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거울은 필연적인 실패 - 거울 [공연]

거울 앞 '나'를 해체하는 시간
글 입력 2022.11.12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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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만큼 애틋하고도 무거우며 지겨운, 그 외 수많은 개념을 함축시킨 단어가 또 존재할 수 있을까. 유리 의자처럼 편한 듯 위태롭고, 투명한 물처럼 말간 듯 심해처럼 막연한 것이 가족이라고 느낀다. 이것을 움직임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어떤 형상이 그려질 수 있을까? 가족과 ‘움직임극’이라는 새로운 만남에 궁금증을 한 움큼 안고 공연장을 찾았다.


공연 시작 전부터 두 배우의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었다. 거울 속 자신이 움직이는 모습을 유심히 본 적이 있다면 움직임의 미묘한 특징을 알 것이다. 거대한 움직임이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올 수 있는지, 사소해 보이는 움직임도 얼마나 각고의 고민과 계산 끝에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인지.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으면서도 때론 마음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 내 몸이란 사실도 말이다.

 

때문에 겉으로 드러난 동작은 모든 것을 담아내면서도 그 의미를 온전히 드러내지 않는다. 가족을 대하는 우리의 움직임은 어쩌면 이것에 가깝지 않을까. 두 배우는 섬세하게 몸을 쓰며 이러한 가치를 가족이라는 거대한 갈래에 연결하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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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정은 엄마(순영)에게 물려받은 완치 불가 유전병으로 매일 정해진 시간마다 스테로이드를 투약해야 한다. 건강에 좋지 않은 식습관과 생활 습관이 없고 오직 유전 때문에 삶을 제약당하는 해정이 순영을 원망하는 것은 당연한 듯 보인다. “엄마 딸이 아니었으면, 나도 괜찮을 수 있었잖아.” 그렇다. 해정은 괜찮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직 특정한 ‘병’이 해정의 삶에 근본적인 문제였을까? 과연 해정과 순영의 삶은 ‘병’이 없었다면 순탄할 수 있었을까?


극을 보며 유전병은 특정한 병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관계 자체로 비유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나의 가족이 만들어지면서부터 구성원 모두가 죽을 때까지 뗄 수 없는 ‘완치 불가 유전병’을 갖게 되는 것이다. 가족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런 강제적인 연결성에서는 불가항력적인 영향이 생길 수밖에 없다. 물론 어느 시점에는 그것을 외면해버릴 수 있겠지만, 가족으로부터 탄생한 ‘나’와 그러한 영향 속에서 형성된 ‘나’까지 완전히 외면해버릴 수는 없다. 나에게서 가족이란 부분을 깔끔히 도려내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순영은 아팠다. 그래서 해정도 아팠다. 그래서 순영도 다시 아팠다.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가 공유하는 아픔을 말하지 않고 애써 외면했다. 서로가 야기한 아픔을 부정하고 그 치료도 온전히 자기 몫으로 돌렸다. 마치 가족의 기본 소양이 ‘문제없음’이라도 되는 것처럼.

 

서로에 의해 아픈 것이 분명한데 왜 가족은 이다지도 멀쩡해야만 할까. 왜 속에 있는 말을 하지도 못하고 겉으로만 괜찮은 척할 수밖에 없을까. 아무 문제가 없기 위해선 우리는 많은 말을 생략해야 한다. 그런 생략 속에서는 서로를 위한 노력 역시 생략될 수밖에 없다. 가족 또한 하나의 관계이기 때문에 노력의 부재는 가족을 ‘가족’답지 않게 만든다. 그런 가족은 필연적으로 병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관계가 된다. 그것이 싫어 피하고 덮을수록 ‘유전병’은 고질적으로 깊어질 뿐이다.


이것이 마주치기 끔찍한 가족과 억지로 대면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자기에게로 돌리려는건 오판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나는 나만으로 쌓아 올려진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홀로 문제를 찾고 해결하려는 시도는 대부분 실패가 될 것이며 그런 다짐은 공허한 자기 학대가 될 수 있다.

 

타인을 통해 만들어진 것들은 타인을 경유하여 해소되어야 한다. 그것을 알기란 쉽지 않을 수도, 외면하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부지런히 나를 타인에게 비춰봐야 한다. 얽히는 것으로부터 끊어짐이 시작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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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정과 순영은 원하지 않아도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자식과 부모 사이, 또 다른 관계에서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란 비유는 흔하다. 두 사람을 보며 이것이 비단 비유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홀로 거울을 바라보는 것이 필연적으로 실패하는 것이 아닐까. 나에 얽힌 수많은 존재를 생략한 채 나의 형상만을 담아내니까. 마치 나는 그냥 나뿐이라는 듯이. 모든 것은 나에게 달려있다는 듯이.

 

해정은 순영을 제외한 채로 거울 속에 온전히 비춰질 수 있는가? 순영을 제외한다면 해정의 삶은 온전히 해정의 것인가? 해정은 모든 관계에서 벗어나 오롯한 자신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이 가능하고 바람직한 삶인가?

 

대부분에게 혈연 가족은 자신과 타인의 복잡한 합일을 인식하는 첫 단계가 될 것이다. 독립적인 내가 되기 위해 반드시 얽히고 말아야 한다는 아이러니를 받아들일 첫 단추가 될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규칙이 적용되는 관계가 비단 혈연 가족에서 그치지 않고 모든 관계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거울을 다른 각도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거울을 본다는 것은 홀로인 자신을 마주하는 게 아니다. 그것에 얽힌 타인까지도 바라보는 행위다. 거울 앞에 자신은 마주했고 마주하는 타인에 의해서 형성되었고 이미 관계를 맺었다면 그 사이엔 피할 수 없는 ‘병’이 생겨날 것이다. 그 병은 인지하지도 못할 만큼 사소할 수도, 모든 것을 압도할 수도 있다.


모르는 새에 서로에게 부과한 ‘병’을 대하는 적절한 책임은 무엇일까. 이를 외면하지 않고 서로의 ‘스테로이드’가 되는 것이겠다. 나로 인해 발생했을 수도 있는 상대방의 염증을 치료해주는 것이다. 자신에 의해서만 생겨난 병이 아니기 때문에 나만의 스테로이드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서로의 잠재적인 영향을 인식하고 이를 보살피기 위한 돌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해정이 상상으로만 끝없이 만들어 냈던 바로 그 장면을 위해 말이다.

 

배우들이 대화를 나누며 서로가 아닌 관객석을 바라보았던 장면이 이런 가치를 더 인식하게 해줬다. 관객과 배우는 이 무대를 통해 영향력을 나눴고, 그렇게 서로는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되었다. 이 시간과 공간을 통해 형성된 ‘나’는 다시 이곳의 시공간과 사람을 통해 해소되어야 할 것이다. 이 글도 그러한 행위의 일종일 것이다.


짧다면 짧은 1시간의 극이었지만 내내 긴장하고 압도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저들의 말과 움직임이 표현하는 바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깨달은 건 그 공간은 나와 사회를 비추는 거대한 거울이었다는 것이다. 그 속에서 나는 ‘어떤 나’를 발견할 것인가. 나를 비추는 거울은 어떤 조각들로 이어져 있는가. 거울 속 나를 어떻게 해체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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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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