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먼 곳에의 그리움 [여행]

강릉을 먼 곳으로 두기로 한다
글 입력 2023.02.19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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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의 그리움(Fernweh)!

모르는 얼굴과 마음과 언어 사이에서 혼자이고 싶은 마음!

아무튼 낯익은 곳이 아닌 다른 곳,

모르는 곳에 존재하고 싶은 욕구가 항상 나에게는 있다.

 

전혜린, 목마른 계절

 



가까운 곳, 서울에서



일주일의 일과를 모두 마친 일요일 밤이었다. 몸도 정신도 지쳐 침대에 누워는 있었지만, 좀처럼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권태와 설렘을 반복하는 삶의 주기에 다시 권태가 찾아온 탓일까. 아니면 길어진 취업 준비 기간으로 초조해서일까.

 

분명 현실에의 권태와 미래에의 불안을 어르고 달래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게 다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매일같이 머릿속을 맴도는 근심에 심장이 빠르게 뛸 때도, 취업으로 인해 좌절을 몇 차례 겪을 때도, 그 어떤 것도 정해지지 않은 아득한 미래에 허정거릴 때도.

 

그러나 그 모든 노력을 비웃듯 나는 초라함의 반복인 현실에 함락당했다.

 

방문을 벌컥 열고 어디론가 뛰쳐나가는 상상을 했다. 방문 밖의 가족 구성원의 광경을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자 예측 가능한 모든 것에 숨이 막혀왔다. ‘지금 여기’만 아니라면 어디든 좋을 것 같았다. 나의 체내는 금세 탈출 욕구로 들끓었다.

 

자정이 다 되도록 잠에 들지 못하고 뒤척이던 난 불현듯 강릉을 떠올렸다.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으면서 바다를 원 없이 볼 수 있는 그곳. 강릉에 거주하는 미래를 꿈꾼 적도 있을 정도로 내게 강릉은 항상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공간이었다. 다른 도시에 비해 압도적으로 자주 다녀온 나의 강릉.

 

청록 빛깔의 청아한 물결, 모든 것을 투명하게 쓸어내리는 쏴아아-하는 파도 소리, 한발 내디딜 때마다 포실 힘없이 파이는 자글한 모래의 촉감을 상상하자 강릉에 대한 그리움은 이윽고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게 ‘먼 곳에의 그리움’일까 잠시 생각했다. 아무튼 난 그때 강릉으로 떠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리고 결국 바로 다음 날인 월요일 아침, 난 강릉으로 향했다.

 

 

 

먼 곳, 강릉에서


 

이번 여행이 최대한 사변적이고 현학적이며 비생산적인 것들로 가득하길 소망하며 강릉에 도착했다. 가까운 곳인 서울에서의 일상이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며 생산적인 것들의 연속이었다면, 먼 곳인 강릉에선 그렇지 않을 수 있길 바랐다.



[크기변환]강릉_자연재해.jpg

 

 

첫째 날은 바다 앞의 숙소를 잡았다. 해는 이미 져서 어스름했고, 싸리눈이 투둑투둑 내려 파도가 거센 밤바다의 풍광은 흡사 자연재해 같았지만, 그럼에도 낯선 프레임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속이 뻥 뚫렸다.

 

누군가는 잠자리가 달라지면 잠을 못 이루겠다고 하던데 나의 경우, 되려 그 반대였다. 커피 5잔을 때려 부은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려 잠을 잘 이루지 못했던 서울에서와는 달리, 강릉의 그 숙소에선 은은하게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번잡스러운 걱정들을 흘려보내어 편안하게 잠에 들 수 있었으니 말이다.

 


[크기변환]강릉_숙소.jpg

 

 

둘째 날, 눈을 뜨자마자 창문 쪽으로 달려가 명랑하게 커튼을 젖혔다. 밝은 아침의 바다를 보고 있자니 비일상의 공간, 즉 ‘먼 곳’으로 떠나온 것이 실감 났다. 오늘은 이곳에서 무얼 할까 고민했다. 그러고 보니 이 고민을 하며 설렌 것도 꽤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크기변환]강릉_영진.jpg

 


이날은 식사 후, 우연히 도깨비 촬영지인 영진해변을 만났다. 방파제에 파도가 간헐적으로 멋있게 부서지는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흐리고 돌풍이 불던 날씨에도 사진을 찍으려 줄 서 있는 무리들이 꽤 있었다. 나 역시 줄을 서고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근처 통창의 바다 뷰 베이커리 카페로 향했다. 평소에 작업하기 위해 항상 들고 다니는 무거운 아이패드나 노트북이 아닌, 작고 얇은 책 한 권만을 가뿐하게 들고 왔다는 사실에 먼 곳에서 만끽할 수 있는 ‘비일상의 자유’를 새삼스레 체감했다.

 

 

[크기변환]강릉_반신욕.jpg

 

 

둘째 날은 욕조가 있는 숙소에 묵었다. 가사 없는 잔잔한 음악을 음질 좋은 스피커로 틀어두고는 물이 무겁게 찰방거리는 욕조에 입욕제를 넣었다. 욕조 안은 곧 보랏빛과 하늘빛으로 물들었다.

 

알록달록 뽀얘진 물에 발가락부터 살짝 담가보았다. 이내 풍성한 온기를 머금은 물이 유려하게 허벅지를 지나 배와 가슴까지 나를 안심시키듯 포옹했다. 어느새 이마에는 땀이 송글 맺혀있었지만 반신욕 특유의 나른함이 좋아 예상보다 오래 욕조에 머물렀다. 반신욕을 한 덕인지 이날은 첫날보다 더욱 빠르게 잠에 들었다.

 


[크기변환]강릉_눈.jpg

 

 

마지막 날. 서울로 되돌아가야 하는 날이 왔다. 잠에서 깨 커튼을 치니 세상이 온통 눈으로 뒤덮여 새하얬다. (강릉 폭설로 20cm가 쌓인 날이었단다.) 결국 이날은 강릉을 제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숙소에서 나오자마자 급하게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 가까워질수록 비현실적으로 새하얗기만 하던 강릉의 세상은 점차 사라졌고, 회빛의 콘크리트 도로가 눈앞에 펼쳐졌다.

 

 


다시 가까운 곳, 서울로 되돌아와서



서울로 돌아오니 미뤄둔 일들은 정말이지 산더미였다. 밀린 빨래와 방 대청소, 그리고 3일 남짓 남은 아트인사이트 기고 글 작성, 그간 업데이트된 채용 공고에 맞춰 다시 꾸릴 포트폴리오, 새로운 프로젝트를 위한 전 직장 동료와의 만남 등.

 

하루 일과를 차례대로 해치우며 '역시 가까운 곳은 의무와 책임과 마감이 만연하구나' 생각했다. 여행을 다녀오면 일상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는데, 난 여전히 먼 곳에 목이 말랐다. 심지어 이번 여행 이후, 강릉에 거주하고 싶다는 갈증은 이전보다 더 심해진 것 같았다.

 

날마다 바다를 볼 수 있는, 조용하고 느릿한, 평화로운.

 

서울로 돌아온 지 불과 이틀 만에 난 다시 강릉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런 마음을 담아 이 글의 초고를 쓰던 중 아래 문장을 만났다. 

 

 

고통은 수시로 사람들이 사는 장소와 연관되고, 그래서 그들은 여행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그것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다.

 

데이비드 실즈,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지금이야 새롭고 낯선 강릉에서의 하루도, 그곳이 집이 되고 나면 언젠간 안전하고 지루한 일상으로 채워지겠지. 새하얀 기대와 동경으로 가득 차 있던 강릉도 언젠간 그을린 고통과 슬픔이 뒤섞이겠지. 

 

그리하여 언젠간 강릉의 모든 것이 내게 시들시들해지는 날, 난 다시 다른 먼 곳을 그리워하며 강릉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어하겠지.

 

어쩌면 자명하고 당연한 사실일 테다.

 

사색을 늘어놓던 난 훗날 강릉에 살고 싶다는 다짐을 보류하기로 한다. 그리고 강릉을 가까운 곳이 아닌 먼 곳으로 두는 것에 만족하기로 한다.

 

일상이 지칠 때 꺼내어 마음껏 그리워하며 기댈 수 있는, 그을린 슬픔과 고통은 전혀 없이 미화되어 새하얗기만 한, 비일상적이기에 이상적인 '먼 곳'으로, 가장 애정하는 도시 강릉을 남겨두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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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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