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키키, 이름과 달리 꽤 섬뜩했다 [미술/전시]

혐오 예술이 취향에 국한된다면
글 입력 2023.01.14 0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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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서울시립미술관을 다녀왔다.

 

나에게 시립 미술관 전시는 대극장 공연 관람과도 같다. 평소 작은 갤러리의 개인전을 자주 다니는 입장에서, 큰 규모의 전시는 큰 다짐과 체력 그리고 카페인 수혈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카페인은커녕 새벽에 눈을 떠 지하철 안에서 꾸벅꾸벅 졸아가며 도착한 바람에, 관람을 계획했던 4개의 전시 중 하나의 전시만 보고 나오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키키스미스 ㅡ 자유낙하.png

 

 

아쉽지만, 나머지 전시는 다음을 기약하며 하나의 우물만 파고 나오자는 생각으로 <키키 스미스 : 자유 낙하> 전시를 관람하였다.

 

 

 

애브젝트 아트의 대가, 키키 스미스


 

밴시 펄스.png

<밴시 펄스>, 1991

 

 

불쾌감에도 종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보편적이지 않은 것을 봄으로써 동(動)하는 불쾌, 무의식을 침투당했을 때 느끼는 불쾌, 구토를 유발하는 불쾌 등.

 

몇 불쾌는 그 안에 미학을 간직한다. 어딘가 뒤틀린 작품을 본 후 일종의 쾌감이 든 적이 있지 않은가? 분명 불쾌를 노리는 작품인 것 같은데, 그 안에서 유쾌를 발견하는 재미는 꽤 쏠쏠하다.

 

현대 미술이 좋은 이유다. 조금 뒤틀리고 이상해도, 용서받는다. 얼마나 관대한가?

 

 

밴시 펄스2.png

<밴시 펄스>, 1991

 

 

작품에 공백을 허락하지 않는 그의 머리카락이 인상적이다. 숯처럼 까맣고 지저분한 작가의 머리카락을 보며 그렇게 느꼈는데, 과연 작가에게 있어서 머리카락은 어떤 의미였을지 궁금하다.

 

 

머리카락.png

<머리카락>, 1990

 

 

<머리카락>을 보던 중 옆 관람객의 비꼬는 어투가 귀에 들어왔다. “왜 머리카락이 작품이지?”

 

우선 부정적인 감정 또한 작품에 대한 엄연한 소감으로 귀결됨을 인정한다. 일상에서 보던 머리카락이 너저분하게 뭉쳐있는 것 자체로 시각적 소름이 돋지 않는가? 또한 작품을 효과적으로 감상하기 위해선 작가의 경험을 훑어보는 게 도움이 된다.

 

프랑스인 마르셀 뒤샹(샘)에게 뉴욕의 변기가 새로운 경험으로 다가왔듯, 스미스 또한 그의 머리카락과 특정 경험을 공유한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머리카락이 왜 작품이 되었냐는 물음보단 작가에게 있어서 머리카락이 무엇을 함의했는지 가볍게 추측하기를 선행하는 게 어떨까?

 

 

탄생.png

<탄생>, 2002

 

 

스미스는 우리의 신체를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형태이자 각자의 경험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라고 말했다.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 창작자와 향유자의 공유된 경험은 꽤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신체 부위, 땀, 생리혈, 배설물 등을 소재로 보이는 애브젝트 아트(abject art)는 선험적 경험을 전제로 하기에 값진 경험을 선사할 수 있는 것이다.

 

건강함과 멀어 보이는 애브젝트 아트는 예술사에 있어서 건강한 방향을 띈다. 현실을 외면하고 보기 좋은 것만 보여주길 고집하는 것은 더 이상 좋은 예술이라 할 수 없다.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예술이 향유되는 현대 사회에서 예술은 끊임없이 고발해야 하고, 불편함의 감정이 보편적 감정이 되어야 한다.

 

 

자유 낙하.png

<자유 낙하>, 1994

 

 

예술은 무심코 스쳐 지나갈 수 있는 것에 질문을 던지는 것, 그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저 밑 세상에 대한 폭로, 비천한 것을 가시적 형태로 구현하는 행위, 인간사가 회피하던 것을 직면하게끔 도와주는 것. 신화와 동화가 전설로 남는 데는 이유가 있다.

 

세상을 미화하지 않고 솔직한 형태로 구현하여 끊임없는 사유를 돕는 것이 현대 미술이자 현대인들이 예술을 바라볼 때 갖춰야 할 태도이다. 예술가에게 기이하다는 표현보다 용감하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이유다.

 

세상 사는 것도 그러하지 않은가? 살면서 좋은 일만 쏙 쏙 골라내서 할 순 없는 것이다. 우린 불쾌한 것을 도처에 두고 살아가며 공생한다. 언제까지 이것들을 회피할 건가? 그 대단한 ‘불쾌’를 받아들이는 것이 사회 내 소수자와 공생할 방법을 도출할 기회를 마련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 나름’이다.

 

이미 일상생활이 혐오스러운 마당에, 굳이 힘을 들여 불쾌함과 맞닥뜨려야 할 의무는 없다. 작품에 대한 불쾌감이 선을 넘는다면 멈추는 것이 답이다. 무엇이든 내가 해석하기 나름이고, ‘호’를 느끼는 것도 나름이다.

 

 

 

배회하는 자아, 키키 스미스


 

그는 자신의 창작 활동을 ‘정원을 걸어 다니는 것’, ‘배회하는 자아’라고 비유했다.

 

객관적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예술에서 유목민과 같은 자아를 갖는 것은 당연하며, 오히려 좋은 작품이 나오는 동기가 되곤 한다. 좋은 예술 작품은 창작자의 질문으로 시작하여 관람객에게 그 질문의 바통을 던지는 것이다.

 

창작자의 기존 관념에 대한 질문은 아카데믹한 시각에서 바라본 미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고, 미술이란 무엇인지 재정의하도록 도와준다.

 

배회하는 예술가들에게 헌정하는 이 글이, 누군가를 미술관으로 이끈 동기가 되길 바란다.

 

 

[김윤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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