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Quodlibet] 예브게니 코롤리오프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아트센터 인천-9/27
글 입력 2022.10.12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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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향과 협연 스케줄로 한국에 오신 코롤리오프 할아버지를 아트센터 인천이 장하게도 납치해왔다. 그것도 평일 저녁으로. 직장인들은 절규하지만, 내 입장에서 평일 저녁 인천 공연은 조금 무리긴 해도 호불호를 따지자면 호에 가깝다. 정말 오고 싶은 사람들만 올 가능성이 높아서 관객 분위기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빨간 날 잠실 롯데 공연은 뭐.. 시장 바닥에서 연주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인천은 홀은 기가 막히게 지어놓고 공연 스케줄이 그리 많지 않아서 참 아쉽지만 그렇다고 좋은 공연이 온다고 해서 표가 많이 팔리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도 쭉 아쉬울 예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에 좋은 콘서트홀 좀 더 지어라! 언제까지 예당 원툴인가.


이번 공연도 표가 상당히 적게 팔렸다. 앞서 말했듯이 평일+인천 조합의 영향이 가장 크고, 일단 코롤리오프가 그렇게 대중적인 이름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만 아는, 그것도 바흐를 많이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서만 신봉자들이 있는 느낌? 코롤리오프보다야 티켓을 훨씬 많이 파는 안드라스 쉬프 같은 연주자가 바흐의 해석에 있어 맥시멀리즘의 한 극단에 있다면, 코롤리오프는 미니멀리즘의 한 극단에 있다. 장식음의 절제된 사용, 흡사 기계와도 같은 성부 간의 밸런싱. 때문에 그의 바흐는 언뜻 들으면 조금 무던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차가운 얼음과도 같은 명징한 음색이 강점인 그의 연주는 음악의 뼈대를 명확히 드러내고, 처음에 무던하다고 느낀 해석은 점차 고독의 무심한 표현으로 다가온다. 특히 지금도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 2008년도 라이프치히 바흐 페스트에서 코롤리오프가 연주한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혼자 치는 악기인 피아노가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고독의 특성과 바흐 음악의 엄격한 질서를 너무나도 잘 구현한 연주다.

 

 

 

 

사람으로 치면 무표정한 얼굴에 가장 많은 것들을 담아내는이라 할 수 있겠다.

 

아트센터 인천은 국내의 클래식 공연장 중에 가장 음향이 좋다고 여겨지는 홀이다. 통영 국제음악당이 가장 훌륭하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많지만 통영 홀은 내가 한 번 밖에 가보지 않아서 비교가 어렵다. 롯데콘서트홀은 울림이 너무 크고,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은 내 취향에는 조금 건조하다. 그 중간에서 음향적으로 가장 균형이 잘 잡혀있는 홀이 인천이라 느껴진다. 인천은 갈 때마다 2층에만 앉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1층 중앙에 앉아 보았는데 시야와 음향 전부 너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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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b 블록 6열 1번 체감 시야


 

코롤리오프님의 터치는 물론이고 눈썹이 들썩이는 것까지 보이는 자리였다.

 

최근에 내신 파르티타 음반에서 중간중간에 템포를 임의로 바꾸는 루바토를 자주 하시길래 스타일에 변화를 주신 것 인지 노쇠로 인한 테크닉의 저하를 보완하려고 하신 것 인지(사실 후자일 것이라 생각했다. 스타일이 바뀔 리는 만무하기에)헷갈려 이번 연주는 걱정이 앞섰다. 80분에 달하는 대곡을 인터미션도 없이 잘 치실 수가 있을까?

 

서울시향과의 협연이 23일, 24일이었으니 이틀 쉬신 셈인데, 그 사이에 어디서 뭘 하면서 돌아다니셨는지 알 수 없지만 뭔가 대단한 걸 달여서 잡수셨나 보다. 세상에.. 이렇게까지 멀쩡할 줄은 몰랐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2008년도 실황과 비교해 기량이 별로 떨어지지 않은 것 같았다. 컨디션이 좋아 보이셨다. 말하자면 노쇠함으로 떨어진 테크닉을 유독 좋았던 그날의 컨디션으로 메꾸신 느낌.

 

그나저나 거장 피아니스트들의 건강 상태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아르헤리치 같은 사람은 그렇게 담배를 피워대는데도 건반 위에서 날아다니고, 그보다 한 살 어린 폴리니는 허리가 다 굽어서 걷는 것도 힘들어하신다(올해 5월에 예정되어 있던 내한 공연도 건강 문제로 취소).

 

*

 

기억에 남는 변주를 몇 가지만 적자면,


1~3번은 의외로 임팩트가 별로 느껴지지 않았는데, 4번부터 그만의 단단한 매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1번~10번 보다 11번~30번이 훌륭했고, 전체적으로 뒤로 갈수록 좋은 연주였다. 처음에는 손이 덜 풀리신 것인지 5번 변주 같은 경우에는 눈에 띄는 미스가 여러 번 있기도.


원래 나는 12번과 15번을 상당히 좋아한다. 앞선 성부의 주제/진행 모양을 뒤에서 시작한 성부가 똑같이 모방하는 것이 카논인데, 아리아와 총 30개의 변주곡으로 구성된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마지막 30번 변주를 제외하고는 순번이 3의 배수인 변주마다(3, 6, 9, 12..) 카논이 나온다. 그중 12번과 15번은 카논으로서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데, 12번과 15번 모두 각각을 이루고 있는 성부들 간의 모방이 X축 대칭으로 이루어진다. 한 성부가 상행하면 다른 한 성부가 앞선 성부를 대칭적으로 모방하면서 하행한다. 흡사 데칼코마니와도 같은 구조인 것으로, 곡 자체에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두 변주에 대해 나는 감정적인 연주보다 음표 하나하나를 살려 구조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연주를 선호한다. 그리고 코롤리오프의 연주는 이런 나의 이상형에 완벽히 부합하는 연주였다. 진부하게 말하자면 눈앞에 악보가 그려지는 듯한, 아주 좋은 의미로 교과서적인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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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번은 음반으로 들을 때도 이 변주는 코롤리오프의 연주가 가장 좋다고 생각했는데 고도의 테크닉과 속도감이 필요한 곡인데도 전성기와 다름없는 연주력을 선보이셨다.


18번 변주에서 코롤님은 실황에서도 음반에서도 첫 번째 반복구에서 원래의 지시보다 한 옥타브 높여서 치시는데, 실연으로 들으니 이 부분이 압도적으로 아름다웠다. 앞서 코롤리오프의 음색은 차갑고 깨끗해서 얼음을 연상시킨다고 했는데, 한 옥타브 높은 곳에서 얼음은 너무나도 얇아졌다. 깨질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에 눈물이 자꾸 나왔고, 뱃속이 간질간질했다. 내 앞자리에 앉아있던 남자분도 티슈로 눈물을 자꾸 훔치셨다.


22번 변주는 평소에 그렇게 존재감이 있던 곡이 아닌데, 17번째 마디에서 이 곡이 얼마나 좋은 곡인지 깨달았다. 골드베르크 변주곡 전체가 그런 느낌이 있긴 하지만(구조적으로 수미상관의 형식이기도 하고), 이날 22번 변주의 17번째 마디에서 32번째 마디까지의 연주는 유독 노스탤직한 감정을 자아냈다. 21번과 22번이 이번 연주에서 가장 감정적으로 진한 구간이었던 것 같다.


아쉬웠던 부분은 25번과 26번 변주.

 

원래 코롤리오프의 25번 연주는 그리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일단 너무 느리고 너무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연주랄까? 사실 25번이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이 변주가 26번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 곡을 다 듣고 26번이 어땠느냐에 따라 25번의 인상도 함께 결정되는 부분이 있어서다. 쉽게 말해, 26번이 아쉬워서 25번도 덩달아 아쉬웠다는 것이다. 안드라스 쉬프는 두 변주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25번에서 이 곡은 끝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도 삶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바흐는 'Definitely Yes!'라고 26번에서 답한다."

 

이 말에 너무 강한 영향을 받은 나는, 골드 베르크를 들을 때마다 느리고 사색적인 25번 변주-완다 란도프스카가 'Black Pearl'이라고 칭했던-를 지나 26번에 도달하면 습관처럼 어떤 미약한 생기를 느끼고자 한다. 그러나 코롤리오프의 오른손은 너무 정직했던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되는 삶과 예술의 생동성보다는 그럼에도 계속되는 노동의 정직성이 부각되는 연주였다. 한편으로는 덕분에 성실한 직업적 음악인으로서 평생을 살아온 바흐의 노동을 연상시키는 대목이었기에 음악의 다른 측면을 떠올려보기도 했다.


30번 변주'Quodlibet'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변주 중 하나다. 어쩌면 제일 일지도? Aria에서 시작해 Aria da Capo로 돌아오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전체 구조는 집을 떠났다가 긴 시간이 지난 후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여행을 연상시킨다. 때문에 여행을 마무리하기 직전 단계, 30번째 변주는 길었던 길 위의 시간들을 곱씹으며 여독을 풀어주는 과정이다. 그리고 바흐는 그 여독을 술집에서 푼다. 실제로 해당 변주는 당대에 거리에서 유행했던 여러 민요들의 선율들을 이어 붙여서 만든 노래다.

 

이 날의 30번은 완벽히 내 취향에 맞아떨어지는 연주였다. 2008년도 실황은 피로를 좀 더 다독이며 풀어주는 느낌이었다면 이번 공연은 한 손에는 맥주잔을 쥐고 무용담을 늘어놓는 당찬 느낌이 더욱 살아나 내 취향에 너무나도 잘 맞았다. 무겁고 거대한 문을 여는(물론 그 문은 고향 마을을 감싸고 있는 성벽의 문일 것이다.) 듯한 힘 있는 도입부와 이와는 대조되는 느리고 감정적인 끝맺음이 좋았다. 30번 변주의 이름 Quodlibet은 라틴어로 '좋을 대로' 또는 'What ever you wish' 등을 뜻한다. 흥겨운 노래가 끝날 때 연주는 점점 힘을 빼고 하늘로 올라가 마침내 'What ever you wish'라는 말에 걸맞는 가능성으로서의 텅 빈 침묵을 제시한다. 그러고 나면 다시 Aria로 돌아온다.

 

전체적으로 음반이나 이전 실황과 비교해 봤을 때 이번 연주는 다이내믹 레인지가 훨씬 넓게 느껴졌다. 어떤 곡은 매우 진지하게, 어떤 곡은 매우 신나게 연주해야 하는 이 대곡의 특성상 너무나 만족스러운 골드베르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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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앞바다는 올 때마다 타인에 무심한 바다라는 생각이 자주 들곤 하는데, 곡 자체가 가지고 있는 고독의 감각이 제법 인천과 어울리는 듯했다. 그러나 공연장 앞에서 찍은 위의 사진은 사실 바다가 아니고 호수다. 아주 넓은 호수.


푸가의 기법 CD를 들고 갔지만 사인회가 중단되는 바람에 사인을 못 받아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근래에 본 최고의 공연이었으며,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당분간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듣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정말로 생각만 했더랬다. 집에 돌아오니 자동으로 베아트리체 라나의 골드베르크 음반에 손이 가서 어쩔 수 없이 또 듣게 되었다. 근래 최고의 골드베르크가 학과 교수님이 추천해 준 바로 이 베아트리체 라나의 연주다. 굴드 이후 몇십 번도 더 리코딩 된 곡일 텐데 21세기에도 아직 이런 연주가 나온다는 사실에 세상에 대한 희망마저도 느껴지는 음반이다. 코롤리오프 얘기 실컷 하다가 라나로 끝맺는 게 이상하지만, 지나간 음악은 다가올 음악을 이길 수 없는 법이다. 음악은 들어도 들어도 더 듣고 싶다. 유독 음악이 더 그렇다. 꼭 라나나 쉬프가 골드베르크를 들고 내한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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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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