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영 돌아올 수 없을 거라 여겼던 존재가 돌아온다 - 연극 ‘사월의 사원’

각자의 사원(집)으로 돌아오기 위한 여정
글 입력 2022.12.12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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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 사월의 사원_전화벨이 울린다.jpg

 

“자신을 소개해 보세요”라는 질문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마주하게 된다. 나 역시도 숱하게 받았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매번 나름의 방식대로 내보곤 했지만, 그때마다 누군가와의 ‘관계’에 의거하지 않고서 나 자신을 정의 내리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던 것 같다. 저는 누구가의 딸입니다, 친구입니다. 혹은 저는 어느 곳에서 근무하고 있는, 재학하고 있는 누구입니다. 모두 타인, 혹은 사회와의 관계 속의 나였다.


관계 속의 나를 온전히 배제한 ‘나’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이제 곧 취업 준비의 길목 앞에 선 나는 1번 질문으로 통용되는 ‘자기소개’라는 항목에서 뜬금없게도 그런 의문에 휩싸이곤 했었다. 연극 ‘사월의 사원’은 누구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상처받고 버려진 이들이 어찌하여 또다른 관계를 이루지 않고는 살아가지 못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며 오랜 기간 이어온 나의 질문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게 만든다.

 

 

 

극의 내용: 집으로 돌아온 파편 조각들 


 

[크기변환]공연 후.jpg

 

 

연극 속에서 모든 관계의 구심점이 되는 한 사람, 영혜는 어느 날 자신을 버렸던 어머니에게서 조금은 괴랄한 부탁을 받게 된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을 요양원에서 보살펴 준다면 혼자 살기에 부족함이 전혀 없는, 오히려 너무 넉넉할 정도의 집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다시는 얼굴을 마주하는 일 없을 것이라 다짐했을 어머니의 부탁을 영혜는 받아들였고, 그렇게 얻은 큰 집은 너무나 휑했다.


영혜의 집은 그 후로 관계 속에서 상처받은 이들의 집합소가 된다. 폭력을 일삼는 가정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공장에서 근무하다 흘러 들어온 지수, 실존하지 않는 남자 친구의 목소리에서 벗어날 수 없고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 당하곤 하는 BL 작가 해영, 매일 나가는 직장에서 누구에게도 신뢰받지 못하는 현주, 아버지와 그의 애인이 거주하는 집에서 한 시도 편안할 수 없는 기정까지, 그들은 ‘사람 간의 관계’에 이골이 났다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또 너무나 다른 사정을 안고 이 집에 모여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관계로부터 상처받은 이들은 각자 또다른 방식으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현주는 어쩌면 같이 살게 된 이들과 더 이상 오해를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에 상대의 입장을 생각해 보기 보다 앞서 질문을 퍼부었고, 그것이 해영에게는 달갑지 않은 오지랖으로 다가왔으며 자신이 그어 놓은 경계선을 서슴없이 넘어서려는 현주의 앞에서 해영은 결국 방문을 닫아 버리게 된다.


한편 지수는 어린 시절 자신을 괴롭혔던 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일삼는 기정이 눈에 밟힌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어린 시절의 자신처럼 편안하게 지친 몸을 뉘일 수 있는 ‘우리 집’이 없는 기정에게 마음이 쓰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기정은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자신의 폭력성향을 지적하고 단속하려 드는 지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게 영혜가 주워 온 각자의 곡률을 가진 파편과 같은 이들은, 너무 다른 나머지 한 집에서 부대끼며 살 수 없었다. 결국 파국적인 갈등 이후 잠시든, 영원히든 해영을 필두로 하여 기정, 지수마저 집을 떠나 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서로 완벽히 들어 맞지 않더라도 가끔은 싸우고 다투면서 서로를 알아가고 한 집에 모여 살기 바랬던 영혜의 바람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고, 사람의 온기가 빠져나간 영혜의 큰 집은 다시금 냉기로 가득 차게 된다.


그렇다면 결국 인간은 혼자일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일까? ‘다 필요 없어, 혼자서도 괜찮네’ 씩씩한 듯 혼잣말을 내뱉는 영혜의 얼굴에는 극 중 한번도 볼 수 없었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어쩌면 해영과 지수가 늘 말하던 ‘말없는 영혜’의 모습이 과연 이 모습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며 섬뜩한 느낌마저 든다. 서로를 불편해하는 티가 완연히 나는 이들을 모아두고 같이 저녁을 먹으려 애쓰던 따듯한 영혜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르다.


극 중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현주의 권유로 그렇게 혼자 남겨진 영혜를 찾아 잠시 집에 ‘돌아온’ 해영이 영혜가 쏟아내는 서러움을 온전히 끌어안아 주던 장면이었다. 영혜는 세상 모든 버려진 것들을 눈 뜨고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유기견에 대해 수강생들이 툭 던진 말도 부러 넘길 수 없을 만큼 말이다. 그 기저에는 버려지고 싶지 않다는 영혜의 약하고 간절한 바램이 있다. 어쩌면 그것이 영혜가 자신을 버린 어머니의 괴랄한 부탁을 선뜻 받아들인 이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혜가 자신을 두고 떠나는 집안 사람들에게 늘 하던 말이 있다. ‘돌아올 거야? 돌아오는 거지?’ 그 말은 활자 그대로 집 안에 다시 들어오는 것 이외에 더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돌아옴’에 관한 의미는 극중 등장하는 또다른 배경, 지수의 공장 시절 동기이자 친구인 메싸의 고향 캄보디아의 이야기로 연결된다.


 

‘한편, 바다 건너 캄보디아 땅의 한 사원에서는 희망을 담은 누군가의 기도가 울려 펴진다. 영영 돌아올 수 없을 거라 여겼던 존재가 물속에서 뭍으로 돌아온다.’

 

연극 <사월의 사원> 시놉시스 中

 


시놉시스의 마지막 구절처럼, 어쩌면 극 중 누구보다 ‘돌아갈 곳’이 없던 메싸의 아들 수린이 차가운 호수에서 뭍으로 돌아왔다. 메싸는 남편이 무차별적으로 휘두르는 폭력 속에서 수린을 지키지 못했고, 이웃들은 메싸의 사정을 알면서도 묵인하고, 메싸가 결국은 연고 없는 타지로 떠나가게 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방관했다. 메싸의 어린 아들 수린에게는 그 어떤 곳도 ‘집’이 될 수 없었다.


그런 수린이 결국은 뭍으로 돌아왔고, 그의 유골이 안치된 사원은 어쩌면 수린에게 비로서 ‘집’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메싸는 늦었지만 집으로 돌아온 수린을 보러 왔고, 여기서 우리는 서로를 져버린 관계에 대한 희망의 빛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캄보디아 여행을 마친 지수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서라도 영혜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며 잠깐 돌아왔다던 해영의 왕래도 잦아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이번 공연을 통해 느꼈던 점이 있다면, 관계의 끈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면 서로를 미워하고 틀어지고, 때로는 관계를 회피할지라도 언젠가는 다시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었다. 또한, 결국 인생은 혼자 사는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우리는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정의되고 이름 지어지며 또 그 관계를 통해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또한 느낄 수 있었다.

 

 

 

극의 구성: 신박한 무대 구성을 통해 몰입을 이끌어내다


 

[크기변환]무대구성_전.jpg

 

 

연극 <사월의 사원>은 올해 본 연극 중 가장 참신한 구조와 연출을 지닌 공연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선, 좌석 배치를 전혀 모르고 갔던 나는 표에 적힌 ‘비지정석’이라는 표시에 한번, 좌석 배치도를 통해 본 무대 구성에 두 번 놀랄 수밖에 없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객석은 그대로 유지되어 있는 반면 무대 위에 의자를 놓고 관객은 무대석에 앉아 공연을 본다는 구성을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는 빈 객석을 그대로 두는 것이 공간 낭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은 나의 오산이었다. 그곳은 객석이 아니라 무대였다. 객석에 앉아서, 혹은 객석 통로 사이를 지나다니며 배우들이 연기를 하고, 공연이 종료된 후에는 메싸와 지수가 수린에게 주기 위해 가져온 물건들을 계단에 하나하나 배치한 것을 살피며 올라갈 수 있었는데, 마치 퇴장하는 것이 아닌 수린이 기다리고 있는 사원으로 향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더불어, 배우들의 연기를 바로 코 앞에서 경계 없이 마주할 수 있다는 점도 인상 깊었다. 특히 나는 맨 앞줄 중앙 쪽에 앉아 있었는데, 메싸가 첫 장면에서 캐리어를 끌고 퇴장하는 장면, 현주와 해영이 말다툼을 하는 장면에서는 배우들이 너무나 가까이 있어 마치 내가 그들의 공간 안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특히 수린이 사원에 안치될 수 있도록 도움이 주기도 하였고, 한 때는 메싸의 어려운 처지를 모른 척 하던 노인의 나레이션과 스크린의 자막만 나오는 장면에서는 어쩐지 내가 메싸를 방관하던 이웃이 된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것도 같다. 어쩌면 나 또한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방관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다시금 해보기도 했는데, 그러한 성찰이 어쩌면 누군가와의 위태롭던 관계에 정진하거나, 끊어졌다 믿었던 관계를 회복할 단초가 되어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컬처리스트 명함 (1).jpg

 

 

[박다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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