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피자 한복판에서 살아갈 이유를 찾다 '폴 : 600미터'

글 입력 2022.11.20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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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공 600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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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DB

 

 

지상의 것들이 콩알 만치 작아 보이는, 마치 비행기를 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 높이에 선 두 사람. 어떤 이유로, 어떻게 이곳까지 올라간 걸까? 영화는 초반부에서 정상을 만끽하는 그들을 보여준다. 이후에 벌어질 일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일 테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기길래.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사실 영화의 시작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위험천만한 암벽을 타고 등반하기를 즐겨하는 세 사람, 베키, 댄, 그리고 헌터. 걸음을 옮기기 전 잠시 공포에 질린 베키를 그의 남편인 댄이 듬직하게 말한다. 너는 '스네이크다이크'도 등반했던 사람이라고. 자신이 있으니 겁먹지 말고 이쪽으로 넘어오라고. 그 말을 믿고 베키는 힘껏 도약한다. 안도감과 충만함을 서로 만끽할 즈음, 다른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들의 한참 위에서 장난스럽고도 퉁명스럽게 타박하는 헌터.


그리고 조금 뒤, 댄은 발을 헛디뎌 위험한 상황에 빠지고 둘 중 누가 돕기도 전에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만다.


1년이 지난 시점. 베키는 완전히 혼자인 상태다. 자신의 일상을 함께한 댄이 이제는 없다는 사실을 여전히 거부한다. 삶의 이유를 송두리 째 빼앗긴 사람 같았다. 물론 그가 겪은 충격이 상당할 테지만, 어떤 면에서는 스스로를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고 싶어 하는 듯했다. 댄이 사라진 방식 그대로. 걱정하며 찾아온 아빠에게 매몰차게 대하며 정말, 세상과 결별할 마지막 지점에 다다랐다.


이때 울린 벨소리.

그리고 초인종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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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DB

 

 

오랜만에 돌아온 헌터였다. 죽음을 결심한 주인공을 막아선 친구. 클리셰로 흔히 쓰이는 전개 방식인데, 곱씹어보면 그 이상의 의미를 담았다.


실의에 빠진 베키에게 헌터는 다소 터무니없는 제안을 건넨다. 곧 철거될 오래된 타워의 끝까지 올라가자고. 표면적인 이유로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할 새 영상을 위한 것이었다. 원래 올라가려던 걸 베키와 함께 가고 싶다고. 끝까지 올라 그곳에서 댄의 유골을 뿌려주며 새 출발을 하자고, 의미를 덧대어주어도 베키는 울먹이기만 했다. 못하겠다고.


못하겠어.

 

이건 베키가 영화 초중반에 지속적으로 하는 말이다. 늘 베키는 못한다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반복적으로 나오는 이 말은 일종의 암시와도 같다. 이 말이 정반대로 뒤바뀔 순간 관객이 느낄 이질감을 예고라도 하는 듯.


그들은 목적지에 다다르기 전 다이너에서 간단하게 배를 때운다. 이때 따로 핸드폰을 충전할 데가 없어 곤란해하던 베키에게 헌터가 테이블 위에 놓인 조명, 그 안에 있는 전구를 이용하는 방법을 보여준다. 유튜버의 생활 꿀팁이라며 너스레 떨던 이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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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DB

 

 

앞서 말했듯 영화의 대부분은 600미터까지 오른 후에 펼쳐진다. 조그마한 피자 한 판 크기 위에 뭐 특별난 게 있겠는가. 아무것도 없는 환경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내려면, 일전에 활용할 수 있는 소스들, 일명 '떡밥'을 여기저기 던져놔야 한다.


전구 소켓에 흐르는 전기를 이용한 충전 방식, 댄이 'I LOVE YOU' 대신 표현하던 숫자 143, 헌터가 베키에게 농담처럼 건네던 'I hate you', 인플루언서 비스름하게 활동 중인 헌터, 그리고 살벌하게 동물 시체를 파먹던 새까지. 어떠한 사실이 후에 복선으로 쓰였다는 걸 깨달아도 이걸 언제, 어떻게 쓸지는 알 수 없어서 결국 영화를 한 번 더 보고 싶은 지경에 이르고 만다.


서로의 존재만이 유일하게 평소의 크기이고 그 밖의 것들은 아주 조그만 점들처럼 작아진 상황이라면, 절로 눈길이 쏠리는 방향은 상대방일 거다. 베키는 헌터와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봤을까. 그냥 스쳐 지나갈 수 있었던 것을 이때엔 하나하나 살피게 되었을 거다. 그렇게 헌터 발목에 숨겨진 타투 '143'을, 그것도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붉은 전구 아래에서 알아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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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DB

 

 

그들이 저 몰래 바람을 피웠다는 걸 알게 되었음에도 베키는 헌터에게 꽤나 침착하다. 배신감. 이건 헌터보다는 댄을 향한 감정일 가능성이 크다. 지난 1년 간 댄을 잃고서 베키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던가. 그를 얼마나 믿고 의지했던가. 그런데 그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말들에 거짓이 섞여있다니. 무엇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 완전히 혼란에 빠진다. 그의 유골은 정상에 도착해 흩뿌렸다. 따지고 보면, 이제 남아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손가락에 낀 반지를 목에 걸고, 그는 마음을 정리한다. 댄과 자신이 하나라고 생각했던 착각에서 벗어나, 자신은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홀로 굳건히 살고자.


그러나 현실은 각박하기 그지없다. 그들이 올라왔던 사다리가 모조리 바닥으로 떨어져 발 디딜 곳 하나 없는 맨 기둥뿐이니. 그들이 지닌 유일한 긴 끈은 서로를 연결했던 15m짜리인데, 물이 든 가방은 그보다 더 아래에 떨어졌다. 헌터는 로프로 내려가겠다고, 할 수 있다고 나선다. 걱정 어린 베키의 시선에 벌을 받아야 한다면 그건 자신이라고 맞받아치며. 무모함으로 그득했던 헌터.


여기서부턴 기나긴 반전이 이어진다. 우리가 보고 있는 건 베키의 환상이지 현실이 아니다. 베키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 헌터 또한 살려야 했다. 영화의 이미지와 청각은 우리를 교묘하게 속이기 시작한다. '쾅!' 커다란 소음이 들렸는데도 헌터는 살아있고, 이것저것 자신이 하겠다고 나서던 헌터는 말만 하지 직접 행동하는 건 베키다. 헌터가 알려준 모든 사실과 지식을 합쳐 드론을 그들이 머물었던 모텔까지 보내려 했으나, 그 시도마저 실패하고 만다. 허무하게, 그러나 똑같은 반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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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DB

 

 

베키는 어느 순간 깨달았다. 외부의 누군가가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생각은 터무니없다고. 자신의 삶을 구원하고 살릴 사람은 딱 자신뿐이다. 삶의 책임을 전가하며 미루는 건 뺏기고 부서지는 결과만 얻는다. 그러나 절벽 끝에 이르러서는 알게 된다. 자신이 정말 무얼 하고 싶은지. 베키는 말하기 시작했다. 혼자서 할 수 있다고. 때로는 끔찍하고 괴롭고 고통스럽다고 한들 맞서서 이겨낼 줄 알아야 한다고. '그래야 한다'. 강압적인 표현으로 보여도, 해낼 수 있기에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누군가가 있어야 자신이 온전히 살아갈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은 궁극적으로 나약함과 무력감을 가져온다. 무얼 하든 혼자서는 불완전하다고 느낄 테니. 혼자 살아갈 생각보다 죽음을 갈망하는 게 더 쉽다고 여길 법하다. 그러나 혼자인 삶이 그렇게 무섭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기만 하면 그에게 세상은 더 이상 무서운 존재가 아니다.


그런 말이 있다. 삶에는 파동이 있다고. 끝도 모를 위로 오르는 때가 있는가 하면, 정반대로 끝 모를 바닥으로 치닫기도 한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그 순간, 이상한 힘이 생긴다. 슬픔의 구렁텅이에서 뛰쳐나오고 싶은 마음. 더 나은 삶을 원하는 마음. 올라갈 사다리도, 손을 내밀어 줄 다른 존재도 필요치 않다. 내가 나를 알아서 그곳에서 꺼낸다. 방법은 어떻게든 찾게 된다. 진정으로 자신을 믿고 따를 준비만 되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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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DB

 

 

복선을 순간순간 알아차리는 재미 못지않게 이런 면을 생각해도 다시 볼 의미가 있다. 역경에 더 강해지는 우리 인간을 생각하며.

 

 

[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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