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여행자의 낯선 기웃거림, 스페인 여행일지

여행엔 낯선 것이 주는 확장이 있다
글 입력 2023.02.02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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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곳에서 벗어나는 것을 귀찮아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으로서 여행은 고려 대상에서 항상 제외한다. 정말 친밀한 지인들의 권유가 없는 이상 제주도는커녕 1시간 거리도 떠날 생각을 안 하는 사람이 나이기에 “아, 여행 가고 싶다”는 말은 대부분 단순한 입버릇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내가 가족과 무려 스페인에 다녀오게 되었다. 첫 유럽 여행의 설렘은커녕 떠나기 전부터 온갖 두려움만 밀려왔다. 나 다시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면 어떡하지. 일상으로 복귀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친구들 못 만나면 어떡하지. 일주일 남짓한 여행에, 언제부터 삶에 큰 애정을 가졌다고(물론 친구들은 애정한다) 불안만 키워 가는지 역시 자칭 겁쟁이가 틀림없다.


이토록 변화에 낯선, 굳이 여행이 필요하나 싶던 겁쟁이의 편협에 정반대의 시차를 가진 나라는 큰 균열을 냈다. 나는 낯선 땅을 밟은 지 3일 만에 여행을 사랑하게 됐다. 아니, 여행 자체보다는 여행이 주는 감각을 사랑하게 됐다는 말이 더 정확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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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조경, 건축물, 자연 풍경, 골목 사이사이 등은 정말 압도적이었다. 목이 아플 정도로 높이, 눈이 빠질 정도로 멀리 보는 것들이 기본인 세계다. 과거에 이런 건축이 가능했다니, 이것들이 세계의 불가사의로 여겨지지 않는 것이 더 의아했다. 압도당하는 느낌에 매몰되어 웬만큼 수려한 풍경이 아니면 눈길을 주지 않게 되기도 했다. 특히 예술적 영감을 풍부히 향유하고 싶은 이들에겐 낙원과도 같은 곳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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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풍경은 물론 특정한 감각을 일깨웠지만, 나에게 더 진한 잔향은 건물 아래, 풍경 사이사이 빼곡하게 놓여있던 ‘움직이는 것들’에게서 남았다. 이를테면 동물과 식물, 사람이다. 앞선 건축물들의 형태는 이 나라의 고유한 모습이지만, 동물과 식물과 사람은 어느 나라에서나 비슷하게 목격할 수 있다. 그 공통의 다름에서 만들어지는 저마다의 차이를 바라보는 감각은 무엇보다 흥미롭다.

 

* 앞으로 말하는 것들은 해당 국가에 대해 전무한 여행자의 편협한 시선임을 감안하고 봐주시길.  


나에게 여행이 주는 가장 인상적인 경험은 차이에서 오는 낯섦을 발견하는 것이다. 당연한 분위기를 당연하지 않게 느끼는 것, 낯선 공간에서 낯선 이가 되는 경험은 두려운 동시에 해방적이다. 스페인 사람들에게서 느낀 큰 차이는 타인의 시선보다 나의 시선에 집중하는 태도였다. 다시 말해 자기 색채가 또렷한 사람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 남 눈치를 더럽게 많이 봐야하는 한국과는 다른 편안한 분위기가 있었다.

 

이곳에서 느낀 차이 중 가장 크게 다가온 것은 다양한 옷차림과 표정이었다. 대부분 차분하거나 무채색으로 가득한 한국의 대중교통과 거리와는 달리 이곳은 천차만별의 색깔로 물들어 있었다. 어떤 성별이든, 나이가 지긋하든, 휠체어를 탔든, 자기 조건은 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는 듯 사람들은 다양한 디자인과 색으로 고유의 멋을 부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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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단조로운 것이 마냥 나쁘다는 것도 화려한 것이 무조건 좋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타인 눈 바깥에 뛰는 것이 대부분 불리한 한국 사회에서 강요되는 밋밋함은 분명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선 자연스럽게 '개성'이 되는 모습이 한국에선 '별난 것'으로 여겨질 것이란 상상이 비약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비슷한 맥락에서 마스크의 유무도 눈에 띄었다. 이곳은 아무도 마스크를 쓰지 않아 모든 이의 표정을 관찰할 수 있었다. 대부분은 너그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곤란하다는 듯한 멋쩍은 웃음도, 단호한 어투로 말하는 처진 입도 보았다. 우리가 꽁꽁 감출 수밖에 없었던 얼굴의 남은 반쪽이었다. 얼굴의 풍경에 익숙해진 나는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가능한 공간에선 마스크를 항상 벗고 다녔다.


그러나 마스크 사용의 의무가 사라진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서일까, 여전히 한국에선 얼굴 전체를 목격하기 힘들다. 물론 각자의 판단과 선택으로 마스크를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못난 외모'를 가리고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의 편안함이 수없이 논의되었던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이 역시 스스로를 드러내는 데 어려움을 겪는 '한국인의 시선'이 작동하고 있지는 않은가 염려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어떤 목적이든 행위를 강요할 수 없으나 사람들의 꽉 찬 얼굴을, 특히 미소를 머금은 다양한 입을 바라보고 싶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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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과 식물이 인간 중심의 세계에서 공존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가로수를 비롯한 나무들은 모두 굉장히 크고, 가지는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저마다의 방향으로 뻗어있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나무의 정갈한 모양새보단 본래의 멋과 생명력을 먼저 존중하는 태도가 반영된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 

 

유명한 관광지인 알카사르 궁전의 거대한 정원에는 공작과 오리 떼가 퍼져있었다. 그들은 사람들이 머무는 벤치 옆에 몰려들어 있기도 하고, 유유히 산책을 즐기기도 했다. 인간과 동물이 위화감없이 공존하는 모습. 이 공간이 공작과 오리들에게 결국 동물원처럼 느껴질지는 모를 일이나, 적어도 좁은 우리에서 사람들에게 전시되는 것보단 덜 배타적이고 자유로워 보였다. 적어도 그런 태도가 확장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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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차례 말했지만 결국 남은 것은 무언가의 여유로운 미소와 저마다의 색깔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한 인상은 게이 커플로 추정되는 한 쌍의 연인이 손을 잡고 광장 거리를 산책하는 모습이었다. 그들의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게이로 추측하는 것은 편견일 수 있지만, 두 남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다정하게 손을 잡은 순간은 잊히지 않는다. 오히려 기억하고 싶은 장면이었다.


그때 또렷하게 알게 되었다. 내가 바라는 삶과 세상은 누구든지 자유롭고 편하게 원하는 대상의 '손'을 잡는 것이라고. (손이 아니어도 무엇이든 괜찮다) 나 역시도 그러하고 싶고, 그런 세상을 열망하고 만들고 싶다고.


이런 것들을 생각하는 데 물리적인 여행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보다 쉽고 명확하게 풍부한 감각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엔 동의한다. 이것들이 결국 누군가를 여행으로 이끄는 매력임을 이해했다. 이제는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해 여전히 두려우면서도 무언가를 기대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돌이켜보면 대부분의 변화는 낯선 것에서 시작되었으니.

 

어떤 낯섦이 나를 더 풍요롭게 만들어 줄까. 왠지 다음 여행은 그리 멀지 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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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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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이ㅣ
    • 사람마다 촣아하는 것이 다 다르다는 걸 느끼게 하는군요.
      유럽여행가서 화려한 건축물이 다 비슷하여 셋째날쯤 부터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기억이 나네요. 차라리 사람이 만든 건축물 미술품보다 자연이 만든 산과 경치가 좋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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