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지구에서 피어난 우주적 사랑에 대하여 [도서/문학]

글 입력 2022.11.30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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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무리 '폭력과 혐오가 난무하는 현대 사회'라는 오명이 덧씌워진다 한들 나는 여전히 인간이 이룩한 모든 결속과 성취와 번영이 우리 안에 내재된 사랑에 기인한 것이라고 믿는다. '사랑 없이는 미움도 없다'는 어느 낭만주의자의 이야기에 쉽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밑도 끝도 없는 낙관이 통하는 소설이 바로 <지구에서 한아뿐>이라고 소개하고 싶다. 정세랑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도 드러나듯 이 기묘한 외계인과의 로맨스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저버리지 않는 기대와 애정을 속속들이 느낄 수 있다.


누구나 사랑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원하는 만큼의 사랑을 받게 되면 그 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 단 한 번도 떠올려본 적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차라리 내가 꿈 꿀 수 있는 최대의 사랑을 타인에게 건네는 것에 더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마저도 쉽게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없는, 4K UHD 화면 속 인물이었다. 그래서 나는 늘 이 주제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으면서도 정작 할 수 있는 말은 몇 되지 않았다. 아이돌 '빠순이'의 흔한 피해망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가수 아폴로의 팬인 주영의 생각은 달랐다. 달랐다기 보다는 훨씬 더 고차원적이었다. 당신의 세계에 내가 기꺼이 빠져들겠다는 주영의 각오는 단순히 치기 어린 애정을 던지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꼭 누군가의 세계에 무력하게 휩쓸린 채 기생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치부를 꼬집으며 자신이 속할 세계를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타의 사람들이 핀잔 주던 철없는 시간 낭비라기보다는 삶의 의지를 동반한 목표에 가까운 것이다.


주영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경우를 떠올려보았다. 그 사람의 내일이 궁금하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지긋지긋한 아침을 끝끝내 맞이했다. 오후 내내 노래를 듣고, 영상을 보며 마음을 달랬고, 숨이 턱턱 막히는 밤이면 자책하는 일기보단 애정을 쏟아내는 편지를 썼다. 우주 밖에 혼자 남겨진 것처럼 모든 게 아득하고 새카맣게 흐려지는 순간에 부르고 싶은 이름이 떠오른다는 게 얼마나 큰 위안인지를 깨닫는 경험은 아마 다시없을 것이라고 지금도 여전히 생각한다.


이런 나의 마음은 얼마나 보편적이고 또 얼마나 특별한가. 경민이 한아에게 그의 정체를 밝히며 '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들이 있'다고 말했던 것처럼 그 지난하고도 흔해 빠진 사랑 이야기가 어떤 이유로든 외면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런 사랑이 모여 단단한 세상의 축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의 사연도 마찬가지다. 저마다의 이유, 저마다의 모양새를 가진 각각의 애정이 특정 대상을 향해 무한정 쏟아져 나온다. 그 때문에 때로는 방향을 잃기도 하고, 당황스러울 만큼 예상치 못한 순간을 마주보게 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이 영 못 믿을 것은 아니라고 작가는 말하는 듯하다.

 

저 먼 우주에서 한아를 보고 첫 눈에 반해 무려 2만 광년 떨어진 지구로 날아온 로맨티시스트 외계인 경민의 맹목적이고 원초적인 애정을 목격하며 '태초부터 그렇게 낭만적인 존재로 태어난 것 아니야?' 하는 비소에 스며들다가도 주영의 망설임이 5퍼센트도 채 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이 작고 작은 행성, 지구에서 키워낼 수 있는 우주적 스케일의 사랑이란 얼마나 경이로운지에 대해 감탄이 난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나는 나와 우리 모두의 고유하지만 유일하지 않은 따뜻한 애정에 대해 돌아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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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진짜 경민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어쩌면 이 소설 속에서 가장 현실적일지 모를 인물인 진짜 경민, X. 사랑보다 더한 가치가 있다고 얼마든지 믿고, 따를 수 있다. 당연한 일이다. 저마다의 삶의 지표에 맞춰 짧은 생을 가능한 최대의 효율로 살아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생각하면 외계인의 기막힌 제안 앞에서 결단력 있었던 X의 선택 역시 무엇 못지않게 대단해 보인다.


그러나 그는 결국 돌아왔다. 나는 X가 뒤늦게 한아에 대한 사랑과 존재로부터 얻는 안식에 대해 깨닫고 온몸이 부서지고 망가지도록 우주를 건너왔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달갑지 않게 느껴졌다. 이미 사랑을 저버린 자에 대한 일종의 반발 심리라도 작용했던 모양이다. 나처럼 X를 받아들이지 못하던 한아는 결국 그를 용서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인간의 유약함과 그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존재 가치에 대해 떠올릴 수 있었는데 그와 동시에 타인에게 모질었던 내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용서할 수 없었던 마음들은 지금 이 우주의 어디쯤을 부유하고 있을까? 환경을 사랑하는 한아를 보며 외계인 경민은 '같은 자리에 있는 걸 지키고 싶어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시간과 공을 들여 푹 고아낸 마음이 결코 의미 없지 않다는 것을 한아는 삶의 끝까지 진실되고 일관된 태도로 보여준다. 폭발적인 것만이 사랑이 아니다. 맹목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것만이 진심이 아니며,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사실이나 존재까지도 내 시선이 닿아 마땅하다.


사실 이 중 어느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누군가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아끼고, 원하는 방향으로 홀연히 떠나기도 하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되물어 가며 그저 순간에 최선을 다한 이들일 뿐이었다는 말 밖에는 따로 증명하거나 논리를 따질 수 있는 방법도 없다. 그러나 결국은 이들처럼 지구에서 단 하나뿐인 나와 우리 역시 그렇게 매 순간 치열하게 분투하며 살아가는, 누구보다도 사랑받아 마땅한 각각의 존재들이라고 위안하게 된다.


'남겨질 날 좀 이해해줘. 너 없이 어떻게 닳아가겠니.' 이런 솔직한 말로 세상을 물들일 용기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있었으면 좋겠다. 이미 그런 소원이 이루어진 정세랑 작가의 <지구에서 한아뿐> 속 세계가 참 마음에 든다.

 

 

[고민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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