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이 겨울, 여름 파도처럼

글 입력 2023.02.13 10:22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겨울이지만 특별한 여름을 보냈다.

 

제일 싫어하는 계절이 여름인데 굳이 여름 나라까지 날아갔다. 3주 내내 시드니에 있었으니 꽤 긴 시간이다. 가서 뭘 했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이곳저곳 바쁘게 돌아다녔지만 바다를 자주 찾았다.

 


KakaoTalk_20230212_222612795_08.jpg

 

 

바다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바다 수영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어 겁을 먹고 있는 걸 알아챘는지 파도가 나를 자꾸만 해변으로 돌려보냈다. 안전함을 느꼈다.

 

바다는 생각보다 신비로운 점이 많다. 무진장 두려운 동시에 쉼이 된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다가올 앞날이 반갑고 기대되는 한편 두렵고 막막해지기도 하지만 다 파도 같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든 나는 안전한 육지로 돌아온다.

 

 

KakaoTalk_20230212_222612795_04.jpg

 

 

어쩌다 보니 사람이 한두 명 있을까 말까 한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

 

아득해서 바닥도 보이지 않는데 무슨 용기였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깊은 곳에 한참을 둥둥 떠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잔잔했다. 부드럽게 나를 위로 떠올렸다가 지나간 파도는 육지에 가까워질수록 어마어마하게 거대해져 사람들을 집어 삼켰다.

 

두려워서 가지 않으려고 했던 곳이 오히려 잠잠하다니 살짝 속은 느낌이다. 기분이 묘했다. 해변도, 바다의 중심도 아닌 애매한 거리에서 맞이한 파도가 가장 강하다. 어쩌면 일상 속의 나는 그 ‘애매한 거리’에 있어 두려운 게 많은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확실한 건, 파도도 걱정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거다. 그냥 왔다 갔다 할 뿐이고 나는 파도에 몸을 둥둥 맡겨 놓는다. 대학원을 무사히 졸업하고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 예술과 사랑 타령을 실컷 하며 살게 되더라도 편안해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다음엔 뭘 연구하지, 빠진 머리는 심어야 하나 가발을 만들어야 하나, 같은 그 때의 또 다른 파도가 있을 거다.

 

 

KakaoTalk_20230212_222612795_02.jpg

 

 

시드니에 있으면서도 대학원 면접 준비 때문에 마음이 분주했다. 여행 전에 넣은 서류가 붙어버려서 비행기에서부터 미술사와 한자를 달달 외웠다.

 

스스로에 대한 의심에 습격 당할 틈도 없이 바빴다. 낮에는 놀아야 하니까 잠을 줄여 새벽과 아침시간을 공부하는 데 할애했다. 하기 싫어 책상을 뒤엎고 싶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머리를 싸매다 문득 엄마를 생각했다.

 

“아~ 하기 싫다~”

“그럼 하지 마”

 

엄마는 늘 이런 식이다. 어렸을 적에는 이런 엄마한테 섭섭함을 느낄 때도 있었다. 하기 싫으면 놀거나 쉬라는 말에 서운함을 느끼다니 웃기지만 어린 내가 원했던 건 “그래도 파이팅!” 정도의 작은 응원이었던 것 같다. 놀아도 해야할 일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니 말이다.

 

나를 향한 엄마의 신임과 방임 사이를 헷갈려 하며 자랐지만 이제는 확실히 안다. 나를 누구보다 잘 아니까 그냥 휴식을 권했다는 것을. 나보다 나를 더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덕분에 나는 꽤 뿌리가 단단하고 괜찮은 어른이 됐다. 여전히 걱정은 많지만.

 

 

KakaoTalk_20230212_222612795_05.jpg

 

 

하지만 걱정 고민이 단 하나도 없는 평온한 순간 같은 건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다만 파도가 있어도 충분히 평화로울 수 있다는 사실만 알면 된다. 파도든 걱정이든 그냥 흘러가듯 같이 사는 거다. 너무 휩쓸려 상어밥만 되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실제로 내가 놀았던 바닷가에 상어가 나와 해변을 폐쇄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

 

살다 보면 이렇게 진짜 상어밥이 될 뻔한 순간들도 있겠다.

 

 

KakaoTalk_20230212_222612795.jpg

 

 

다시 해변으로 올라와 읽을 것도, 쓸 것도 없어 눈이 멀도록 바다만 바라봤다. 좋은 여행은 끝나는 게 아니고 시작하는 마음을 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여름에서 겨울로 다시 돌아왔고, 내가 돌아오고 며칠 지나 엄마가 여행을 떠났다. 나는 새해 첫날을 시드니에서 보냈고, 엄마는 생일을 프랑스에서 보낸다. 무의식까지도 좋은 것들만 기억되기를 바래본다.

 

흘려 보낼 건 적당히 흘려 보내고 무심하게 또 다시 돌아오는 파도처럼.

 

 

[신유빈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5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