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여름과 가을 사이를 넘나드는 선율 - 알렉산더 말로페예프 리사이틀 [공연]

풋풋하고 수줍은 청년의 강렬한 피아노 연주
글 입력 2022.09.12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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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서 이후로 기온이 제법 내려갔다. 이제 어딜 다녀도 예전만큼 땀이 뻘뻘 흐르지는 않는다. 공기 중의 습도도 많이 낮아졌음을 실감한다. 불어오는 초가을 바람을 맞을 때면, 사계절이 있는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것이 감사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완전한 가을은 아니다. 일교차가 심해져 오전과 밤에는 쌀쌀하지만, 여전히 한낮의 온도와 볕이 뜨겁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름과 가을의 경계선에 있는 요즘, 듣기 제격인 공연을 지난 9월 3일 잠실 롯데 콘서트홀에서 감상하고 왔다.

 

 


알렉산더 말로페예프 리사이틀

 

2022.09.03 (sat) 오후 6시, 롯데 콘서트홀 8층


 

 

말로페예프_리사이틀_포스터 최종.jpg

 

 

이번 공연의 연주자 피아니스트 알렉산더 말로페예프는 13세의 나이에 차이코프스키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다. 피아노에 있어서 남다른 재능을 가진, 소위 말하는 '신동'이었던 그는 현재 정확한 테크닉과 성숙한 표현을 선보이며 관객을 감동시키는 젊은 피아니스트로 성장하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공연을 다녀오기 전까지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우리나라 연주가가 아니기도 했고, 매체에서 늘 비춰주는 것은 정말 유명한 '스타' 연주자들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접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 이유였다. (아 그가 스타 연주자가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그저 다양한 매체에서 워낙 중복적으로 다루는 연주자들이 한정되어 있고, 클래식에 조예가 깊지 않은 필자로서는 그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공연에 다녀오게 된 것은 늦여름과 초가을 사이의 저녁 무렵 간만에 즐기는 클래식 공연은 아주 반가운 일이자 당분간의 행복지수를 높여줄 기회였기 때문이다.

 


공연장.jpeg

 

 

오후 6시, 잠실 롯데 콘서트홀 안은 작은 숨소리도 크게 들릴만큼 적막함이 감돌았다. 이윽고, 연주자가 무대에 올라 간단한 인사 후 곧장 피아노에 앉는 것으로 이번 연주회가 시작 되었다.

 

연주회는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Program

 

1부 


베토벤 - 피아노 소나타 17번 '템페스트'

 

메트너 - 피아노 소나타 사단조, 작품번호 22

 

2부

 

스크리아빈 - 다섯개의 프렐류드, 작품번호 16

 

스크리아빈 - 두 개의 즉흥곡, 작품번호 12

 

라흐마니노프 - 회화적 연습곡, 작품번호 33

 

 

리사이틀의 서막을 연 곡은 다름 아닌 베토벤의 템페스트였는데, 그의 연주는 필자가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종류의 템페스트를 선사하였다.

 

템페스트는 베토벤이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요양하던 시절에 작곡한 곡으로, 비극성이 곡 전반에 짙은 소나타다. 베토벤의 새로운 작곡 스타일이 시작되는 지점에 있는 곡이라서 그런지, 실제로 당시에 학자들의 논란과 관심의 대상이었을만큼 기존의 것에서 벗어난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

 

베토벤이 여러 가지 문제로 골머리를 썩힐 시절에 작곡한 곡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템페스트는 곡 자체를 감상하고 나면 꼭 한 편의 극을 본 것 같은 서사가 존재한다. 그래서 테크닉적인 면모 뿐만이 아니라, 감정을 깊이 있게 실어서 타건해야 하는 곡이기에 어려운 곡이라고 생각한다.

 

곡은 총 3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부분은 마지막 악장이다. 구슬픈 목소리로 이야기 하는 듯 전개되는 멜로디와 함께, 제목 그대로 폭풍우치듯 몰아치는 구간이 바로 3악장이다.

 

이번 연주에서는 그 구간이 유독 사무치게 아픈 느낌으로 다가왔다. 마치 자기 자신도 어찌 하지 못하는 괴로움에 휩싸인 한 사람의 시간을 관조하는 느낌의 연주였다. 테크닉적으로 강렬한 대비감보다는, 1악장부터 이어지는 전체적인 감정선의 흐름을 잘 보여주었으며 이제 막 성인이 된 자의 깊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할 만큼 좋은 연주였다.

 

 

알렉산더 말로페예프 프로필 2.jpg

 

 

두 번째 곡부터는 모두 러시아 피아니스트의 음악으로 프로그램이 전개되었다.

 

메트너의 곡은 이번 연주회를 통해 처음 접하였는데, 라흐마니노프 등 동시대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곡의 진행방식이 독특했다. 곡 자체는 나비처럼 가벼우면서도 아름다운 선율이 주를 이루는 음악이었다.

 

알렉산더 말로페예프의 손에서 연주된 메트너의 피아노 소나타는 정확하고 섬세하게 연주되었으며, 그의 손끝에서부터 피어난 선율은 관객의 고막까지 온전히 전달되었다. 사실 익숙하지 않은 느낌의 음악이라 처음에는 많이 낯설었지만 아름다운 선율에 필자도 모르는 새에 몸을 맡기고 있었고, 어느새 곡의 막바지에 접어들어 있었다. 그만큼 몰입감 있게 들었던 곡 중 하나다.

 

20분 가량의 인터미션 후 시작된 2부에서 그의 진가는 빛을 발했다. 스크리아빈의 곡을 연주하는 순간부터 라흐마니노프 곡이 끝날 때까지 30분 가량의 시간 동안 넋을 놓고 감상하였다.

 

2부 첫 곡인 다섯 개의 프렐류드에서, 그는 서정적이고 섬세한 스크리아빈의 곡 자체라고 말해도 무방할 만큼 탁월한 표현을 선보였다. 시골 어귀에 위치한, 개울이 흐르고 들이 있는 아주 한적한 그런 곳에 있는 고향으로 떠난 듯한 느낌이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떠오른 연주였다고나 할까.

 

이후 이어진 곡들도 위와 같은 느낌이었다. 마치 무겁지 않은 향조로 이루어진 향수를 온 몸에 뿌린 뒤에 나는 잔향같은 느낌.

 

 

앵콜이요.jpeg

 

 

본 공연이 끝나고, 차이코프스키와 메트너의 곡을 비롯하여 무려 6곡이 넘는 앵콜을 하였다.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처음 열정 그대로의 연주를 보여줬다. 첫 번째 앵콜 후 수줍게 돌아서는 듯 했으나, 그 이후에도 관객들의 박수 갈채에 보답하기 위해 무려 6곡을 연달아서 보여준 것이다! 덕분에 관객석에서는 기립박수가 곳곳에서 터져나왔고, 공연장은 스무살 청년 열정 가득한 연주와 관객들의 환호로 가득했다.

 

그의 연주가 이토록 인상 깊게 남은 것은 아마도 행복한 얼굴을 하고 타건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자신이 정말 좋아서 하는 일을 온 정성을 다 쏟아부은 그 모습에 열광하지 않을 청중이 있을까.


연주 후 수줍어하는 모습을 보면 그 나이 때로 보이기도 하지만,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고 깔끔하면서도 멋진 감정선을 표현하는 연주 실력과 순수하게 음악을 사랑하는 그 마음. 삼박자를 고루 갖춘 그는 한국 관객들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그의 열정 이면에 자리한 아주 냉철하고 정확한 테크닉. 숱한 시간을 피아노 앞에서 보내며, 갈고 닦았을 것을 생각하니 경외심이 들었다.


그렇게 여름과 가을 사이를 넘나드는 그의 연주가 막을 내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함께 공연을 봤던 지인과 함께 그의 연주에 대해 쉴새없이 나누었다. 저런 열정을 살갗으로 느껴본 지가 언젠지, 정말 잊고 있던 내 안의 불을 다시 지펴주는 듯한 연주였다는 이야기와 함께 앨범 발매 후에 내한을 한다면 줄을 서서 사인을 받고 싶다는 말을 농담처럼 주고 받았다.

 

 

인사2.jpeg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그리고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피아니스트 알렉산더 말로페예프. 다음 내한 때는 더 무르익을 그의 연주를 고대하며 글을 마친다.

 

 

 

윤화 컬쳐리스트.jpeg

 

 

[강윤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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