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우리 인생에는 해 뜰 날이 있다 - 태양

글 입력 2023.02.23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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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초, 바이러스로 인해 세계 인구가 급감하고, 모든 사회기반이 파괴된 때. 기적적으로 바이러스 항체가 생긴 사람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자외선에 치명적으로 약해 밤에만 활동 가능하지만, 젊고 건강한 신체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초월적 변이를 기반으로 정치 경제를 이끌어가는 존재가 된다. 그렇게 젊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밤의 세계로 몰려들고, 밤의 인간 녹스들은 신인류로 부상한다.

 

어느 날, 구인류가 모여 사는 작은 마을에서 신인류 녹스가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으로 마을은 고립되고, 사람들은 하나 둘 떠나 이제 남은 주민이라고는 스무 명 남짓. 10년이나 이어진 따돌림 같은 봉쇄가 풀린 지금, 다시 녹스와의 왕래가 시작되는데...

 

*

 

홍차 - 데스히코는 자신이 알고 있는 홍차에 대한 지식을 모리시게에게 알려준다. 그는 모리시게에게 알려주려 종이에 홍차에 대한 메모를 적어왔지만 모리시게는 녹스이기에 그 내용을 금방 외워버린다.

 

모리시게는 데스히코 덕에 홍차를 더욱 맛있게 우리는 법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데스히코가 겪은 수많은 시도들과 시간의 의미를 모리시게는 평생 알 수 없다. 데스히코, 큐리오에게는 자신의 친구에게 알려주려 종이와 펜을 꺼내 자신이 오랜 시간에 걸쳐 알게 된 것을 기꺼이 알려주려는 마음이 있다. 녹스는 그 정성 어린 행위를 비효율적이라 정의할 것이다.

 

포옹 - 레이코는 자신의 딸인 유를 보러 큐리오의 땅, 나가노 8구로 향한다. 녹스인 레이코는 본래 큐리오였고, 그 때 유를 낳는다. 그로부터 수 년이 지난 지금, 유는 레이코와 말을 몇 마디 나누고는 그가 자신의 엄마인 것을 알아챈다. 레이코는 그런 유를 보고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유에 대해 그저 평범하고 가난한, 비위생적인 아이라고 말하지만 동시에 매력적이라고도 한다.

 

레이코는 그 가난하고 비위생적인 아이가 왜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을까? 그 비위생적인 아이와 왜 포옹을 했을까? 애초에, 포옹이라는 행위를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녹스는 큐리오로부터 탄생한 존재이다. 레이코가 유를 만난 순간, 청결함보다 핏줄, 사랑이 더욱 큰 의미를 가지는 큐리오로서의 마음이 녹스의 판단을 혼란스럽게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큐리오에서 녹스가 되었지만 결국 그 뿌리는 큐리오에, 사랑에 있기 때문이다.

 

상상 - 연극을 보지 않은 친구에게 시나리오북을 넘겨주었다. 책을 다 읽은 친구는 나에게 다음 대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큐리오는 몸도 마음도 약하지만, 그렇게 약하니까 상상을 잘하는 거예요.

 

왜 그 대사가 인상깊었는지 물었다. 친구는 이 세상은 모두 사람의 상상으로 이루어진 것이니까, 라고 했다. 새를 보고 인간도 새처럼 날 수 있다면 어떨까? 상상을 했고 인간은 비행기를 통해 그들만의 날개를 만들어냈다. 인간은 치타처럼 달리기가 빠르지도 않고, 코브라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며 녹스처럼 마음이 강하지도 않다. 그렇지만 그들은 약하기 때문에 상상력이라는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독창적이고도 아름다운 강점을 가질 수 있다. 이 세상의 기반이 되는 상상력은 인간이 지닌, 다른 짐승들이 가진 단단한 껍질, 긴 수명, 빠른 달리기 실력 따위들보다 뛰어난 능력일지도 모른다.

 

친구는 녹스가 그래서 짐승이라고 생각했다. 신체적으로는 뛰어난 것이 없는 인간 큐리오에 비해 녹스는 다쳐도 회복이 빠르고 노화도 잘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녹스는 어찌 보면 인간이 가진 가장 큰 강점을 잃어버린, 큐리오보다 약한 존재이다.

 

[국립정동극장] 연극 태양_포스터(2.3-26).jpg

 

데쓰히코와 모리시게 - 큐리오 데쓰히코는 나가노 8구에서 자라왔다. 그는 학교에 제대로 다니지도 못 했다. 이에 비해 모리시게는 녹스 1세대이다. 큐리오로 살아 본 적이 없으며 경비원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큐리오와 녹스의 갈등이 절정이었을 때를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않았다. 비유하자면, 38선이 그어진 이후 태어난 나와 같은 세대라고 볼 수 있겠다.

  

데쓰히코는 학교에 다니며 지식을 배우고, 늙지 않는 녹스를, 모리시게는 모든 생명체가 빛나는 햇볕 밑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매력적인 예술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큐리오를 동경한다. 그들은 녹스와 큐리오 중 어떤 쪽을 택할 것인지 선택할 기회를 가진 적이 없다. 오로지 그들을 보호하는 어른들만이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참 모순적이게도 그렇기에 그들은 누구보다 자신과 다른 존재에 대한 이해가 뛰어나다. 그들은 상대방이 자신과 다르다고 무시하지 않고, 그들의 뛰어난 점을 발견하고 인정하고 진심으로 부러워 할 줄 아는 성숙한 존재이다.

 

사회에 의해 순수한 마음이 곧 상처가 되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마음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연극 내내 친구로서 귀여운 대화를 나누던 그들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 의해, 사회에 의해 상처를 주고 받아야만 하는 사실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지식은 있지만 지혜를 알 수 없는 모리시게와 지혜는 있지만 지식을 알 수 없는 데쓰히코의 입장이 모두 이해가 가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어른 - 똑똑히 들어요, 외모로 사람 판단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이래 봬도 쉰다섯이에요. 당신보다 나이 많을걸요? 나이 많다고 유세 떠는 게 아니라, 그런 식으로 겉만 보고 사람 판단하고 우습게 보는 게 싫다고요. 솔직히 나이 든 사람 중에 그런 사람 많잖아. 그게 뭐 하는 짓이에요? 어른이 할 짓이에요? 얼굴만 늙으면 다 어른이에요? 나이만 먹었지 어린애 같은 인간이 수두룩하잖아. 그렇다니까요. 나이는 허세 같은 거예요. 몸만 늙은 게 아니야, (머리를 가리키며) 여기도 늙었어. 그러니까 큐리오라는 소릴 듣지. 진짜 어른이 되라고요, 좀.

 

골동품 - '큐리오'라는 이름은 골동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녹스에 비해 낡은 존재이기에 붙여졌다. 누군가가 나에게 골동품이라고 하면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다만 최근 레트로 열풍과 함께 옛것이 다시금 떠오르고, 오래된 물건일수록 값어치가 올라가는 흐름을 보면 큐리오라는 이름의 유래가 흥미롭다.

 

충돌 - 녹스와 큐리오는 화합할 수 있을까? 혹은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아마도 큐리오가 녹스에게- 흡수되어 하나의 존재로 살아갈 수 있을까? 아마도 그들은 끊임없이 충돌할 것이다. 다만, 충돌은 곧 부정적인 의미로 치환되지 않는다. 해와 달은 충돌함과 동시에 서로 자리를 바꾸며 그들 존재를 세상에 내보인다. 높은 하늘은 낮은 땅이 있기에, 바다는 땅이 있기에 그들만의 독창성을 인정받는다. 전지전능해보이는 태양조차도 밤이 있기에 소중함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의 공존은 충돌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성장하기 전 성장통을 겪는다.

 

노화 - 굉장히 매력적이야. 뭐랄까, 건강미가 있어요. 실제론 우리가 더 건강하겠지만. 음. 그런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면 건강해 보인다니까. (기분 좋은듯 웃는다)

 

인간이 가진 가장 강한 힘이 상상이라면,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행운은 노화일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노화를 겪고 수명을 다한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 삶은 유한하다. 그렇기에 인간은 최선을 다할 수 있다. '곁에 있을 때 잘하라'는 말과 같이 우리는 언제 이별할지 모르는 이 사람을 위해 나의 온 애정을 기꺼이 쏟을 수 있다. 노화는 단지 죽어가는 과정의 일부가 아닌 우리 삶에서 단 한 순간도 빠지지 않는, 늘 나의 곁을 함께 걸어가주는 동반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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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시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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