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한배에 타는 방법 [드라마]

넷플릭스 미스터리 드라마 <1899>
글 입력 2022.12.09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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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소위 말해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 같이 일하며, 또다시 소위 말해 ‘한배에 타는’ 경험을 해본 적 있을 것이다. 답답하고, 난감하고, 상황의 경중에 따라서는 절망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경험이다. 비유적인 상황으로도 이럴진대, 사용하는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선박에 오른, 소위 말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한배에 타게 된다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

 

 

 

대서양 한가운데서 마주친 수수께끼, <1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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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는 1899년, 유럽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여객선 ‘케르베로스’ 호를 배경으로 하는 미스터리 드라마다. 케르베로스 호는 항해 도중 알 수 없는 신호를 받고 4달 전 실종되었던 ‘프로메테우스’ 호를 발견한다. 그 배 안에는 난장판이 된 내부와 입을 열지 않는 수상쩍은 소년 하나만이 남아있고, 케르베로스 호에서도 비현실적이고 섬뜩한 현상들이 연달아 일어나기 시작한다.


여러 나라의 이민자들을 싣고 가는 대형 선박 케르베로스 호에서는 다양한 언어가 산발적으로 들려온다. 주인공은 영어를, 배의 선장과 선원들은 독일어를 쓰며, 그 외에 덴마크어를 쓰는 삼등실 가족, 프랑스어를 쓰는 부부와 한 밀항자, 그리고 폴란드어를 쓰는 일꾼이 등장한다. 또한 형제를 연기하는 두 남자는 스페인어로 대화하고, 게이샤와 그 하녀로 가장한 모녀는 광둥어를 사용한다.


통역이 가능한 사람이 몇 있는 덕에 아예 소통이 불가한 것은 아니지만, 점점 파국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모국어가 다른 사람들과 힘을 합치기는 정말 쉽지 않다. 일분일초가 아쉬운 급박한 순간에 저 사람이 무슨 말을 한 거냐 묻느라 시간이 흘러가기도 하고, 서로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몰라 곧바로 돕지 못하는 어려움도 생긴다. 하지만 이 아수라장 속에서, 말은 통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통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눈짓과 몸짓으로 통하는 마음



덴마크에서 온 ‘크레스터’와 스페인에서 온 ‘앙헬’. 둘은 사용하는 언어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계급도 다르다. 부유한 앙헬은 일등실에서 편히 지내는 반면, 삼등실 승객인 크레스터는 철창으로 막힌 탓에 쉽사리 갑판으로 나오지도 못한다. 그러나 두 남자, 크레스터와 앙헬은 그 철창을 사이에 둔 첫 만남에서부터 서로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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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의 동성애자들에게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말로 털어놓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사람들은 거짓을 말하는 데, 말로 진실을 숨기는 데 익숙하다. 그러나 몸으로 드러나는 진실까지 숨기는 건 훨씬 어려운 문제다. 누군가는 알아봐 주길 바라는 마음까지도 묻어야 하기 때문이다.


앙헬을 연기한 미겔 베르나르도는 두 사람이 “말이 아니라 눈으로, 몸짓으로 소통”한다고 말했다. 눈짓과 몸짓을 통해 둘은 서로의 비밀이자 자신의 비밀,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래서 크레스터와 앙헬은 서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상대가 저와 비슷한 상처를 품었음을 알아채고 서로를 위로한다.

 

 

 

자신의 언어로 통하는 마음



홍콩 소녀 ‘링이’와 폴란드 청년 ‘올레크’ 사이에서도 감정이 싹튼다. 과거의 일로 힘들어하는 링이의 곁을 올레크가 지켜주면서 둘은 사랑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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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소동이 일어나는 배 위에서 꼭 붙어 다니는 둘을 보면, 실은 둘만의 언어가 따로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의심이 든다. 그 정도로 소통을 곧잘 하는 그들의 모습은 사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언어보다도 서로에게 집중하는 마음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링이가 폴란드어를, 아니면 올레크가 광둥어를 할 수 있었다면 감정적 교류가 지금만큼 일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나라의 언어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외국어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힘든 이유에는 유창성의 문제도 있지만, 그보다는 말 그대로 외국어라는 문제가 더 크다. 남의 나라말로는 내 감정을 온전히 쏟아내기 어렵다. 언어에는 내가 나고 자란 나라에서 나와 함께 성장한 정서가 고스란히 담겨 있으니, 외국어로 하는 감정 표현은 제한받을 수밖에 없다. 링이는 광둥어로, 올레크는 폴란드어로 마음껏 하고 싶은 말을 했기에 진심이 온전한 형태로 전달된다.

 

 

 

말이 통하지 않아서 주고받는 위로



심지어는 말이 통하지 않은 덕에 서로에게 위로가 된 관계도 있다. 젊은 프랑스 귀부인 ‘클레망스’와 덴마크에서 온 어린 임산부 ‘토베’가 그렇다. 클레망스의 눈에는 배 속의 아이로 몸이 무거운 상황에서도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토베가 대단해 보인다. 자신과 달리 강한 여성처럼 보이는 토베를 보며 클레망스는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벗어 던지고 바지를 입음으로써 자신의 변화를 선언한다. 


토베를 통해 클레망스가 긍정적인 힘을 얻은 건 달가운 일이다. 그러나 클레망스가 토베의 상황을 제대로 알았더라면 그러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은 나의 쓸데없는 우려일까. 토베가 임신하게 된 경위는 드라마의 시대 배경을 염두에 두어도 폭력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잔인했다. 만약 그 자세한 상황을 클레망스가 알았다면 그는 토베에게서 힘을 얻는 게 아니라, 토베를 동정하고 자기 자신은 더욱 무력해졌을 것 같다. 이런 암울한 가정이 나만의 착각이라면 정말 좋겠지만, 이 장면을 볼 때는 둘의 언어가 통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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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일방적인 대화를 이어나가는 클레망스를 이상하게 보던 토베는 클레망스가 바지로 갈아입는 걸 보고는 묘한 표정을 짓는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환경, 다른 처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겪은 어려움이 있었을 테다. 그 어려움을 나름대로 짊어지고, 또는 이겨내고 살아가는 모습은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토베의 의도와 상관없이 토베가 클레망스에게 가져다준 변화는, 다시 토베에게로 돌아와 그를 변하게 했고, 둘의 새로운 모습은 앞으로의 시즌에서도 천천히 드러날 것이다.

 

 

 

마음이 통하게 하는 제작 과정



<1899>의 제작자 얀톄 프리제와 바란 보 오다어는 <1899> 제작에 앞서 독일 드라마 <다크>로도 눈에 띄는 성과를 내보이며 능력을 증명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모인 제작 환경은 틀림없이 어려운 도전이었을 테다. 어쩌면 시청자의 편의를 위한다는 핑계를 대고 한 가지 언어로 통일하는 선택을 고려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과거의 많은 영상 매체가 그러한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1899>는 다른 길을 걸었다. 


올레크를 연기한 마치에이 무시아우는 링이와 올레크의 만남이 “서로의 말을 못 알아듣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한다. 언어에는 각 나라가 갖는 문화의 씨앗, 그리고 감정의 씨앗이 담겨 있어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어를 귀 기울여 들을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언어를 가지고 한배에 탄 것은 비단 드라마 속에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 또한 여러 언어로 하나의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큰 힘을 보탰다. 각국의 배우들은 자신의 언어로 오디션을 봤고, 촬영장에도 언어별 조수들이 대사의 번역을 도왔다. 짧은 대사 하나를 말할 때도 단순히 문장의 의미가 같은 것에서 그치지 않고, 반언어적이거나 비언어적 수단의 숨은 뜻까지 통일하기 위해 어조와 행동을 꼼꼼히 확인한다. 


이런 갖은 노력은 시청자인 내게도 전해진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었던 언어는 영어 하나뿐이지만,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다른 언어들은 지금 케르베로스 호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고 이들은 서로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는 어지러운 상황임을 실감 나게 알려준다. 또한, 각자 아픈 과거와 비밀을 안고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에 자신의 언어로 표출하는 감정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지금까지 공개된 <1899>는 8부작으로 된 시즌 하나뿐이지만, 이미 다음 시즌이 예정되어 세계 각국의 팬들을 설레게 하고 있다.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알 수 없으나 그 이야기 또한 여러 언어로 여러 사람의 입장에서 전개될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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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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