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Daily, Yearly [문화 전반]

글 입력 2023.01.09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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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은 진짜 마음에 드는데 디자인이 너무 별로다.

왜, 색상 때문에?


옆에서 대화가 들려왔다. 플래너를 사러 들어간 핫트랙스는 말 그대로 인산인해였다. 평소보다 유난히 사람이 더 많은 듯했다. 당연하겠지, 신년이니.


2023 플래너 매대에는 귀여운 토끼 스티커들이 늘어서 있었고, 스티커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다꾸’라는 취미와는 거리가 먼 나지만, 그네들이 고르는 스티커에는 괜히 눈길이 갔다. 슬쩍 사람들 사이에 껴서 스티커를 둘러보다 이내 눈길을 거두었다.

 

새해라고 유난을 떨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나는 아직도 나를 잘 모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크기변환]플래너_본문.jpg

 


온갖 기념일에 크게 관심이 없는 나는 연말과 연초에도 큰 감흥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해가 바뀌면 플래너 하나 장만하는 습관은 있다. 하루살이의 심정으로 살더라도 이따금씩 큰 그림을 위한 기록은 필요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기에. 어쩌면 하루살이처럼 살아서 온전한 하루를 세우고 남기기 위해 필요하다고도 볼 수 있겠다.


꾸준히 쓰는 것도 긴 내용의 일기를 쓰는 것도 아니지만, 플래너가 있으면 뒷심이라도 생긴 듯이 듬직하다. 어떤 일이든 해치울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생각만 하는 것과 쓰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말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닐 테지. 본래 글도 수기로 쓰던 성질이라, 종이의 물성에 꽤 집착하는 면모도 있고 의존도도 다소 높은 듯하다. 종이에 적어야 휘발되지 않고 굳건히 지켜낼 수 있을 것만 같은 미신 같은 믿음이 내게는 있다.


나름 속지와 구성을 따지며 매대를 두 바퀴 정도 돌았을 즈음, 양지사의 매대에는 유독 어르신들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클래식한 디자인 때문일까 멋대로 추측해 보던 찰나 한 할머님이 눈에 들어왔다.

 

할머님은 붉은 색상의 표지가 마음에 드셨는지 사람들을 밀치며 플래너 샘플을 덥석 잡아 꺼내보시더니, 표지 하단에 음각으로 새겨진 ‘2023’을 보시고는 당장에 내려놓으시곤 사라지셨다. 무엇이 마음에 들었다가 순식간에 마음이 사라진 것일까, 궁금했다. 내 취향의 것은 아니라 샘플도 꺼내보진 않았다.


백팩을 메신 할아버지는 양지사의 제품들을 둘러보시더니 속지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지 매대를 다 돌고 나서도 맨손이셨다. 어떤 구성을 찾으시는 걸까. 흘깃거리는 내 스스로가 오지랖이 넓다고 생각하면서도 궁금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할아버님은 표지가 보태니컬 작화 혹은 영문 필기체로 가득 채워진 디자인의 매대로 걸음을 옮기셨다.


문득 궁금했다. 우리 할머니는 찢어 쓰는 일력을 사용하셨고, 엄마는 절에서 새해마다 나눠주는 달력을 사용한다. 달력을 벽에 걸어둔 채 볼펜으로 대충 날짜에 동그라미를 치고, 이날이 어떤 날인지만 적어두는 엄마와 아빠의 모습이 익숙한 내게 플래너를 구매하시는 어르신들의 모습은 낯설었다. 무엇을 쓰실까. 당신들의 세계를 상상해 보다 이내 그만두었다. 타인의 세계는 타인이 알 수 없는 법이니까.


단은 만년형 다이어리를 사 자신의 생일이 속한 6월부터 채워나가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애의 연초는 한여름이었다. 달마다 날짜를 기입하는 것이 귀찮지 않냐는 내 질문에, 그냥 쓸 때마다 날짜를 적고 그날을 써 내려가면 된다고 답했다. 정말 하루와 하루를 사는구나, 생각했다.


그 애는 세계의 중심에 자신을 두었고, 그러한 삶을 보고 있자면 내 세계의 중심에도 그 애가 있는 듯했다. 다만 잘못된 축을 두고 헛도는 톱니바퀴 같았을 뿐이다. 옳고 안정적인 듯한 형태를 갖추었으나 무언가 어긋난 시간을 살아가던 단을 보면 가끔은 그 세계가 얼마나 지속될지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웬만해선 언제까지고 버틸 수 있는 삶의 형태가 아님을 본능적으로 알았고, 차라리 내가 타성 가득한 세계에 물들어버린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던 날들이었다.


섞이지 않는 세계와 맞물리지 않는 시계는 같이 있음에도 외로움만 자아냈고, 덕분에 타인의 세계는 지극히 타인의 것임을 배웠다. 그래서, 지난한 생각으로 보냈던 잠시간의 날들을 두고 더없이 현실적인 꿈을 꾸었다는 비틀린 비약을 완성해 그 시간을 응축했다. 비린 자존심을 지키려 나 홀로 찔리는 기억을 고이 품은 셈이었다. 마음에 드는 표지의 플래너에 날짜 칸이 비어있는 것을 확인하곤 내려놓았는데, 내려놓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불편했다.

 

 

[크기변환]플래너_대표.jpg

 

 

한참을 고민하다 정신을 차리니 사람이 많이 빠진 상태였다. 어르신들은 보이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셨을까. 유독 추웠던 최근에 비해 덜 추운 날이었지만 그래도 찾는 것이 없어 다른 곳까지 둘러봐야 하는 상황은 누구에게나 영 달갑지 않는 법이다. 당신들의 가방에 “2023”이 들어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속지와 표지의 색감을 유심히 따져가며 고민했고, 겨우 마음에 드는 아이를 찾아 밖으로 나섰다. 플래너 구입에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했음을 깨닫고, 내가 이리도 신년에 의미를 두는 사람이었나 기시감이 들었다. 무조건 날짜형을 사는 부류는 맞지만, 12월 29일과 1월 3일에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부류는 아니라고 믿었었는데.


타인과 교류했던 흔적은 내게 남는 법이라고, 하루살이 마냥 주어지는 오늘을 살아가는 습관이 언제부턴가 몸에 배었다. 오히려 좋았다. 막연한 걱정은 해로울 뿐이고, 눈앞의 당장만 즐기고 버텨도 힘들기 때문에. 잠에서 깬 뒤의 오늘, 그러니까 현재에 충실한 삶. 그런 삶을 살고자 여러모로 노력해왔고, 올해도 마찬가지일 게다. 매대를 거진 10번을 돌며 겨우 선택한 플래너가 괜히 더 든든했다.


하루와 하루를 잘 살자고 속으로 되뇌며 계단을 올랐다. 쓰고, 해내고, 기록하는 하루를 살자고. 그런 하루를 연장해서 하루를 더 살아보고 그러자고. 그런 굳건하면서도 조금은 외롭기도 한 결심을 반복하며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구두를 신은 발이 아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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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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