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산을 쓰지 않던 날 [문화 전반]

글 입력 2022.12.19 12:17
댓글 1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유난히 느지막하게 잠에서 깬 날이었다.

 

창밖으로 눈이 소복이 덮힌 지붕들과 화분들, 서서히 까맣게 물들기 시작하는 도롯가의 눈이 눈에 들어왔다. <설국>이 떠올랐다. 올해 겨울 들어 간간이 눈이 내렸다만 단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나였다. 커피를 사러 나갔다가 걸은 도보에는 발자국이 적었다. 미끄러지지 않으려 잔뜩 긴장한 채 걸었다. 첫 함박눈이었다.


머리 위로 눈이 쏟아졌다. 우산을 쓴 사람들이 꽤나 많았지만, 보슬비도 기꺼이 맞는 편인 나는  빈손이었다. 눈 정도야 너무 녹아 젖어들기 전에 털어버리면 그만 아닐까. 비를 맞는 법을 배운 지는 꽤 되었다. 조금은 외롭기도 했던 이국에서 배운 것이었다. 웬만한 비에는 서두르지 않을 것. 가벼운 비 정도야 맞아도 괜찮으니 급하게 굴며 너무 인상 찌푸리지 말 것. 가랑비에 너무 마음 쓰지 않을 것.


9월부터 2월까지의 독일은 덥지도, 엄청 춥지도 않았다. 애초에 가져간 옷들은 반팔 혹은 가벼운 티셔츠, 니트가 대부분이었고, 그외 필요한 것들은 쓸 일이 생기면 구입할 요량이었다. 패딩은 사지 않았고, 독일에 도착한 지 네 달이 지났을 즈음에서야 접이식 우산을 샀다.

 

 

[크기변환]비_구구.jpg

 


손잡이가 새의 얼굴 모양으로 단순하게 조각된 우산이었다. ‘구구’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비가 오는 날마다 챙겨 다녔지만, 실상 독일에서 구구를 쓴 날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행인들의 대부분이 무겁게 쏟아지는 비가 아니면 우산을 잘 쓰지 않는 탓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머리가 빠지는 것은 아닐까 다소 유치한 걱정을 하며 그들처럼 비를 맞고 다녔다. 괜히 다른 문화에 더 익숙한 티를 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으며, 왠지 그네들의 표정이 편해 보이기도 해 까짓것 따라 해보자는 심산이었다. 조금이라도 비가 오면 후다닥 우산을 꺼내 펴드는 유난이 괜히 객쩍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생각보다 쉬웠다. 부딪쳐오는 것은 본능적으로 피하게 되는 줄로만 알았는데, 애써 그 기질에 저항하고 보니 오히려 편했다. 머리가 망가져도 상관없었다. 다른 이들의 머리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가던 길만 가면 되었고, 비를 막기 위해 손이 바쁠 일도 없었다. 달려오는 것에 태연히 반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꽤나 재미가 있었다. 내게 대뜸 던져지고 떨어지는 것들을 무방비하게 받아들인 적이 얼마나 될까. 비가 온다고 굳이 멈추지 않고 계속 걷는 것은 어려운 듯 쉬웠다.

 

우수수 비가 쏟아지는 날은 잦지 않아서, 구구는 보통 기숙사 내 방 어딘가에 박혀있었다. 책상 위였던가. 사놓고 자주 쓰지 못하는 것이 조금 아쉬웠지만, 귀국 후에는 자주 쓸 것만 같은 이유 모를 확신에 아쉬움과 함께 구석으로 밀어두었다. 가벼운 비에는 우산을 쓰지 않는 게 보통인 이곳이지만 내 사회인 저곳 동쪽은 또 다르니까.

 

 

[크기변환]비_교회.jpg

 

 

그해 12월엔 여행을 많이 다녔고, 그중의 절반은 가벼운 비가 내렸다. 당시엔 핸드폰 요금을 선불로 결제했었는데, 구입했던 한 달 치의 데이터를 다 써버린 바람에 여행 내내 종이 지도와 구글맵 스크린샷에 의지해 돌아다녀야 했다. 비라도 오면 지도부터 사수해야 할 지경이었으나 기상청의 예측과는 다르게 하늘이 맑았다. 안심하며 마켓 트럭에서 Glühwein(글뤼바인, 레드와인에 오렌지, 레몬, 계피, 꿀 등을 넣어 따뜻하게 데워마시는 알코올음료) 한 잔을 사곤 엘베 강가 벤치에 앉았다.


아무에게도 메시지가 오지 않는 시간이었고, 그래서 어떤 대화도 이루어지지 않은 시간이었다. 여기저기서 캐롤이 들리고 종소리가 울렸지만 나는 혼자였다. 강 너머에는 움직이지 않는 크레인이 있었고, 많은 연인들이 곁을 지나갔으며 나는 와인을 홀짝였다. 비어버린 잔을 보며 남은 시간을 헤아려보려던 찰나, 빈 와인잔 안에 조그마한 물방울들이 맺히는 것이 아닌가.

 

다시 보니 벤치에도 작은 동그라미가 서서히 늘어나고 있었다. 느끼지 못할 정도로 얕게 내리는 여우비였다. 우산을 쓴 사람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하늘은 여전히 밝았다. 구구는 가방 안에 있었지만, 그냥 그렇게 한참을 더 앉아있었다. 지도가 함빡 젖을 수준도 아니었거니와 밝은 길눈을 믿고 부린 배짱이었다.

 

 

[크기변환]비_대표.jpg

 

 

라이프치히에 도착한 뒤에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목에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넓게 펴 머리에 둘렀다. 정류장에서 만난 친구는 내 뒷모습이 펭귄 같다고 말했다. 우산을 썼더라면 보지 못했을 것들이 많았다. 건물들의 가파른 지붕들과 비에 젖어 한층 더 짙어진 나무들의 색, 묘하게 영화 <해리 포터>의 분위기와 닮아있던 거리. 낯이 불콰한 행인들의 대화가 이따금씩 스쳐 지나갔고, 그렇게 젖으면서 걸었다.

 

 

[크기변환]비_버스.jpg

 

 

강가에 앉아 시간을 보냈던 12월 중순부터 우중충했던 하늘은 크리스마스까지 내내 울먹였다. 또다른 여정을 위해 구구와 버스에 오르자마자 비가 내렸고, 여행 내내 발소리는 축축했다. 지하철역 앞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거대한 성당은 우산에 가려져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사진이라도 담고 싶었지만 우산을 들고 사진을 찍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눈에만 담았다. 성당은 외관 공사 중이었는데, 이제 그 성당을 검색하면 내가 기억하는 성당과 조금 다른 성당의 사진이 뜬다. 다른 성당을 기억하는 기분이다.


역시 한국으로 돌아온 뒤 구구를 데리고 나가는 날은 부쩍 늘었다. 다만 낮은 강수확률에는 빈손으로 나가는 습관은 여전하다. 비에 젖으면 찝찝하지 않냐는 질문에, 생각보다 가볍다고 답했다. 금방 마르고 흠뻑 젖지 않는다고.


가방이 무겁지 않은 날에만 부릴 수 있는 여유지만, 어찌 되었건 나는 비를 맞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게 좋다. 어떤 일이 닥쳐도 태연히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무슨 일이든 마주할 수 있는 그런 강한 사람, 유약한 듯 우직한 사람. 이국에서 새로 들인 습관으로 익힌 감각이다.

 

[곤란한 일은 닥치는 것이지 전개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어날만한 불행은 없고 이것저것 가려가며 나타나는 재난도 없습니다.] (314쪽, 이승우,<이국에서>中)

 

짧은 시간이었으나 대뜸 찾아오는 곤란한 사건들이 참 많았고, 그만큼 되려 느긋하고 단단한 사람이 되어야 했던 시기였다. 그런 시간 속에서 비를 맞는 법을 배워서 그런 것일까. 한층 더 너른 사람이 되는 데에 한몫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어쩌면 그 덕분에 더 강해진 것일 수도 있다고.


갑작스레 비가 내려도 가던 길을 마저 갈 줄 아는 것처럼, 경황이 없어도 여유롭게 굴 줄 아는 법. 빈손이라 비를 막을 것이 없더라도 걷던 방향을 바꾸지 않는 것처럼, 지나간 것에 매달리지 않고 공백을 즐기는 법. 새로운 습관이 내게 가르쳐 준 것들.

 

 

 

아트인사이트 태그.jpg

 

 

[이주연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댓글1
  •  
  • 박영서
    • 담담하며 굵직한 문장들에 또 한 번 배웁니다.
      고맙습니다:)
    • 1 0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7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