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첫째 딸은 아빠 닮는대

글 입력 2022.11.19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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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딸은 아빠 닮는다” 어떠한 과학적 근거도 없지만, 수많은 사람의 증언을 바탕으로 기정사실화된 이 문장을 나 역시 부정할 수 없다. 만약 이 글을 읽은 누군가가 거실에서 주방으로 이어지는 공간의 한편에 놓여 있는 가족사진을 본다면, 의아함을 표할지도 모른다. 사실 내 생김새는 대부분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고, 아빠를 찾아볼 수 있는 부분은 짙은 눈썹 정도일 것이다.


그럼에도 첫째 딸인 내가 아빠와 닮았다는 사실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는 이유는 이런 것 때문이다. 아주 강하게 내재된 문과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이유로 공대를 졸업한 아빠의 길을, 나는 2개의 학사가 찍힌 졸업장을 받기 위해 공부함으로써 따라가고 있다는 점. 끊임없이 출시되는 새로운 전자기기들에 관심이 많으면서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들을 포기하지 못하는 모습이나 영화 속 판타지 세계에 매료되는 것까지도. 엄마로부터는 외모를, 아빠로부터는 취향을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비슷한 취향의 결과물들이 집안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 사진관에서나 볼 법한 큰 렌즈가 부착된 카메라를 항상 지니고 있었던 아빠 덕분에 유년기의 내 모습은 꽤나 고화질로 보존될 수 있었다. 스마트폰의 뒷면을 상당 부분 차지하고 있는 카메라로 저 멀리의 종탑을 선명히 확대하여 촬영할 수 있는 기술이 평균이 되어버린 현재의 기준에서 보아도, 과거의 수많은 나는 아주 또렷하게 웃고 있다.

 

그리고 그 사진들 곁에는 필름 카메라로 담아낸 엄마와 아빠의 모습이 있다. 수십 년 전의 방식으로 기록된, 숲의 초록 잎들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 2021년의 어느 가을날은 확연히 흐릿하다. 그러나 필름 특유의 질감으로 인해 흐려진 색의 경계들은 현재의 선명함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분위기를 선사한다.


눈길을 잠시 돌리면 무작위로 꽂혀 있는 듯하지만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분류된 바이닐과 CD의 공간이 등장한다. 진열장 4칸을 훌쩍 넘긴 음악들에서 나의 지분은 겨우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학창 시절부터 이어진 아빠의 음악에 대한 사랑을 음반의 개수가 증명한다. 그 색 바랜 음반들에 담긴 세월을 나는 이길 수 없지만, 이어갈 수는 있다.


굳이 누가 고른 것인지 시간 들여 고민할 필요도 없다. 내가 사는 바이닐은 Taylor Swift, Lorde, Lana del rey, 5 seconds of summer, Troye sivan 등 흔히 말하는 ‘요즘’ 팝 가수의 앨범, 그에 반해 아빠의 바이닐은 Queen, Pink floyd, Radio head, Oasis처럼 이제는 전설로 남은 밴드들과 쇼팽, 베토벤 등의 클래식, 영화 사운드트랙, 봄여름가을겨울, 유재하, 김현식 등의 오래된 한국가요들이다. 마치 아빠의 책장에 줄 세워진, 올해로 45회를 맞이한 이상문학상 작품집과 나의 책장에 있는 9회부터 13회까지의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처럼 다르다.


겉의 커버가 해져버린 음반과 아직은 새것의 티가 나는 음반 사이의 간극은 검은 판만이 존재했던 과거에서 온갖 색과 사진, 무늬가 새겨진 판이 나오는 현재까지의 시간이다. 그동안 셀 수 없이 많은 음악이 빛을 보고 사라졌으며 새로운 가족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나는 물려받은 취향으로 그 시간의 틈을 채우고 계속해서 흘러가게 한다. 작은 바늘이 오래된 음반 위를 유려하게 지나가는 모습을 가만히 앉아 보고 있으면, 음반 가게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한 사람의 설렘을 느낄 수 있다. 지금까지 거쳐 왔던 여러 집의 먼지 냄새를 맡고 연속해서 돌아가는 원을 따라 시간을 거스를 수 있다.


하루는 턴테이블 위의 조명을 켜지 않고 희미하게 남아있는 해의 흔적만으로 공간을 밝히며 음악을 틀었다. 어두운색의 가구는 모습을 감추고 작은 화분에 피어있는 흰색 꽃과 몇 개의 오브제만 보이는 그 밝기는 노래에 집중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환경을 조성해 주었다.


두 개의 스피커와 내가 삼각형의 세 꼭짓점을 이루는 위치에서 소리를 가장 잘 들을 수 있다는 아빠의 말에 따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소파의 가운데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나 오랫동안 갖고 싶었던 음반을 구해 처음으로 재생해보는 들뜬 마음 때문인지, 더 좋은 위치가 있을 것만 같은 아빠에 대한 작은 불신 때문인지. 왜 스피커 앞에 오그리고 앉게 되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리고 미세하게 떨리는 스피커의 표면 가까이 몸을 기울여 음악을 들었을 때, 각기 다른 인위적인 소리들의 조화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몸 전체를 포근하게 감싸는 음악의 진동이 스피커와 앰프의 전원을 누르고, 고심해서 고른 음반의 커버를 벗겨내어 바늘을 올리기까지의 과정도 음악을 듣는 행위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듯했다. 이날 이후로, 머릿속에 가득 차 있는 생각을 비워내고 싶을 때마다 그날의 밝기, 약간은 우스워 보이는 그 자세와 함께 음악을 듣는다.


마침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아빠에게 이 기분 좋은 경험에 대해 말하면서 빨리 스피커에 머리를 가까이해보라고 재촉하자, 그럴 줄 알았다는 미소와 함께 “아빠는 이미 해봤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때 확실히 깨달은 것이다. 왜 할머니가 바이닐의 포장을 뜯는 내 얼굴을 보고 아빠의 과거를 떠올리셨는지, 왜 첫째 딸이 아빠를 닮는다고 하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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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뒤 나는 집안으로 들려가 침대에 뉘었다. 잠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나를 끌어당긴다. 그리고 나를 받아주고 그 집에서 친숙하고 사랑받는 존재로 말없이 대해주는,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 결코, 결코, 지금도, 앞으로도, 결코 내게 알려주지 않을 그들도.” 제임스 에이지의 산문 ‘녹스빌:1915년 여름’에 등장하는 한 구절이다.


처음 이 문장을 마주했을 때, 이보다 더 가족을 잘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조건 없는 사랑, 구태여 ‘사랑’이라고 명명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형체 없는 따뜻함을 주지만 내가 누구인지는 알려주지 않는 사람들. 물론 지금도 나를 찾아내야 하는 건 오롯이 나의 몫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나를 이루고 있는 가장 큰 부분을 이미 물려주지 않았는가. 수많은 퍼즐 조각 중 하나를 처음부터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조각을 간직하고 있는 지금, 앞으로 주어질 많은 삶의 문제들이 두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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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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