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비 오는 날과 파가 듬뿍 들어간 쌀국수 [사람]

섬세해진다는 것
글 입력 2022.09.05 17:25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비를 좋아한다.

 

우산을 간지럽히듯 내리는 보슬비가 좋다. 가끔은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퍼붓는 장대비도 좋다. 웅덩이에 뛰어든 물방울이 다시 튀어 올라 내 발목에 닿는 것도, 딱 기분 좋을 만큼만 차가운 공기가 몸을 감싸는 것도. 창문에 내려앉은 비가 악착같이 제자리에서 버티고 있는 것도 좋다.

 

그중에서도 제일 좋은 건 온 세상에 물큰하게 퍼지는 비 냄새다.

 

 

umbrella-gb00045856_1920.jpg


 

그러니까 나는 비가 올 때 행복하다. 비가 보슬보슬 내려 우산을 쓸지 말지를 고민하게 되는, 그런 날씨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날씨다.


친구들은 이런 내 성향을 신기해하거나, 의아해한다. 그들에게 비 오는 날씨란 그저 우산을 써야하는 날이거나 입고 나간 옷들이 젖는 날일뿐이다. 내가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여러 이유들을 친구들은 느끼지 못한다.


비 오는 날을 섬세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을 행운이라고 여긴다. 친구들은 맑고 상쾌한 날만을 좋은 날이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나는 맑은 날과 비 오는 날 모두를 좋은 날이라고 여길 수 있다. 말하자면 내 1년은 친구들의 1년보다 좋은 날이 몇 십 일이나 많다.


섬세하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남들은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것들을 발견하고, 살펴보고, 좋아할 수 있는 것.

 

셔츠를 그냥 입을 수도 있지만, 셔츠 팔꿈치에 다트가 잡혀있는 것을 발견하고 행복해하거나, 애인의 입술에 묻은 초콜릿을 발견하고 달콤한 간식을 먹었구나 생각하며 웃거나, 집 앞에 피어 있는 민들레를 보고 어디서 날아온 것일까를 오래 상상하는 일.

 

섬세함은 인생에 많은 행복을 가져다준다.

 

 

IMG_5948 2.JPG

  

 

나는 어제도 싱싱한 파가 들어간 쌀국수 국물을 먹고 싶어 했다. 국물에 들어간 파 맛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이다. 나는 원래 국물 본연의 맛을 즐기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강남의 한 쌀국수 집에서 나는 여느 때처럼 소고기 쌀국수를 먹었다. 파가 엄청나게 많이 올라가 있었다. 면을 먹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국물을 먹을 때가 문제였다.

 

나는 국물만 먹고 싶었지만 너무 많은 파 때문에 국물만 먹기란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이 국물과 함께 파를 삼켰다. 근데 웬걸, 국물과 함께 입 안에 들어온 파는 너무나 시원하고 상쾌한 향을 풍겼다. 나는 계속해서 국물과 파를 함께 입에 넣었고 그 깔끔한 느낌을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의식 없이 쌀국수를 먹었다면 면이고, 소고기고, 국물이고, 파고, 가릴 것 없이 그냥 먹어치웠을 것이다. 하지만 유독 파에 신경을 쓴 내 입 덕분에 나는 국물 요리 속 신선한 파 맛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섬세하지 못할 때는 특별하게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점점 특별해진다.

 

나는 쌀국수 한 그릇을 먹을 때도 고작 파 때문에 행복해한다.

 

 

dandelion-g9d089baa7_1920.jpg

 

 

나는 이제 막 섬세함이 주는 행복을 깨달았다. 조금 더 섬세해진다면 나는 매사가 행복한 일상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신발이 뒤꿈치를 포근하게 감싸는 느낌 때문에 행복하다. 가을비가 내린 후에 남은 비릿한 흙냄새가 좋다. 다음은 어떤 것이 내 미약한 섬세함의 레이더에 걸려 내 일상에 행복하게 해줄까.


당신은 무엇에 섬세한지, 어떤 사소한 것 때문에 행복해하는지가 궁금한 하루다.


 

 

에디터 명함.jpg

 


[권명규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0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