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상상력을 먹고 커지는 불안을 마주하는 일 - 레이디스

그것은 어쩌면 생각보다 아무것도 아니다
글 입력 2022.12.20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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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스펜스의 대가 하이스마스의 이번 소설을 신청하게 만든 키워드는 ‘불안’과 ‘심리’였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감정이지만, 그리 긍정적인 것은 아니기에 마음 속 저편에 심어 두고 못 본척 하기 일쑤인 그 감정들을 ‘불안의 시인’이라 불리는 작가 하이스미스가 과연 어떻게 풀어 냈을지 궁금함과 동시에 나의 기억들 속에 자리잡고 있는 불안이라는 존재와 마주해 보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던 것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작가의 어두운 상상력 안에서 피어난 이야기들은 읽는 이로 하여금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실재로는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특히 키 작은 폴로 코트의 남자와 장애인 남자가 미지의 보물을 두고 서로를 쫓고 쫓기는 이야기에서는 당장이라도 두 사람 간의 몸싸움이 일어날 것만 같았지만 그들은 각자의 상상 속에서만 그럴 뿐, 실재로 어떠한 물리적인 다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책의 놀라운 점은 바로 그 ‘상상력’을 자극하여 공포를 준다는 점이다. 사실 불안이라는 감정의 씨앗이 움트는 시작점은 바로 그 상상력일지도 모른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혹은 일어나지 않을 일도 ‘상상’을 하게 되면 그러한 불운한 미래가 닥쳐올지 모른다고 믿게 되고, 그것이 곧 커다란 불안이 되어 우리를 삼킨다. 나의 경우에도 대개는 일어나지 않을 일에 지레 겁을 먹고 불안한 감정을 느끼곤 한다.


우리의 일상에 그렇듯 불안은 상상력을 통해 침투하여 누구나 조금씩은 그것을 가지고 살아간다. 적당한 깊이의 불안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마치 없는 존재처럼 인식하지 않으려 애쓴다. 그리하여 나는 책을 읽으며 애써 덮어두고 모른 척 하던 나의 불안들과 조금은 무심하게 마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방은 이상하게도 공용 공간처럼 느껴졌다. 가족의 소지품들은 대기실의 꾸러미들처럼 놓여 있다.

 

레이디스 P.125 <공 튀기기 세계 챔피언> 中

 


어린 엘스퍼스는 원래 살던 낯익은 동네에서 뉴욕이라는 대도시로 이사를 간 소감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과장을 보태 눈을 감고도 활보할 수 있을 만큼 모든 것을 꿰뚫고 있고, 그렇기에 어떤 공간에서도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고향과 달리 뉴욕이라는 공간은 모든 것이 낯설고 자신은 그곳에서 이방인 같은 존재일 것이다.


나 또한 1년전, 그간 평생을 살아왔던 동네를 뒤로 하고 멀지 않은 곳으로 이사를 왔지만 이 동네에서 아직도 이방인인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곤 한다. 당장 아파트 앞의 사거리만 나가보아도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어떤 병원이 진료를 잘 보는지, 어떤 산책길이 걷기 좋은지, 어떤 카페가 집중하기 좋은지 알 길이 없다. 그럴수록 속속들이 알고 있는 나의 예전 동네에 대한 향수병은 더욱 짙어 지는 것이다.


엘스퍼스가 그토록 낯선 공간에서 익숙한 존재인 부모님을 제외하고 처음 말을 걸어 보았던 상대인 공 튀기기 챔피언 소녀에게 인사를 무시당하고, 집으로 돌아와 마치 소녀와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던 것처럼 부모님에게 거짓말을 했을 때, 그녀 또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애써 외면 하려 했던 불안은 그 소녀의 무시를 통해 날 것 그대로 모습을 드러내 버렸고, 더 큰 문제들 앞에 놓인 엘스퍼스에게 그 정도 무게의 불안은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 사이 내내 그녀는 회색 정장의 남자를 그가 프랭키가 아니라는 이유로 노려보았다.

 

레이디스 P.119 <모빌 항구에 배가 들어오면> 中

 


어쩌면 폭력적인 남편 클라크를 독으로 헤치고 자신의 고향을 찾아 떠난 재럴딘도 엘스퍼스와 같은 불안감을 느낀 것일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은 그녀가 모종의 이유로 낯선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점차 사라졌다. 밥벌이를 하기 위해 떠났던 모빌 항구 앞의 스타 호텔에서 그녀는 처음의 희망과 다르게 끔찍한 일을 겪어야 했고, 그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잡은 클라크의 손은 마침내 그녀를 영원한 감옥으로 밀어 넣었다.


어쩌면 제럴딘은 고향에 가기만 하면, 고향과 연관된 어떠한 존재를 붙잡기라도 하면 행복했던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경찰이 자신을 찾아와 고향 친구 행세를 하며 접근 한 후, 그녀를 붙잡았을 때에도 그 어떤 이유보다 그가 자신의 고향 친구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가장 절망했을 것이다. 클라크를 독살하려는 계획을 세우던 때부터 애써 모른 척 덮어두던 불안, 어쩌면 이제 와서는 다 의미 없는 행동일지 모른다는 그 불안을 마주해야 했을 테니까 말이다.


 

갑자기 아주 희미하지만 확실하게, 홀퍼트 부인의 뒤쪽 창으로 밀려들었던 그 아침의 햇살처럼, 그 모든 일들이 가능할 것만 같아서 진실의 여역으로 들어온 듯했다.

 

레이디스 P.218 <루이자를 위한 초인종> 中

 


그런가 하면 하이스마스의 몇몇 작품 들 중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편견을 깨고 희망을 주기도 한다. 처음 루이자가 그간 정들은 꼬마 제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홀퍼트 부인의 집 초인종을 누르고, 그들을 간호하느라 회사를 가지 않았을 때만 해도 나는 루이자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픈 이웃을 돌보기 위해 자신의 업무까지 내팽개친다니, 문화의 차이로 인해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까지 들었다.


그러나 자신의 돌봄으로 제니, 엘리너, 홀퍼트 부인이 점점 차도를 보이자 루이자는 그동안 나름 완벽하다고 여겨왔던 자신의 일상을 살 때보다 더욱 활기 있고 즐거운 모습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단순한 오지랖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덮어두었던 불안과 마주한 것이라는 사실을 그제서야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동생들과 연을 끊어가며 지킨 그녀의 완벽한 일상은 어쩌면 그녀에게 독이 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침 햇살이 비쳐 들어올 때 그녀가 느꼈던 희망은 마주한 불안이 생각보다 작고, 가능한 영역에 존재함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우리의 불안은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머릿속에서 상상력을 파고 들며 몸집을 키우는 바람에 손쓸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로 느껴지지만 막상 마주하였을 때 그 보잘 것 없음을 알고 나면 조금쯤 더 행복한 미래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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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다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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