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몰락하는 자 [도서/문학]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몰락하는 자』
글 입력 2023.02.04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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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이상적 예술 앞에서 한없이 몰락하는 한 인간의, 어쩌면 두 인간의 이야기이다.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1741)으로 세기의 피아니스트가 된 실존 인물 ‘글렌 굴드’를 모티프 삼아 섬세히 본뜬 허구의 소설이다.

 

작품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1인칭 화자, ‘나’는 28년 전에 함께 피아노를 공부했던 친구, 베르트하이머가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듣고 친구의 죽음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그가 살았던 마을로 찾아간다. ‘나’는 베르트하이머가 머물렀던 여관에 투숙하고 그곳의 여주인, 벌목꾼과 차례대로 만나 베르트하이머에 관한 대화를 나눈다.

 

28년 전 '나'와 글렌 굴드, 베르트하이머는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에서 피아노의 거장 호로비츠의 수업을 들으며 친해지게 되는데, 우연히 학교 복도를 지나다가 글렌 굴드의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듣게 된 베르트하이머는 그 자리에서 곧장 몰락해 버린다. 아니, 몰락당해 버린다. 자신은 결코 그 경지에 다다르지 못할 것임을 온몸으로 감각한 그는 대가가 되겠다는 꿈을 폐기하고는 ‘정신과학’으로 도피한다. 그리고 ‘나’ 역시 ‘철학’의 길로 들어선다.

 

『몰락하는 자』의 주인공은 화자인 ‘나’도, 이상적 예술가로 묘사되는 글렌 굴드도 아닌 몰락하는 자, 베르트하이머이다. ‘나’와 베르트하이머는 글렌 굴드의 천재성을 목격한 뒤, 동일하게 포기를 택하지만 글렌 굴드의 죽음 이후 자살을 택한 베르트하이머와는 달리 ‘나’는 유일하게 살아남는다. 베르트하이머와 ‘나’. 둘을 구분 짓는 '몰락하는 자'의 조건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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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베르트하이머에 의해 묘사되는 글렌 굴드는 과연 다르다. ‘나’의 눈에 글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아노 분야의 경천지동할 권위자, ‘글렌 굴드’라는 인물이 되는 것을 목표 (당시의 글렌은 알 수 없었겠지만)로 삼은 자처럼 비친다. 글렌은 자연은 자신에게 적대적이라며 피아니스트가 아닌, 오롯이 피아노 자체이길 원한다. 그는 참으로 누구나 한 번쯤 그려봤거나 (간접적으로라도) 접했을 법한 이상화된 천재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심지어 강인한 정신, 신체마저 소유한 그는 거의 ‘완벽자’에 가까워 보인다. ‘나’는 글렌 굴드가 자신을 파멸의 길로 이끌었다고 생각하지만서도, 그를 열렬히 숭배하고 여전히 사랑한다.

 

몰락자 베르트하이머와 마찬가지로 글렌 굴드에 의해 꿈을 처분 당한 ‘나’는 자신의 피아노를 어느 교사의 딸에게 줘버리며 퇴화 과정에 진입한다. ‘나’는 피아노 대가의 길을 때려치우며 사실 자신은 대가를 희망한 적이 없다며, 피아노는 부모님으로 표상되는 권태로운 가문과 그 세계에 맞서기 위한 나만의 요새였을 뿐이라고 말한다. 여기까지의 내용에서는 베르트하이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을 꿰뚫어 본다는 글렌은 베르트하이머를 가리키며 “우리의 몰락하는 자는 맹목적이야. 그칠 줄 모르는 자기 연민 때문에 죽어가고 있잖아.” 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 또한 베르트하이머를 ‘선택의 폭이 여기 막다른 골목이냐 저기 막다른 골목이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게 고작이고 그런 막다른 골목 메커니즘에서 결코 헤어 나오지 못’하는 막다른 골목형 인간으로 묘사한다. ‘절망하지 않으려면 스스로를 유일무이한 존재로 여기고 또 그래야만 하는데 베르트하이머는 ‘나’와는 달리 그럴 줄 몰랐기’에, 오직 모방자로서만 존재했기에, 그의 몰락은 필연적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허구와 현실, 이성과 감성을 넘나들며 절대적 예술 앞에서 끊임없이 좌절한 두 인간, ‘나’와 베르트하이머의 대비되는 결말은 인생과 예술을 대하는 각자의 태도를 성실히 반영한다.

 

책은 간결하고 명쾌한 줄거리와는 달리 쉽게 읽히는 편은 아닌데 챕터, 단락의 구분 없이 의식의 흐름에 따라 문장들이 배열되고 있기 때문이다. 쉼 없이 반복, 변주되는 말들이 쌓이면 쌓일수록 화자에 대한 불신 또한 높아진다. ‘나’와 베르트하이머의 경계가 선명히 인식되던 전반부에 비해, 가면 갈수록 그 선이 다소 흐릿해짐을 느끼게 된다. 독자인 나는 어느샌가 베르트하이머가 되어 그를 찍어누르는 ‘나’의 따가운 문장을 몸소 감각하며 고통받는다. 읽으면서 그만 벗어나고픈 충동을 몇 번이나 눌러야 했는지 모른다.

 

여동생을 자신을 위한 존재로 취급하며 죽어서까지 옭아매려 했던 이기적인 베르트하이머. '숨기는 데 천재였던‘나’와 달리, 아무것도 숨기지 못하고 항상 모든 것을 떠벌려야만 했'던, 한평생 자신을 노출해야 직성이 풀렸던 베르트하이머. 누가 봐도 별로인 그에게, 어쩌면 몰락 당해 마땅하다 여겨질 그에게 동정을 느끼는 건 너무 위험한 감상인가.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항상 자기가 가고 싶어 하는 길을 걸었지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그 친구는 나보다 걷는 속도가 빨라서 늘 뒤쫓아가야 했어. 환자는 내가 아니라 그 친구였는데 말이야, 오히려 환자는 내가 아니라 자기였기 때문에 늘 처음부터 앞장서서 나를 쫓아오게 만들었을 거야. 난 생각했다. (『몰락하는 자』, 43쪽)

 

 

예술에 대한 포기를 행위로써 드러낸 것은 ‘나’가 먼저였을지언정, 결국 먼저 패배 당하고 몰락한 것은, 먼저 죽은 것은 이번에도 앞서 간 베르트하이머라는 생각을 한다. 재차 나오는 ‘나’의 구분 짓기 및 부질없는 가정은 ‘나’ 또한 그렌 굴드를 끝내 떨쳐내지 못한 모순을 보여준다. 어쩌면 베르트하이머는 단지 먼저 몰락했을 뿐인 거 아닌가? 더하여 ‘나’는 몰락마저 하지 못한 인물이라는 다소 꼬인 생각까지 든다.

 

‘나’가 말하는 베르트하이머는 분명 ‘삶으로부터 도망치려는 헛된 시도’로서 불행을 사랑한 환자이자, 자신이 평생 쓴 아포리즘의 가치를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고 죽기 전 불태워 버리는 겁쟁이이다. 그런데 어찌 마음이 그리로 더 기우는 것인지. 『몰락하는 자』가 남긴 '몰락하는 자'는 베르트하이머만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자주 얘기했던 작은 후퇴도 그는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지, 그 친구는 예술가이길 바랐지, 인생의 예술가가 되는 것만으로는 만족을 못 했어,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안겨주는 건 인생의 예술가라는 단어인데 말이야, 난 생각했다. 결국 그 친구는 자신의 실패와 사랑에 빠졌어, 아니 실패에 홀딱 빠져버렸지, 실패하기를 끝까지 고집했어, 그는 자기가 불행하다는 사실 때문에 불행했지만, 자고 일어났는데 불행이 사라졌거나 찰나의 순간에 불행을 빼앗겼더라면 더욱더 불행해졌을 거야, 그것만 보더라도 그는 진정으로 불행했던 게 아니야, 불행을 통해서 불행과 함께 행복했다는 증거지, 불행 속에 깊이 빠져 있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들도 많잖아, 그렇다면 베르트하이머도 자기 불행을 항상 의식했고 자기 불행을 만끽할 수 있었으므로 사실은 행복했을지도 몰라, 라고 난 속으로 중얼거렸다. (『몰락하는 자』, 101쪽)

 

 

[박예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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