, 상대가 그대에게 쏘아내는 바로 그 무심한 눈빛과 압도감을 고스란히 돌려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때 그대가 두려움을 넘어서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여전히 떨고 있는 그대의 가슴 안에 두려움과 복수심, 혹은 오기로 떠밀리듯 쏟아져서야 못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장해내거나 오기로이, 하다못해 호기로이 나서보는 것은 극복의 증명이 되어줄 수 없었다. 더러는 그 가시 돋친 강고함을 빌어 자신은 두려움에 승리했노라 너무 빠르게 믿어보려는 사람들을 보았지마는, 그대가 다시는 그러한 두려움을 겪지 않으리라 말해볼 수 없지 않은가. 극복함이란 완전히 지나쳐 버린 다음 아주 벗어나는 고로, 그때 가랑이 사이로 빠르게 건너버리는 잠깐 동안 반짝 놀라움이 찾을지언정, 이내 차분히 가라앉는 마음만이 거기 다다른 곳에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두려움을 완전히 극복한 이에게, 넘어선 이에게 이제 그 과거의 두려움은 무엇이나마 돼줄 수 있을 것인가. 그건 다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있어야 한다. 그대의 유년에 공포였던, 예컨대는 고독과 같은 것들이 지금 그대에게 그러하듯이, 마치 돌멩이처럼 돼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돌멩이로 전락해버린 그것에 내가 지속되는 기쁨을 느낄 이유마저도 하등 남아 있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아직도 그대들 앞에만 서면 몰래 뛰는 심장과 이제는 조금 나아졌다는 다행인 감각과 더불어 기억나는 연약했던 시절들과 이제는 힘주어 그런 고단한 것들을 바깥으로 밀어젖혀야지, 하고 다짐하는 마음까지는 그러므로 모두 극복에 닮아 있지 않다. 내가 이해하는 극복이란, 넘어섬이란 이런 것이다. 끝내 승리와 오래 찾을 환희는 내가 그려본 극복의 순간에 자리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분명 지금 인내하는 자의 꿈이고 이상향이었으나, 그것은 영영 닿을 수 없는 극복으로 가는 길 위에 놓인 차라리 용감함에 가깝다. 고로 이런 인간적인 순간들엔 오직 잘 견디며 지나왔다는 이력만이 소기 자긍할만한 것이 돼, 그대만의 작은 승리와 훈장이 되어주리라. 그대는 쉬이 지지 않았으며, 그때 그대의 용감함이 최소한 그대가 행한 만큼은 스스로 증명되는 셈이니.

 

만약 나는 그렇지 않노라, 두려움 없노라, 너는 무르고 나약하구나 속으로 조용히 느끼실 분이 있다면 차라리 동경하리다. 그대의 기억의 곳간에는 수치와 패배감을 그려볼 만한 이력이자 질료인 물감, 얼굴에 그늘을 드리워볼 만한 케케한 것일랑 없는 것일 테니. 참 보기에 싫은 거뭇이 그런 그대 얼굴에 묻어있지 않을 테니. 겪지 못한 것을 그리어 느껴볼 만큼 우리의 상상력은 첨예하지 못하다. 그런 그대를 내가 모르는 듯이 그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그대는 참으로 건강하여 보기에 좋지만, 나는 아직 그대가 스스로 강인하노라 섣불리 말해버리는 어떤 모습에는 진실로 동의할 수 없다. 강인함이라 불릴만한 것들은 오직 고통 속에서만이 조금씩 영글어드는 아주 작은 구슬의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내리거나, 이미 가지고 태어나 지닐 것이 못 되는 까닭이다. 사자와 호랑이로 태어난 인간을 나는 본적이 없다. 


그 시절 내 그토록 마르고 닳도록 쓰다듬은 여느 구절처럼,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못한다는 것에 더 가까우리다. 그대의 안에 어둔 그림자가 없다면, 그대의 끈적한 아픔을 찾아 꺼내어 더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그대의 가슴 속으로 내가 어떤 시커먼 것을 떠밀어넣어볼 수도 없는 것이며, 그대가 다급히 주워보련들 흘러넘치기만 하는 것들이 쏟아져 그늘 되었음이요, 고로 그대가 원하는 대로 늘렸다 줄였다 할 수도, 차양을 치고 발을 걷듯이 세우고 치울 수 없음이니, 이미 거기 있지 않는 한 내 끄집어내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때는 한갓 언어로 그것을 끄집어보려고도 했으나, 그대에게 이미 그것이 흘러넘치지 않는 이상 그대의 짤막한 그림자를 당기어 억지 그늘을 만들어 쉴 수도 없던 까닭이다. 이해할 수도 받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늘이 없는 이에게로는 다른 그늘이 찾지 않는다. 그대가 봄처럼 찬란하거나 태양처럼 오만하게 내리쬐는 형상으로 있더라면 복되이 또 복되이도, 그대의 그림자로는 그늘이 드리우지 않았다. 그대의 기억의 곳간에는 그늘을 이룰만한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대들조차 사자와 호랑이처럼 난 것은 아니이니, 그대들에게 그늘이 없다고 하여 모조리 슬픔과 그 끝의 기쁨마저 표백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대들에게도 슬픔의 기억쯤이야 그 얼마든지 간직되어 있음에, 앞의 얘기에 어떤 당신께서는 몹시 언짢기도 하셨으리라.


그러나 그늘이 없는 그대야말로 진정 흠모할만한 사람이다. 이 기나긴 글의 어드메 끝에 겨우 써나 볼 이야기를 나는 노파심에, 일찍 쏟아내린다. 그대야말로 진정 흠모할만한 사람이다. 나는 그런 그대를 지나치도록 오래 동경하였기에, 어쩌면 질투도 하는 것이다. 그늘에 서 있는 사람 중에 양지를 동경하지 않는 사람 하나 있을까. 완전히 체념한 사람에게조차 그 몰래 동경이 심기어 있다. 결국 모든 고뇌하는 자의 목고개는 오직 그대들이 서 있는 방향으로 있고, 그의 질긴 체념조차 거기서부터 부딪혀 돌아온 반향이었으며, 고뇌하는 밤들은 양지로 향하는 길목에 놓인다. 그러매 그대에게 그늘이 없다는 나의 말은 어쩜 찬사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더욱, 심지어 그대들조차도 그러나 슬픔에 사자와 호랑이 같지는 못하였으니, 다만 번쩍이는 그대가 훨씬 잘 디디고 서 있을 것이다. 움츠러들지 않고서 고고히, 혹은 흔쾌히 털고 일어나시리다. 한편 이것이, 이 모양이 언제나 그대들이 내게 말한 것, 또 가르치는 것, 정말로 강인함인가? 



[크기변환]derek-thomson-M1jCmRxO7cY-unsplash.jpg

 

 

강인함이라 불릴만한 것들은 오직 그늘 있는 자의 소유이다. 허나 그의 소유라 하여 그가 이미 가져본 것, 네 고단함에 보답으로써 하늘이 쥐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장차 스스로 거머쥐어야만 하는 과업 같은 것이다. 그것은 오직 그늘있는 자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강인함이라 하여 만독불침의 만능이 아니요 자랑할만한 것도 아니었으니, 오직 자신이 겪어낸 지독함 속에서, 겪어낸 것의 티끌 나마 쌓이고 다시 흩어지는 동안 느리게 퇴적하는 것이요, 딱 겪어본바 겪은 만큼만 영그는 것이고, 그만큼만 지독한 것이고 지리멸렬한 것이기 때문이다. 강인함이란 오직 그를 태어나게 만든 아픔 속에 있다. 혹자는 이미 강인하게 태어난 사람이 있어 장차 그가 폭풍 속을 걸어 들어갈 때 그것은 이미 예정된 운명처럼 당당히 드러나리라 생각하는 것도 같으나, 또는 그의 눈빛이 안고 있는 광염처럼 기세 좋이 만발하리라 그려보시는 것도 같으나, 나는 그런 기대와 바람을 엿본 일이 있었을지언정, 진실로 그러한 자를 본 일이 없다. 온실 안에서 억세도록 자라난 풀꽃을 본 적도 없고, 그토록 믿음직하여 뭇 어른의 마음과 존경을 능히 훔칠만한, 보무를 갖추고서 태어난 아기 장수를 본 적도 없으며, 세상만사 통달하여 초연한 눈빛을 간직한 젊은이를 어쩌다 마주친 일도 없다. 이런 것들은 그려나 볼 수도 없다. 그러나 차라리 그렇게 태어나지 않고서야 그렇게 자라날 수는 더욱 없었으리라. 스무 해 만에 만고 영웅처럼 피어나볼 수는 없을 리야. 


누구나 한 번쯤 그리어 동경해 본 만독불침의 강인함과 만인지상의 당당함은 이상일 뿐이다. 단 한 사람에게도 없었으나, 모든 사람을 한번쯤 고양시키게 만드는 영웅성이고, 가장 높게 승리할 영웅담 속에 있는 것, 그래 말하자면 환하게 웃고 있는 초인 같은 것이다. 그대의 안에 초인은 누구인가. 그대가 한번 본적 없이도 그대의 안에 그려본 초인은. 그것이 이 사람은 아닌가. 그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괴롭게 하여도 단 한 순간도 작아져 본 적 없는, 작아져 볼 수도 없는 사람. 자괴와 자책 따위는 살매 느껴본 적도 없고, 능히 그것을 느껴볼 만한 시점에조차 정신적으로 평온한 사람. 수백 사람의 무관심함과 수십의 적대자 앞에서도 움츠려들지 않고, 오히려 태양처럼 자기 자신으로서 고고히 타오르는 사람. 스스로 빛이 나는 사람. 감히 시기하거나 모함하기도 어려울 만한 기세로 무장해 동경을 살만한 사람이고, 한편 너무도 너그럽고 다정하여 뭇 사람들의 흠모를 쉬이 사버리는 사람. 사실 너무도 인간적인 감정들이나 떳떳이 받아들일 수도 없는 어떤 교활함들, 말하자면 질투와 시기와 억하심과 피해의식과 교만함과 그 뒤에 잇따르는 옹졸함과 적대감과 오만함까지, 그런 것들을 느끼기엔 너무도 고요하고 담대하고 훌륭하여 느낄 필요 자체가 그에겐 없었거니와, 가슴속에 차오른들 기꺼이 바라건 대로 내쳐버릴 수 있는 사람. 마음 안에 아무런 부정이 없어 마주한 누구에게든 사랑스러움을 안겨버리고, 자신을 사랑하기를 단단히 하되, 어느 쪽도 지나치지는 않는 사람. 고독에 멀되, 고독 속에서도 온전한 사람이며, 사람을 사랑하되 사람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 사람. 혼자서 먼저 완전하거나 적이 충분한 사람이고, 그럼에도 여전히, 필요에 무관히 따스한 사람. 스스로 독보적인 존재라고 호소하거나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의식 없이 그러한 사람. 사실 그대들을 괴롭거나 슬프거나 초라하게 만든 모든 순간이 그려낸, 저편 아주 반대쪽의 환상향인. 


이것은 나의 초인이다. 나는 누구에게나 초인이 있으리라 믿는다. 어떤 마음속에든 그리어져 간직되리라 믿는다. 그것은 그대가 되고 싶은 모습이거나, 그대가 이미 그리되었노라고 섣불리 믿어버리고자 하는 모습으로서 엿보인다. 위에서 열거해본 것이 아니더라도, 그대가 바라는 각자 모습이 있을 테고 그것이 이상의 대지에 서 있다면 그가 초인이다. 다만, 그런 사람을 그대는 실제로 만난 적이 있는가. 만약 없다고 한다면 그대의 초인은 오직 그대의 슬픔 속에 태어난 것이고, 만약 있다고 한다면 그대가 마주한 그 초인이란 그저 강인한, 그러나 여전히 하나의 인간이었을 것이다. 그에게조차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들이 모조리 사라지거나 극복되진 못했을 터이니, 그는 강인하게 인내하고 마음 안쪽 깊은 침묵의 바닷속으로 밀어 넣은 것이다. 그대의 초인은 그대가 바라는 Anti-Fragile, 결단코 부서지지 않는 온전한 강인함과 그렇게 믿어볼 수 있게 만드는 꺼지지 않는 당당함이다. 


어느 정도를 기점으로 하여 시련이라 불릴만한 것들은 다시 견뎌볼 만한 것과 겨우 낼 만한 것과 도저한 것으로 나뉘게 될 지야 물론 누구도 알 수 없을 테지만, 엑셀을 지근 밟는 듯이 서서히 올라가는 고단함 앞에 누군들 한 발 재겨 딛거나, 흠칫 거리거나, 결국 물러나지 않을쏘냐. 심장 안에서는 괴로움의 단초가 솟고, 심장 바깥에는 그것을 아파하는 영혼이 있다. 심장에서 한 가지 혈관을 끊어내 아주 온순한 짐승처럼 순결한 백치처럼 무해해지거나, 아닐 값이라면 안팎으로 해일처럼 침노하는 괴로움을 정복하여야지. 아예 아플 일 없거나, 아픈들 언제까지고 굳세고 씩씩하기만 한 자,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그이가 초인이다. 


인간적인 모든 것들을 극복한 자 초인, 그러나 극복은 영영 오지 않는 것이고 그것을 기다리는 누군가의 간절함 속에서는 대신하여 강인함이 영근다. 그러나 그것은 기실 말뜻 그대로의 절대적인 강인함, 강인하다는 낱말 그 자체인고 묻노라면 여전히 아니라 말하겠다. 고로 그런 말을 일삼는 그대는 강인한가 누군가 물으신다면 아니라 할 것이다. 그 추상언어가 완료시제로써, 더 이상 그 의미가 확장될 수도 없는 것으로써, 고정된 것으로써, 정지된 것으로써 표현되어 마침내 어느 지점에 가면 닿아볼 수 있고 소유할 수 있고 길이 담아볼 수 있는 것이냐고 한다면. 얼마나 더 강해져야 나는 이제 강인한 것이며, 언제부터 나는 극복하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강인함이 티끌만큼씩 영글어 구슬이 된다 한들, 그것이 만사 이겨냄은 고사하고 길이 인내해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강인함은 극복과 마찬가지 초인의 것인 고로 달성할 수도 소유할 수도 없는 것, 그렇다면 오직 지금 인내하는 중에 나의 티끌이 언제까지고 영그는 중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영원한 진행상의 언어인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극복하는 중이고, 인내하는 중이고, 강인하는 중이다. 그런 누군가의 지금 모습이 나에게는 강인함이다. 그러다간 마침내 인내가 가면, 티끌도 함께 가버리는 것이다. 강인하는 것이란 극복으로 맺는 것이 아니라, 그때 비로소 보내주는 것이고, 보내는 것은 다만 나의 그때 필요이자 고통이자 미련이었노라, 하며 마치는 것이다.

 

그대가 무너지지 않도록 무언들 붙잡아 견디는 모습이 강인함이었고, 그 쥔 손은 결코 자랑스럽거나 고고하지 않았다. 완만한 곡선을 이룬 벼랑을 향해 미끌려 항거할 수 없이 떨어지는 동안, 추락하지 않고자 아무것에나 손에 쥐어보려고 아등바등대는 모습에 닮았고, 그런 급박하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에 닮았다. 연옥으로 떨어지지 않고자 발버둥치는 그대의 애처로움에 아름다움은 없었다. 누구나 심연을 인내하는 초인의 거룩한 자태와 끝내 승리자의 고고함을 그리어 동경했다지만 정작 심연의 끄트머리를 잡은 그대의 애달픈 손등에는 거룩함이나 영광됨이 없었다. 다만, 인간보다 더 높은 누가 있어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더라면, 적어도 그에게는 참으로 갸륵하였을 것이다. 


그대가 바란 것이 이것인가. 지리멸렬함에 능히 이별하기보다는 미련히 참고 견디게 만드는 힘이자, 초라함을 버티어 건너가고자 하는 사람에게로 지어진 애절한 표정인? 언제고 초라함의 감정 그 자체란 정복할 수 없는 것이라면, 지독한 감정이 그 얼만 차오른들 그 앞에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그것은 부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떠나가거나, 내가 떠나오거나 하는 뿐이다. 그리곤 시간의 축복이 그대에게 세례 부어짐을 기대하는 것, 여기까지가 사람의 최선이다. 그러나 나의 수치가 그대들로부터 쏘아져 내 마음속에 안착해버린 것처럼, 그리하여 그대들 없이도 스스로 서고 지던 것과 같이, 내가 결연히 떠나볼 수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시간이 모든 것을 지워버린다 한들, 매일 같이 솟아나는 것들마저 모조리 깨끗하니 지워 보일 수는 없기에. 그런 그대가 스스로 피어나 먼 시간 너머 언젠가 비로소 작별하는 때까지, 그대가 할 수 있는 것이 인내뿐이 아닌가. 그대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저편 양지와 바짝 따라붙은 심연 사이에서, 벅찬 마지못함과 절박함으로 택하는 것이 강인하는 것이 아닌가. 그대가 기꺼이 몰락을 택하지 못한다면, 그대의 영혼이 바로 앞에 놓인 손쉬운 체념과 어려운 고행 사이에서 차마 전자를 짚어보지 못할 값이라면, 그때 그대에게 놓인 단 한 가지의 택지가 강인함이 아닌가. 마지못해 붙잡는 것이 아닌가. 이 무너지는 감각 속에 오래 버티고 서서 차라리 신음을 흘리게 만드는, 진정 이것이 그대가 바라는 것인가. 

 

 

[꾸미기][크기변환]flavia-gava-WnI039yepoo-unsplash.jpg

 

 

언제고 내게 충고하던 명랑한 사람아, 그대의 상냥함을 알지만, 나는 그대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 우리가 다른 것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심지어 같은 것을 향하여 고개 돌린들 여전히 다른 것을 인식하고 있었기에. 나는 그대의 명랑함이 가슴 아팠다. 명랑한 사람아, 강인함은 그런 그대들을 위하는 것이 아니이고, 아직 그대들의 영혼이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들 중 어떤 이는 자신의 강인함을 훈장처럼 가져보고 싶었을 따름이나, 그것은 그대들의 안에서 영글기에는 고약하다. 그대들이 강인하지 아니하다 하여, 그대들이 나약한 것도 아니이다. 그대들은 강인할 하등 필요도 없이 명랑한 것이다. 여기까지 내가 생각하는 강인함이라는 것은, 오래 초라함과 가슴 먹먹한 억하심이 늘여 헤져버린 마음일 수도 있고, 비바람에 흠뻑 젖어버린 영혼의 몰골일 수도 있다. 어쩜 초라함 그 자체이며, 수도 없이 마주 선 동안 스며들어버린 퀴퀴한 내음새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거기 미련처럼 오래 남아 서 있으려는 모양이다. 모호하기 그지없지만 여전히 분명한 것이란, 그것이 빛나는 웃음 속에서 피어나듯이, 자생적으로 떠오르는 승리의 여명이 아니란 말이다. 


또 그대, 겪은바 아주 지엽적인 그대의 조막만 한 삶을 들어, 초라함일랑 아주 모르고 빛나던, 혹은 일생을 거치며 잠깐씩 맞닥뜨린 뭇 수치 따위는 차지게 내팽개치던 호기로운 자신을 두고, 보라, 삶에 두려움 적은 나는 이토록 강인하다, 정복하는 사자와 같이 그러하다 말하신 그대에게 나는 비로소 위와 같이 답할 것이다. 고로 우리는 영영 완전함으로써 강인해지지 못하다. 완전한 강인함과 극복, 그것은 다만 이상향이자, 기치일 뿐. 그렇다면 그대 말씀하신 것처럼, 온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와질 수 없는 나는 어찌해야 좋은가. 아직 기다리는 것, 이를 제외하고선 차마 내가 오답으로나마 제시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리다. 


완전한 강인함, 마음과 영혼에 깃드는 일체 괴로움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 또는 그 모든 것을 안아들 정도로 튼튼한 심장. 그대가 이미 가졌노라 말하던 이 모든 것은 기치일 뿐, 닿을 수 없는 저편에서 흔들리며 사람을 유혹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급히 그것을 가져보고자 이끌리고 내달리지만 닿을 수 없다는 사실만이 이미 누군가 정해두신 답인 것처럼 분명했다. 그렇담 어찌 해야 하는가. 내 질문의 정수는 오직 이것뿐이다. 어느날은 드디어 괜찮아진 것 같아, 마지막 남은 의심을 겨누어 며칠을 두고 보다간, 이내 정말로 괜찮아졌구나, 극복되었구나 하며 놀라움으로 고양되는 가슴. 그리고 다시금 돌아와 반복되는 이러한 일련을 두고 나는 계속 질문해왔다. 당장 내 괴로움은 어찌 진실히 또 완전히 사를 수 있는 것이며, 끝내 나는 극복할 수나 있는가. 나의 모든 질문은 여기에 가로 놓여 있고, 바라던 정답은 수차례 이루었노라, 또 잃어버렸노라 하며 반복하는 통에 아주 지워졌으며, 지금 남은 것은 기치뿐이다. 그 기치의 다른 이름이, 바로 무애이다. 


여기까지 내 괴로움의 사상이 익어나기 위하여, 그 얼마나 많은 밤을 나는 헤매었겠는가. 눈치채셨겠지만, 위에서 언급한 그대들은 또한 모두 나이다. 심지어 너는 나약하구나, 속으로 느끼시리라 그려본 그대까지, 모조리 시간 축을 따라 늘어져 있는 나의 순간들. 나를 스치고 지나간 사람들과 그렇게 내 영혼 속에 자리한 그대들의 과거이자 환영들이요, 그대들을 대변하는 또다른 나이다. 나는 왜 이리 오래 환영 속을 헤매이며, 문답하며, 이런 소기 의미 없는 과정들을 개발하였는가. 


긴 시간을 축약해 놓은 이 활자들의 이면에, 나의 활동사진들이 지나간다. 모조리 수치와 오기로 되어 있는 장면 장면들. 내 수치는 어디서 와, 언제까지 계속될 것처럼 다시 일어서던가. 그리하여 내게 끊임없이 이런 쓸모없는 생각들을 권하였는지. 


*


초교 3학년 말쯤이었나, 동우가 갔다. 종일 숙이고 있었기에 굽은 채 익어버린 목을 펴고 고개를 들어본들, 눈으로 찾아볼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짧았지만 그와 남긴 추억은 너무도 깊었기에, 어디서 그와 비슷한 행복과 평안을 찾아볼 것인가 하는, 사실 그런 생각에까지는 미치지도 못했다. 그가 가버린 빈자리를 꿋꿋이 서서 추억만을 가슴속에 간직하며 묵묵히 살아보기엔, 마구 튀어 오르고 또 치우치려는 감정을 꽉 붙들어 매고서 눈앞에 펼쳐진 시간들과 함께 고요히 멈춰 서있기엔, 즉 고독을 가져보기에는 너무 어렸으니 말이다. 


마구 불안했다. 혼자된 모든 시간을 쉴 새 없이 그랬다. 동우는 유일하게 남은 육지였기에. 언제부턴가 사람들 사이에서는 늘 불안했다. 저 사람이 나를 재미없게 여기면 어떻게 하지, 흥미를 잃으면 어떻게 하지, 이내 완전히 돌아서 버린다면, 하다못해 장차 나에게 큰 주의와 관심을 할애하지 않고 저들끼리만 즐거이 떠들어댄다면, 그런 것들에 유독 집착하는 예민한 나와 그럼에도 완연히 떠나버릴 수 없는 나는 계속해서 그대들을 쫓아다닐 터인데, 점심시간에 이를테면, 내가 따라오고 있는지 어떤지도 신경 쓸만한 사람이 아니게 되는 때, 그대들을 졸졸 쫓아가는 내가 그 얼마나 신물이 날는지 두렵지만, 그것밖에는 방도가 없는 것인데. 


그다지 매력이 없는 사람이었다. 4학년부터는 소아비만이었고 외양은 지금에도 그렇거니와 그다지 볼거리가 없다. 그렇다고 하여 말발이 좋거나 재치와 위트, 혹 익살스러운 맛이 있는가 하면 더욱 아니다. 하다못해 사내들이 좋아할 만한 것, 호방함과 거칠고 투박한 맛도 응당 없었다. 태어나기를 힘도 약하게 태어나, 5학년인가 6학년 즈음엔 연년생인 여동생과의 팔씨름에도 지기 일쑤였다. 사내다움, 그 또래 아이들이 흥미를 느낄만한 것은 죄다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렇듯 무언가 흥미로운 걸 뱉으며 주의를 환기하기에는 변변찮았으며, 호방해 보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외려 흥미롭기는커녕 답답했을 것이다. 겁이 많고, 어딘가 잔뜩 위축되어 있고, 예민하고, 딴에 자존심은 또 강했으니까. 딱히 자기비하의 의도 없이, 요약하자면 재미없고 소심한 뚱보 정도라 하면 적당할 것 같다. 


동우는 유일하게 남은 섬이었다. 그는 까닭을 알 수 없이 정다웠고, 나 또한 그런 그에게 마찬가지였으니. 그만이 나를 온전히 대했다. 나를 늘상 흥미의 대상으로 시험하곤, 이리저리 손쉬운 판단을 던져대는 그들과 같지 않았다. 재미없노라는 싸늘한 시선을 던지거나, 혹은 제 딴에는 조용하게 속으로 삼키었다지만 내 눈이 멋대로 포착해버리는 실망감을 흘려내리거나, 간만에 크게 웃으며 하이파이브를 건네거나 하는 그런 방식이 아니었다. 우리는 재미와 무관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를테면 하교길 집으로 가는 방향에 새로 생긴 노점에는 빙수가 맛있다든지, 어제 달고나를 태운 게 너무 아쉽다든지, 그러니까 오늘 같이 가서 다시 해보자든지... 어제 우리 아빠가 또 집을 다 때려 부쉈다든지, 방학에는 너희 집에서 살고 싶다든지, 우리 한번 부모님께 말씀드려보자든지, 뭐 그런 것들이다. 그게 좋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그저 소통 속에서 평안을 느끼는 일, 참으로 소박한 것이라마는 이상하리만치 내 주변에는 그런 모양이 많이 없었다. 사실 지금도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다. 


그만이 그랬다. 오직 그만이 나를 단 한 순간도 불안하게 하지 않았다. 그를 제외하고선, 성인이 되는 때까지 만난 대다수는 참 즐거운 사람들, 정확하게는 즐거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재밋거리나 매력이 없는 나는 꽤 오래 불안해야 했다. 재미를 좋아하는 사람 중 재미없는 사람에게마저 다정하고, 그에게 즐거움을 주는 사람에게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것과 유사한 정도의 관심과 배려를 부러 할애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거든. 그 재미에도 참 여러 갈래가 있겠지만, 사람을 유쾌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것 중 그 어느 것도 가지지 않아 나는 불안했다. 나부터가 유쾌하지 않은 때문이라지만, 다른 사람이 그것을 알아주고 양해해 줄 이유는 하등 없기 때문이고, 내가 그것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럼에 절박히 대안을 강구해도 보았으나 내 안에서 그런 것들이 샘솟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가장한 유쾌함이란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우스꽝스럽거나, 어색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하필 예민하게 태어나, 혹은 그런 기억들이 누적된 까닭에 나는 사람들의 기색을 금세, 원치도 않게 캐치해버리곤 하는 까닭이다. 

 

 

[크기변환]david-gabric-Mi4IEpmvCMM-unsplash.jpg

 


재미와 매력이 없는 사람은, 자칫 희롱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리는 경향이 어린 시절에는 있었던 것 같다. 아이들은 참, 어쩜 지나칠 정도로 재미있는 걸 좋아하거든. 아이들의 심장이 얼마나 고약하고 놀라운 생명력으로 펄떡거리는지를 안다. 머리를 울릴 정도로 두근대던 심장의 고동은 뇌에 잔뜩 혈류를 퍼붓고, 같은 시간 동안 더욱 많은 것을 감각할 수 있게 한다. 시간이 더욱 면밀하게 감각돼 어쩜 더디 가는 것처럼 느껴지던 어린아이들은 모든 것에 급했다. 마치 귀성길 차량 안을 겨워하는 모습과 같은, 사실 그건 그의 탓이 아니었으리라. 모든 것에 길이 집중하기를 어려워하고, 눈을 사로잡는 것들을 좋아하고, 뭐든지 빨리빨리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아이들은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계속해서 흥미로운 것 앞에서, 펄떡이는 자신의 심장을 다독여야만 했을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말에는 내가 아직 생각해보지 못하는 여러 가지 것들이 함의되어 있겠지만, 개중 나는 심장이 느려지는 것에 큰 방점을 둔다. 시간이 흘러 어딘가 차분해진 모습들은 스스로 체면이라든지, 평판이라든지를 신경 쓰느라 행동제약이 발달한 탓도 있겠지만, 그 전에 심장이 먼저 느려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피곤하다느니, 이제는 뛰지를 못하겠다느니, 만사 흥미가 가지 않는다느니, 혹 예전처럼 심장이 뛰지 않는다는 말을 들으면, 나는 옛날 생각을 한다. 아직 심장으로부터 사지와 온몸의 기관들이 가까울 때에는, 똑같은 힘으로 꾸준하게 수축하는 맥박이 온몸에 강렬한 혈류를 퍼부었다. 땅을 구르는 발끝의 힘찬 감각이나, 놀이동산의 체험형 놀이기구, 알라딘이라는 이름의 놀이기구였는데, 그를 열다섯 바퀴나 쉬지 않고, 1층부터 4층까지 뛰어다니던 일이나, 바깥에 가만 앉아 이리저리 나를 찾는 어른인 나의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저리 가만 앉아 있으면 지루하지 않을까 커다란 미안함마저 느껴보는 일, 엄마 지루하지 않아라고 물어보는 한편에도 남은 다섯 바퀴를 기어코 돌아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 따위가 떠오른다. 


요는 아이들의 심장이 너무 거세게 뛰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어린아이에게는 너무 커다란 기관이다. 한평생 동일한 속도와 세기로 뛰는 그 심장이 사지에 적당하고 온순한 혈류를 가져다 대기 위해서, 우리의 육신은 얼마간 자라나 멀어져야만 했다. 그때 너무 가까이서 부풀듯이 팽창한 나의 두 다리에는 뛰어다닐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고, 마구간의 말처럼 에너지가 충만하게 응축된 우리는 인내를 겨워했다. 인내를 겨워했다. 그들에게는 너무 큰 생명력이, 그들 안에 샘솟으며 사지를 몰아댔다. 


그러니 내가 스스로 흥미로운 사람이 아닐 때, 그들은 인내하고 멈춰 서서 가만 이해하기보다는 차라리  무관심해져 다른 흥밋거리를 찾아 나서거나, 혹 어떤 날에는 나를 재밋거리로 전락시켜버리기도 하더라는 것이다. 그런 성급함, 사실 비워도 비워도 금새 차오르는 생명력이 계속돼서 분출되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참 많이도 놀렸다. 그 탓에 지금까지도, 그것이 조롱이건 농담이건 나를 대상으로 하는 희화화에는 성난 반응이 튀어나오곤 한다. 그리곤 이내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분위기에 얼마간의 수치와 자책 따위를 오래 느끼기도 했지.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아직 예민해지기 전까지는 그대들이 그 안에 조롱을 숨긴 채로 내게 말을 건네는 것마저도 그저 좋았다. 그대들이 무슨 말인가 건네곤 와하하 웃으면, 영문을 모르고 기뻐하기도 하였다. 간만에 나의 주변에 웃음이 감도는 것이 겨워 나는 내일도, 모레도 그럴 수 있기를 바라기까지 했다. 기다리기까지 했다. 나는 언제나 가만히 앉아 그대들을 기다리며, 그대들이 다가와 말 걸어주기를 바랐다. 그게 무슨 말이 되어도 좋을 것 같았다. 아직 그 뜻을 충분히 이해하기 전까지는. 


건민이랑 재훈이랑 성현이었나, 세 놈이 같은 편을 먹고 교실 뒤편, 사물함 앞에서 어제 TV에서 본 레슬링 기술을 시험하는 것도, 나는 다 같이 어울려 놀자는 뜻인 줄로만 알았다. 다칠만한 기술은 쓰지 않았지만, 나는 사물함에 부딪혀 튀어 오르는 등이 조금씩 버겁다고 느끼면서도, 그것이 즐겁다고 생각했다. 얼굴에 버거운 표정과 아무것도 모르는 만연한 웃음이 같이 있을 때, 그래 동네 어느 바보 형이 우악스러운 장난들에도 그저 좋다고 헤벌쭉 거리는 그 보잘것없는 얼굴처럼, 천치 같은 그 모습은 지금에 생각하면 참 볼썽사납고, 우습다기보다는 참 연민할 만한 것이었을 테다. 


분명히 나도 한때는 사람을 좋아했다. 천치 같은 모습으로 그랬다. 관심을 가져주는 것만으로도 보통의 또래가 그러한 것보다 훨씬 즐거워했고, 마음 가득 감사함마저 흘러나기까지 해 심지어는 그대들을 즐겁게 해주고자, 그때 말로 '오버액션'도 많이 했더랬다. 어울리지도 않는 것을 익히고자 일요일 저녁에는 개그콘서트를 보며 성대모사도 열심히 연습했다. 그게 다 무어랴, 나는 그대들이 좋았다. 누구를 막론하고 그냥 좋았다. 이렇게 살뜰한 사랑이었으니, 보통 아이들한테는 어리둥절한, 더 정확히는 우습게 느껴지기도 했으리라. 그런 그대의 감정에 대한 정확한 단어가 기억나지 않는다. 추하거나 가소롭거나 같잖거나 연민이 들 정도로 우스꽝스럽거나 볼썽사나와 쉬이 하찮게 여길만한 것에 대해 사람이 느껴버리곤 몰래 감추어내려는 그 감정이 어떤 이름을 가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우월감이라고 표현해버리고 말기에는, 그것은 이 감정의 어느 한 가지 원리만을 가리키고 있을 뿐, 올곧이 그 감정을 지시할 수 없다. 


'우습게 보여서는 안 된다', '얕보여서는 안 된다'는 사람들의 말이 정확히 가리키고 있는 것이요, 상대방의 마음 안에 자연스럽듯이 형성될 그 감정을 누구나 추찰한다는 것은 한편 잘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함의하며, 즉 그것이 너와 나 모두의 마음 속에 의지와 상관없이 피고 졌으며, 그것이 장차 스스로에게 겨누어지는 것만은 피해내야 한다는 어떤 소극적인 급박함마저 그 안에 다 녹아 있다. 내게도 한껏, 충만히 내리쬐인 그 감정, 채 피해내지 못한 그 감정, 그게 어떤 단어인지 한참을 생각하느라 떠올린 그대들의 표정이 갑자기 뭉뚱그려지더니 이하와 같이 표현되기를 원한다. 그것은 경멸이다. 아, 그래 이것이구나. 


흥미로운 일이다.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우습게 여겨지면, 얕보이면, 그리하여 상대로 하여금 확연한 우월감을 느끼도록 그저 두어버리면, 곧 경멸로 이어진다는 사실이. 참으로 흥미로운 인간의 일이다. 그것은 나에게도 만연한 것이었기에 나는 쉬이 경멸하던 그대들을 다시 경멸하며, 나만의 우월감 속에 빠지지 않기로 한다. 그런 연쇄작용 속에 갇혀 있기에는 이미 경멸받고 경멸하고, 우월감을 느껴도 보았다간 더 큰 자괴를 느끼며 빠져나오고 하는 악순환을 충분히 겪었다. 내가 경멸을 잘 알지 못하던 때에는 그대의 얼굴이 경멸인지를 몰랐고, 이제 그것이 경멸인 줄을 알고 나서부터는 나또한 유약해 무수한 경멸을 쏘아냈으니, 유감스러운 것은, 오직 유감스러울 수 있는 것은 내가 그것을 능숙히, 유려히, 우아하게 비껴나갈 수 없었다는 사실 뿐이다. 그것이, 쉬이 경멸을 살만한 모습들이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나의 천성과 기질 속에 있었다 한들 또다시 경멸해온 나로서는 그것을 억울해하고 통탄할 수만은 없는 것이렷다. 경멸의 원리가 우리 몰래 이 안에 자리해 있는 하나의 인과임을, 메마르게나마 아쉬워할 뿐이다. 


그럼에도 나로서는 스스로 그대들과 이별할 수 없었다. 동우를 제외하고선 전부 함께 있음에도 어딘가 불안하고, 함께 말하고 있음에도 곁을 맴돌고, 외로웠다. 그때는 그것이 어찌할 수 없도록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사실과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떳떳함이 이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별을 택하기에는 사람들이 모여 이룬 원, 그 바로 바깥에 넘실거리는 고독이 두려웠고, 외로움을 납득해 받아들이기에는 그것이 나만의 그릇됨일까가 두려웠다. 그래 그때는 모조리 두려웠다. 이 기나긴 글도 결국, 내 홀로 이상한 것인가를, 즉 나만의 그릇됨을 두려워해, 답을 찾아보고자 한 오랜 몸부림의 연장선에 불과하다. 


이야기가 만발한 오후의 화원 속으로 발작하듯 뛰어들어 어색한 침묵 혹은 무관심만을 손에 쥐어본들... 사실 계속 겉돌다간 완전히 튕겨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였으나, 그 자연스러운 말의 길을 따라 어울려 들어가 보기에는 소위 센스라는 것이 부족했음에, 그대들의 화원으로 난입해 오히려 즐거운 한 때를 망쳐버리고는, 싸늘한 경멸만을 돌려받기 일쑤였음에도 나는 스스로 이별할 수 없었다. 

 

 

[크기변환]zach-vessels-jLbmY5Zp7UQ-unsplash.jpg

 


그래도 내게는 동우가 있었다. 적어도 그가 잡은 손 안쪽의 작은 공간만큼은 노란 대지가 되어, 그 안에서만큼은 평안을 느꼈다. 그는 내가 불안할 때마다 손을 꼭 잡고는 저 새끼들은 무시해버리라고 으름장을 두었다. 나 대신에 그랬다. 한편 두려움에 과장된 것이겠지마는, 곧잘 경멸을 쏘아낼 것만 같은 시선들 앞에서, 그런 그 애가 얼마나 늠름하고 씩씩하게 보이던지. 그 애는 세상에서 가장 튼튼하고도 단단해 보였다. 그러면 온전히 믿어볼 만한 누군가의 눈빛 앞에서 나는 마저 안심이 되는 것이다. 가슴이 작아 언제나 깊은 속 어딘가에는 최후의 한 수를 의심처럼 품어보는 사람마저도, 모조리 내던지게 만들어 버릴 만큼이나 그 애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고 적이 타올랐다. 비록 꺼져버렸지만, 그 애는 나의 첫 번째 우상이었다.


아무도 그의 불꽃을 꺼트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실지로 그는 꺾을 수 없이 단단하고, 구부려 부러뜨려보기에 쇠심줄같이 질겼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나보다 동우를 더 괴롭혔다. 동우는 소리 없이 강했지만, 소란스럽게 거칠지 않았거든. 그 나이 또래에는 겉치레와 오기, 기세 따위의 것들로 강함이 결정된다. 그리곤 서열이 발생하고, 그 서열대로 따르기를 한 자 의심도 없이 마땅히 여기는 불문율 같은 것이 또 한편 뒤따라 생겨난다. 동우의 마음은 누구보다 강하고 단단했지만, 그랬기에, 그의 외면은 소란스러울 필요가 없었고 그런 소인배들의 질서에 굴종할 필요가 없었다. 야단스럽게 몸집을 불린 아이들도 어쩌면 느껴버리지 않았을까. 그들을 납득시키고 굴종시키고, 즉 얌전하게 만들 수 있는 건 그들이 이미 한번 굴복한 것, 고막을 찢는 유리그릇 깨지는 소리와 같이 성난 노도였겠지만, 너희들도 불현듯 감각했을까? 소리 없이 굳세고 얌전한 단단함이 가지는 강함을? 그러메 너희는 아니라고, 저것은 강함이 아니고 오만방자함이요 분수를 모르는 시건방짐이라고, 끊임없이 그를 시험한 것이 아니었을까? 


아이들이 동우를 타작하던 것이 떠오른다. 동우는 항상 다수의 아이들과 싸웠다. 아이들이 먼저 시비를 걸면 동우가 지지 않고 맞대거리하다간 싸움이 번졌다. 그러던 어느날 동우는 나무로 된 교실 바닥을 휩쓸렸다. 여느 때 같은 투닥거리인 줄 알았으나 바닥에 밀치어 엎어져선 네 놈이었나 다섯 놈이었나, 발길질에 놀아났다. 그의 웅크려든 몸이 이리저리 퉁기는 것이 선하다. 아이들의 솜 발길질에 얼마나 다쳤겠냐만 것보다 아픈 것이란, 그가 짓밟혔다는 사실과 그 앞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던 나이다. 그는 스스로 일어났다, 사실 언제나 그랬다. 긴 줄에 매달린 열쇠를 목에서 빼내어 풍차처럼 휘두르며 물리쳐 일어났다. 그때까지도, 그 이전에도 나는 아무것 하지 못했다. 그가 자리로 돌아와, 분을 삭이지 못하며 씩씩대는 때 그저 눈빛으로,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가만 대고 있을 뿐이었다. 


그 일이 있고 얼마잖아 동우는 갔다. 어른들의 사정이었다고 하는데, 진짜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리 중요치도 않다. 어쨌든 그가 가버렸기 때문이다. 동우는 진심으로 가기 싫어했다. 어머니께 불같이 포효했고, 나와 함께 작당을 모의하며 시간을 늦추어보는 데 열심이었다. 나는 간절히 그가 가지 않기를 바랬다. 그가 나의 친구였기 때문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그가 나의 유일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가 가버린 다음 남겨진 나에 대한 두려움까지도 말할 수 있었다. 그는 그때마저도 용감했으나, 내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볼게 말한 어느 이튿날 인사도 없이 그의 집이 비어버렸다. 한참 문을 두드리고 두드리다가는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때 우리에게 핸드폰이 있었더라면 조금은 달랐으려나. 053으로 시작하는 집 전화 정도 겨우 있던 시절인데, 동우 어머니는 그마저도 미련처럼 남겨두고 싶지 않았던 듯하다. 전화번호부 앞에서 어떻게 하면 그 번호를 찾을 수 있을까 미련거리다가 어머니가 붙잡은 등판에 허물어 울어야만 했다. 


어른들이 빠져나간 동우네 공장에서 처음으로 마셔본 커피며, 여름철 에어컨이며, 베어링을 만드느라 달아오른 불 때 마른 쇠붙이 냄새며, 같이 타고 쏘다니던 자전거도 생각이 난다. 또 그의 집이 생각난다. 하루는 우리 집에서 같이 뛰놀다가 화단을 잘못 디디는 바람에 억센 장미 가시에 왼쪽 다리가 다 긁혀버린 적이 있다. 지금 생각에야 침 발라두면 다 낫는 것이라지만, 어머니는 집에 빨간약이 없다며 절절매시다간 동우네 집으로 보내시곤 했다. 방학이면 아주 그 집에 눌러살았다. 눈 비빌 시간마저 아까워하며 날 일으키던 그의 집. 아침잠이 많은 나로서는 아무리 어머니가 읍소한들 일어나기 어려운 것이 그 나이대의 생리거늘 자기 전부터 염원하던 동우네 집 생각이 자는 내내 곁에 함께하다간, 기상과 함께 또렷이, 그대로 이관되어 나를 번쩍 일으켜 세우곤 했지. 저녁만큼은 돌아와 먹거라 하시는 목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쏘아났다. 내 집처럼 드나들던 그 애의 집엔 온갖 게임기 하며, 둘이서 여기 있는 200가지 게임을 다 해보자고 으름장을 두던 일과 인상만큼이나 푸짐한 손을 가지신 동우네 어머님과 차려주신 밥상과... 이따금 생각나 비견이 되는 우리 집과 그 순간 다시 살아 돌아오는 묵직한 공포감과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과 그럼에도 그 시커먼 곳을 혼자서 기다리고 있을 어머니 생각을 하던 것까지도 기억이 난다. 어쨌든 나는 그만 있으면 다 괜찮을 것 같았다. 다른 누구도 필요 없이, 오직 그 애 하나만 있으면 찬찬히 다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동우가 가버린 것이다. 


동우가 갔다. 남아 있는 것은 보잘것없는 나와 외로움과 불안과 가끔씩 다가오는 경멸과 희화화와... 그럼에도 너희들과 아직 이별하지를 못해 한동안 따라다니려 애쓰던, 참을 수 없도록 초라한 나의 마음과 조용히 쌓여가는 수치였다. 그들이 한 조롱 중 어느 것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데, 단 한 구절은 기억이 난다. 나는 그를 인용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성적인 단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주 노래를 만들어 부르고 다녔다. 아직 그 멜로디마저 기억에 남았다. 나는 불러볼 수도 있다. 그 순간만큼은 왠만치 강렬하여서인지, 나는 그때 우리가 몇 시 즈음, 어디를 지나고 있었고 그 공간이 어떤 모양으로 되어 있는지까지 쨍하니 떠오른다. 성현이다. 기억 속에는 조롱의 노래를 지어부르는 성현이가 있다. 그의 목소리마저 있다. 


볼거리를 앓은 듯이 유독 처지듯 통통하고 사철 시뻘건 볼을 한 성현이는 훗날 어느 교과서와 예능 프로그램에서 다루는 찢어지게 가난한 7-80년대, 눅진한 단칸방에 홀어머니와 함께 자라난 듯한 아이의 몰골을 하고 있었다. 그런 것 있지 않은가. '명수는 12살'이라는 특집에서 꾀죄재한 아이들의 코 주변으로는 허연 것이 말라붙어 있고 볼은 새빨가니 분장해둔, 그런 모습으로 있다. 지금까지도 왜 가난한 아이들의 볼에 빨간 분장을 하는지는, 그게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애야말로 참으로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른 애들이야 심심풀이 조롱쯤을 하고는 말았지만, 성현이는 유독 나에게 적대감이 깊었다. 골목대장이자 동네의 악동으로 자라난 성현이, 그의 목은 그때부터 어딘가 쇳소리가 묻어났고 입은 거칠었으며 행동도 우악스러웠다.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지만, 이해한들 이해하노라 말할 수도 없는 것이고, 왜냐하면 그것은 동정이라 그에게는 가장 큰 수치와 치욕이 될 것이라, 애초 그것을 이해하고 깊은 침묵 속으로 머금어보기에는 나 또한 너무 어렸다. 


앞장서 조롱의 노래를 지어부르고, 이따금씩은 나를 쿡쿡 찌르며 욕설과 도발을 해대는 성현이에 대하여, 처음에야 웃어 넘기려 했다. 나는 싸우는 것이 싫었고, 더 정확히는 무서웠기 때문에. 화를 내는 순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널듯싶었다. 그래, 다들 서로 짓궂은 농담을 하는 와중에 나 하나 못 참아서야 될 일일까, 다 재밌자고 하는 건데 그치, 그렇지? 하며 실은 분노와 수치가 치밀어오르는 나를 달래는 데 급급했다. 하지만 결국 쌓여 있던 화는 터져 나오게 마련이라, 하지만 그것이 터져 나오는 동안에도 나는, 나의 마음은 그것을 주워담고 싶었으며, 그럼에도 마구 쏟아만지는 것들에 아연실색했다. 이성이 마비되고 내 전신이 분노에 점유되어 노도처럼 몰아대는 동안에도, 잠시 기능이 정지된 영혼은 자꾸만 멈추라고 들리지도 않는 소리를 질렀다. 광분이 가시고 나면, 차차 기능이 돌아오는 영혼으로는 대번 일전에 부르짖던 소리만이 남으며 순식간에 두려움과 후회에 휩싸인다. 


화를 낸들 내가 어떤 위압감이나마 가져볼 수 있었을까. 나는 매력도 없고 힘도 약한 사람이며, 그대들에게 티끌만 한 아쉬움도 줄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한 사람에 대한 예의는 그 사람을 잃을까 두려움에서 나오고, 뭇 사람에 대한 예의 또한 마찬가지인 터. 그것은 예의가 되었건, 내키지 않는 화해의 손을 내밀게 하는 마음인 미련이 되었건, 또 못 이기는 듯이 어색함에 고해보는 미안함이건 다 마찬가지이다. 그리하여, 이런 제반 사항을 미리 갖추지 못하고서 내지른 분노는 예상한 결말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침묵이 오래다. 다시금 천치가 되어 그대들을 졸졸 따라다니기에는 쉽게 던져대던 경멸과 수치의 기억이 진동을 해댔고, 또한 그대들 곁에서 줄곧 불안하고 외로웠던 기억이 손 쓸 수 없도록 무력함으로 나를 가로막았다. 그렇게 그대들과 마지못해 이별한다. 우리는 장차 중학생이 될 때까지 같은 공간에 있어야 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나는 그대들과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지만, 비로소 두려운 이별과 고독을 맞았다. 

 

 

- 계속   

[서상덕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5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