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죽음은 슬픔으로만 환원되지 않는다

이랑의 'PRIDE'와 죽음 그리고 사랑
글 입력 2022.12.24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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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텁게 입은 옷이 헛수고라는 듯 몸 사이사이를 침투하는 냉기가 만연한 계절이다. 혼자이면 괜스레 더 추워서일까, 매서운 바람을 뚫고서라도 많은 만남을 청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렇게 차가운 몸의 감촉과 따스한 마음의 감촉 사이의 경계를 반복하다 보면 문득 묘한 느낌이 찾아오곤 한다. 차분하게 내려앉은 공기의 분위기가 소란 속에서도 어떤 고요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마치 계절의 끝인 지금처럼 무언가의 끝을 계속 상기시키는 듯이.


끝, 또 다른 표현으로는 죽음을 떠올리면 이내 생각을 지워버린다. 죽음이란 왠지 들여다보기 싫고, 나의 일이 아니었으면 좋겠고, 막막하고, 그냥 슬프다. 함부로 떠벌리면 안 되는 영역인 것 같기도 하다. 이것이 내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였다. 아니, 사실 사회가 가르쳐 준 죽음을 대하는 ‘적절한’ 태도에 가까웠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을 단편적으로 이해하며 가까워하지 않는 나에게 새로운 시선을 알려준 아티스트의 공연이 있었다. 12월 10일(과 11일)에 열린 이랑의 ‘PRIDE’ 공연이다. 드레스코드가 ‘블랙핑크’라는 말에 친구와 나는 호들갑을 떨며 분홍색과 검은색을 가진 모든 것들을 뒤적거렸다.

 

블랙핑크로 무장한 채 기대를 잔득 품고 공연장에 도착했다. 관객과 세션 모두 드레스코드를 맞춰 입은 공연 중간에 이랑은 그 의미를 소개했다. ‘핑크는 화려한 것을 좋아하던 나의 언니, 블랙은 무채색 옷만 입던 나를 뜻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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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죽음을 멋대로 말하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12월 10일은 이랑의 언니 故 이슬 님의 1주기 기일이었다. 이랑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언니의 장례식 모습을 공유했었다. 검은색과 흰색만 존재해야 하는 줄 알았던 빈소엔 핑크를 중심으로 알록달록한 ‘공주풍’의 소품이 색을 더하고 있었다. 언니를 위한 자리인 만큼 언니에게 어울리는 공간을 만들어낸 것이다. 고인의 모습을 기억하고, 깊이 이해하고, 존중하는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아름다운 태도였다.


故 이슬 님과 같이 라틴 댄스팀 활동을 한 멤버들도 빈소 앞에서 춤을 추며 못다 한 무대를 ‘다 함께’ 완성했다. 이들의 춤은 ‘PRIDE’ 공연의 마지막 날 관객석에서 다시 불타올라 잊지 못할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삶과 죽음을 자로 잰 듯 구분하지 않는 태도, 슬픔뿐 아니라 다채로운 감정을 인정하고 표현하는 태도, 무엇보다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각자의 방식으로 기리는 태도는 내가 배웠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추모의 방식이었다. 그 순간 속에 함께하고 깨달았다. 이것이 죽음과 삶의 연결이구나. 이것이 죽음을 건강하게 존중하는 것이구나.


언젠가 그는 자신의 곡 <환란의 세대>를 ‘러브 송’이라고 표현했다. ‘동시에 다 죽어버리자’라는 가사가 자살이 아닌 사랑을 말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모두 힘든 것을 조금씩 꺼내놓으면서 함께, 계속 이야기하자고. 죽음뿐 아니라 삶의 불안과 우울도 쓸모있고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이토록 사랑을 다양하게 포용할 수 있는 이랑에게 장례식부터 PRIDE 공연으로 이어진 흐름은 어쩌면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랑 외에도 특히 생활 예술인, 예술 노동자들의 활동도 그런 다양한 사랑의 일종이라는 생각이 확고해진다. 그들의 말처럼, 삶과 죽음을 다루는 하나의 방식으로 예술을 택하는 것일뿐이다. 그 안엔 슬픔과 공감과 미안함과 분노와 희망 등이 담겨있다. 그런 표현을 가로막지 않고 존중하는 것이 정말 책임감 있는 자유가 아닐까. 적어도 죽음을 이용하고 욕되게 보이는 것보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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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은 죽음, 특히 극단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을 많이 접하게 되는 혼란의 시대이다. 죽음은 너무나 아득하기에 모두를 굳게 만들어 버리고 그 앞에서 굳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갈수록 많아지는 죽음을 더 많이, 더 다양하게 마주하고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의 삶과 기쁨은 그들의 죽음에 대한 배신이 아니다. 죽은 이를 기억하고 존중함으로써 삶과 연결 짓는 하나의 사랑이다. 죽음은 슬픔으로만 환원되지 않는다. 죽음은 하나의 방식으로만 다뤄지지 않는다. 다양한 사람이 자기 능력으로 자기 영역에서 삶 속의 죽음을 다룰 수 있다.

 

그렇게 죽음이 다채로워질 때 죽음도, 삶도 건강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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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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