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공간의 힘 [공간]

글 입력 2023.02.04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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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 마련의 꿈의 꿈의 꿈



청소년기는 인간의 생애주기 전반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시기다. 청소년기 내내 기숙사 학교에 재학하면서 기숙사는 나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지대한 영향이란 '나만의 공간'에 대한 열망이다. 학교는 아이들의 연속적인 생활 주기를 한 학기 단위로 쪼개어 놓는데, 기숙사 학교의 특징이 있다면 이 생활 주기에 시간 개념 외에도 공간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학기가 끝날 때마다, 나와 친구들은 정들었던 방에 허탈한 안녕을 고하고, 이내 감상은 뒤로한 채 한 학기 동안 내가 축적해 왔던 책이니 잡동사니니 온갖 물건들을 커다란 바구니에 담아 대규모 이사를 감행해야만 했다. 이때만 되면 나에게 소중했던 모든 물건이 짐처럼 느껴지는 건 왜였을까. 누군가가 그려 준 그림, 귀여운 인형, 스티커와 포스트잇, 그토록 소중한 추억이 담긴 물건이라 할지라도 이사 바구니에 담기는 순간 그것은 몇 그램짜리의 짐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리하여, 몇 달 뒤 떠날 방을 애써 공들여 꾸미는 행위는 어쩐지 미련하다고 느껴졌으며, 점차 방의 기능은 수면에만 한정되기 시작했다. 대신에, 나는 "오늘의 집"과 같은 자취 용품 판매 사이트에서 성인이 된 후 마련할 나만의 영속적인 방을 어떻게 꾸밀지 공상하는 것을 종종 즐겼다. 물론 미성년자 입장에서 상상한 성인은 늘 현실에서 크게 빗겨나가는 법이라서, 성인이 된 지 몇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세입자로 살며 언젠가 다가올 그날을 공상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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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취향



내 집 마련의 미래가 너무 먼 미래로 느껴지면서, 그 비현실성으로 인해 방 꾸미기에 대한 로망도 점차 흐릿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과 어떻게 방을 꾸밀지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토록 많은 로망을 간직했던 나지만 당장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 못했다. 사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는 말이 정확하다. 내 지론으로, 인간의 취향은 마치 화초와 같아서 계속해서 사랑과 관심과 물을 주어야만 자라날 수 있으며, 그 모든 요소에 선행하는 조건은 바로 화초를 키울 수 있는 공간이다. 어쩌면 취향이 있기 때문에 방을 꾸밀 수 있는 게 아니라, 반대로 방을 꾸밀 수 있기 때문에 취향을 갖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최근 '개인'이 중요한 사회로 접어들면서, 남들과 차별화되는 개인의 개성을 육성하고 PR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이때 자기만의 방이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은 '가시화'로, 개인의 취향을 물리적으로 전시할 수 있고 자아가 실존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감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최근 '힙'한 공간이 인기를 얻는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다. 다른 공간과 차별화되는 매력을 감상하는 재미와 더불어, 마음에 드는 공간에 방문함으로써 자신의 취향 역시 '힙' 한 것이라 동일시할 수 있다는 자기 암시적인 효과 때문이리라.

 

 

 

개인의 생활 양식



그러나 단순히 내 집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의 개성을 발휘할 수 있는 모든 통로가 열린다고는 볼 수 없다. 애초부터 제한적으로 설계된 건축물에서는 개인의 행동 범위 역시 제한되기 때문이다. 높아지는 부동산 가격으로 인해 내 집을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도 문제지만, 그 모든 인고를 거쳐 갖게 된 집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을 수 있다는 점도 큰 문제다.

 

여기서 공간의 문제는 단순히 취향에 한정되는 이야기가 아니며, 이 문제는 개인의 생활 양식까지도 확장될 수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도시 환경의 동질화는 안타까운 현상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처음 서울에 도착했을 때 모든 건물이 네모반듯한 고층 건물로 똑같이 생겼다는 사실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시골 마을에는 똑같이 생긴 집을 찾아볼 수 없다.

 

특히 대부분의 시골집이 가지고 있는 마당은 각 가구마다 울타리 위치나 텃밭 배치 등이 모두 다르고, 이러한 차이는 집주인의 생활 패턴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마당에 반려견을 풀어 놓는 가정이라면 주변에 울타리를 쳐 놓는 식이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집 구조에 개를 키울 수 있는지 자체가 달려 있기 마련으로, 대학가 원룸에 살면서 강아지를 기르는 사람은 거의 본 적이 없다. 이처럼, 동질적인 구조의 건물에서 사는 사람들은 생활 패턴마저도 동질적이다. 어쩌면 개성적인 삶이란 그만큼이나 개성적인 삶의 공간이 뒷받침되어야지만 가능한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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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모든 행동



공간에는 힘이 있다. 그것도 아주 강력한. 미술관의 동선을 정하는 작업은 매우 까다롭고도 중요하다던데, 전시장을 걷는 방식이 관객이 작품을 보는 시각과 정보의 폭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처럼 한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의 행동은 크건 작건 건축가의 의도에 일정 부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공간에는 권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공간의 권력성과 소비사회가 결합할 때 발생한다. 이제 도시에는 비싼 공간과 덜 비싼 공간만이 있을 뿐이며, 인간의 행동이 늘 공간을 필요로 한다면 이제 우리의 행동에도 가격표가 붙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특정 장소로 이동할 때(지하철),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카페),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가꾸기 위해 운동할 때(헬스장), 삼시세끼 식사를 챙겨 먹을 때(식당), 우리는 언제고 지갑을 꺼낼 수밖에는 없다. 그렇다면 이제 인간의 취향과 행동은 공간을 설계한 자 그 위에 군림하는, 자본을 가진 자에 의해 지배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물론 이는 기업 지배 사회를 다루는 소설에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허무맹랑하거나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닐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극단적으로 다음과 같은 부작용을 내포한다. 지불할 능력이 없는 자, 취향을 갖지 말라. 지속적인 상승으로 이제는 OTT 서비스 월간 구독권과 비등비등한 영화표 값을 지불할 수 없다면, 영화를 통한 인문학적 교양과 유희를 누리지 못한다. 지불할 능력이 없는 자, 또한 행동에 제약을 받으리라. 당장 우리의 의식주를 실현하기 위한 모든 행동은 옷가게, 식당, 마트, 월세 전세 자가라는, 필수적 공간을 요구하고 있다. 이처럼 공간의 광범위한 유료화는 소득 수준에 따라 개인의 행동에 제약을 부과하기 시작하며, 그로 인한 불평등이 작지 않은 사회적 이슈로 번질 수 있다.


인간은 독립적인 주체로서 공간과 상호작용해야 하며, 공간은 인간의 행동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지 인간을 아예 지배해 버리는 주객전도를 펼쳐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인간 주체성을 발휘하기 어려운 공간으로 변모하여, 인간의 힘을 한없이 약화시키면서도 공간의 권력성은 극대화하고 있다.

 

가끔 서울이 작은 칸으로 나뉜 양말 정리함 같다고 생각한다. 열차에서 지하철역으로, 지하철역에서 빌딩으로. 좁은 칸에서 해방된 줄 알고 상쾌하게 튀어나왔지만, 그런 우리들을 기다리던 건 그보다는 조금 더 넓을 뿐인 또 다른 칸이다. ‘산 넘어 산’을 오늘날에 맞게 바꾼다면 ‘칸 넘어 칸’이 아닐까?


우리는, 애초에 가진 적도 없었던 초원과 평야를 잃어버리고, 그저 양말 정리함을 데굴데굴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칸의 성질은 피동성이다. 칸이라는 명사에 조응하는 동사를 떠올려 보자. ‘담다’나 ‘넣다’ 등이 있겠다. 그렇다면 칸에 담기는 대상을 주어로 한 문장은 언제나 피동문이다. 칸에 사는 이상, 인간은 담기고 넣어지는 수동적 객체로 전락한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다른 모든 중요한 요소들과 함께 공간의 문제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한 눈에 보이는 것들



언젠가 엄청난 부자가 되어서 사회가 제공하는 모든 공간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임시방편에 불과하며 나의 인간성을 피동문의 형태로 접어 넣는 일에 동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대안은 도시 공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변화다. 예컨대 '핫'플레이스가 아닌 '힙'플레이스가 더 많아졌으면 한다. 물론 이 같은 '힙' 함은 종종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놀림감의 대상이 되곤 하지만, 그저 이목을 끌기 위한 노이즈 마케팅이 아니라 개인의 개성과 취향을 지키기 위한 공간이 다양한 세상이라면, 모든 건물이 네모반듯한 획일화 사회보다는 더 살기 재미있지 않을까 싶다.


일전에 싱가포르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는데, 서울만큼이나 사람이 많은 북적북적한 도시였는데도 그곳의 모든 건물이 서로 다르게 생겼다는 점에 매우 놀랐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싱가포르는 유사한 디자인의 건물에는 아예 건축 허가를 내주지 않기로 국가 방침을 두고 있었다. 이처럼 법제화를 통해 강제할 필요까지는 없더라도, 설계할 때부터 다양한 삶의 양식을 포용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크다. 물론, 여기서 다양한 삶의 양식을 포용하는 건축에는, 단순히 개인의 취향을 반영하는 것 외에도, 성별, 나이, 장애로 인해 제약받지 않도록 선제적 섬세함을 발휘한 설계인 '유니버셜 디자인(universal design)'을 포함해야 할 것이다.

 

 

 


이 외에도, 앞서 공간과 인간 행동의 유료화 문제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그에 대한 대안으로 공원이나 벤치와 같은 공용 공간이 더 많이 설치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유튜브 채널 '셜록 현준'의 한 영상이 인상 깊었는데, 여기서 유현준 교수는 모든 공간의 유료화로 인한 강남의 배타성을 지적한다. 흥미로웠던 점은, 이처럼 개인의 경제 능력에 따라 공간의 장벽이 발생할 경우 '공통의 추억'을 쌓기 어려운 공동체 파편화의 문제로 이어진다는 관점이다. 즉, 도시 공간의 문제는 단순히 인간 주체성이라는 개인의 차원을 뛰어 넘어 공동체적 측면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양한 배경의 소지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유대감을 형성하는 건강한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언제든 편하게 머무를 수 있는 공원과 벤치가 필수적이라는 그의 대안에도 역시 크게 공감할 수 있었다.


<어린 왕자>에는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그런데 가끔은, 눈에 보이지 않는 중요한 무언가가 실존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려면, 눈에 보이는 것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취향, 주체성, 공동체 의식, 이 모든 소중한 가치들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이 언제든 누구에게든 열려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김채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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