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느리지만 확실하게 취향을 찾아가는 방법 [사람]

~중에 옳지 않은 것은?
글 입력 2022.10.1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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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나는 국어 과목을 정말 잘하고 싶었다. 아주 못하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뛰어나게 잘하는 것도 아닌 등급. 어떻게 하면 그 한 끗을 올릴 수 있을지 궁금했다.

 

머리를 싸매며 고민을 하다가 매번 1등급을 받던 친구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어떻게 하면 너처럼 국어를 잘할 수 있느냐고. 돌아온 친구의 답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뭔가 답일 것 같은 애를 고르면 돼."

 

친구의 대답을 듣고 '얘가 지금 나랑 장난을 하는 건가? 아니면 나한테 공부방법을 알려주기 싫은 건가?' 이런 삐딱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고, 자리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하긴 인터넷이나 주변에서 비슷한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어릴 적부터 책을 많이 읽은 친구들에게는 이런 '감'이라는 게 있어서, 쓱 한 번만 읽어도 답일 것 같은 선지가 보인다고. 그걸 고르면 된다고.

 

아쉽게도 당시 나에게는 아직 그런 감이 없어서, 지문과 선지를 꼼꼼하게 읽고 난 뒤에 답이 아닌 선지를 지워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 문제를 많이 풀다 보니, 그때 친구가 말한 '감'이라는 게 무엇이었는지 어렴풋이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문제를 풀다가 (아는 것도 틀려버리는) 몇 번의 쓴 맛을 본 적이 있었기에, 나는 여전히 하나하나 확인하여 틀린 선지를 지워나가는 방식을 택했다.

 

나에겐 그게 확실한 공부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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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기록에 관한 글을 읽고난 뒤, 야심 차게 만들어본 ['나'를 주제로 한 백과사전] 속에는 이런 기록 하나가 적혀 있다.

 

 

아메리카노 : 아메리카노라면 가리지 않고 잘 마시는 줄만 알았는데, 나는 의외로 산미가 강한 아메리카노를 좋아하지 않는다. (2022.07.15. 등록)

 

 

당시 다니던 회사 사무실에 찾아온 손님이 사 온 아이스 아메리카노 속 엄청난 산미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그날 적었던 나의 기록.

 

예전에는 간혹 카페에서 "원두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거나' 나 '제일 많이 나가는 걸로 주세요.'라고 답하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산미가 덜한 원두로 달라고 대답한다.

 

나에게 취향을 쌓아가는 일은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를 찾아가는 과정보다는, 시행착오 끝에 내가 정말 싫어하는 어떤 것을 알아내 이를 소거하는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정말 싫어하는 것만 하지 않아도 삶의 질이 높아질 때가 많았듯 내가 무엇을 싫어하는지에 대한 경험을 쌓아가는 것 역시 참 중요한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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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비슷한 경험을 오래도록 미뤄왔던 방 청소를 시작했을 때에도 느낀 적이 있다.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라, 매번 [방 청소를 시작한다-안 쓰는 물건을 발견한다-'언젠가 쓸 일이 오지 않을까?'-다시 서랍 속에 집어넣는다-방이 늘 어지럽다]의 무한 굴레에 갇히기 일쑤였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최근 6개월 동안 한 번도 쓰지 않았던 물건'이라는 기준을 세웠다.

 

내 방에 있지 않아도 될 물건들을 하나씩 소거하는 방식인 것이다. 무엇을 남길지 보다는, 무엇을 버려야 할지를 정하고 나자 청소의 방향성이 명확해졌다. 그러자 20리터 쓰레기봉투 2장이 꽉 채워졌고, 어수선했던 방은 금세 말끔해졌다.

 

어쩌면 그때 친구가 나에게 '국어 잘하는 법'으로 말해주었던 그 '감'도, 그녀 역시 어릴 적 여러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 얻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중에 옳은 것은?', '~중에 옳지 않은 것은?'이라는 질문에 주어진 선지를 하나씩 읽어나가며 정답을 찾아가던 학창 시절 나의 모습처럼, 나는 느리지만 확실한 소거법으로 나만의 취향을 찾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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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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